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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얘기의 샘
얘기의 샘 2 - 경제운동의 양상
얘기의 샘 2
경제운동의 양상
1969.04.24 방송
(음악)

얘기의 샘. 스칼프터, 동서약품 제공입니다.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경제운동의 대두에 관한 얘기를 사학자 이선근 박사와 소설가 서기원 씨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전 시간에는 형평사 운동에 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에, 3.1운동 후에 민족의식에 어떤 고취된 양상이

경제면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가령 물산장려회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 네네.

- 경제생활면에서 드러난 형태가 어떤지 오늘 말씀 듣겠습니다.

- 우선 말씀드릴 것은 요전 시간까지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미독립운동 이후에 국내 민족운동은

말하면 자주적인 문화운동-.

- 네.

- 혹은 문예운동. 이런 것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았어요?

- 네.

- 이 운동에 자극돼서 경제 사는 면에서도 우리가 자주적인 자활운동. 어... 마, 이런 운동이

대단히 그,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 네.

- 여기서 잠깐 돌이켜서 볼 것은 대체로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의 자본이 인제 급속도로

침투해 들어와서 모든 그, 경제적인 약탈행위, 이런 것이 인제 아주 참 인체로 말하면은

모 시간까지 파고드는-.

- 네.

- 가령, 예를 들면 그물교환망 같은 거 있잖아요? 이것이 농촌 말단 직업까지 파고들어 설랍네

그... 가혹한 착취, 수탈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 네.

- 따라서 농민들 대부분이 말하면 만주로, 시베리아로, 혹은 일본으로 노동자로, 혹은 농업이민으로서

막 많이 흘러나갔거든요?

- 금융조합이 조직이 된 것이 그러니까 3.1운동 훨씬 전이죠?

- 훨씬 전이죠. 그건 말하면...

- 동척이 들어온 다음에, 거의 그 무렵 아닙니까?

- 네. 거의 그 무렵입니다. 그러니까 아, 보호 통치라는 소위-.

- 네.

- 마, 그 당시에 동척이 들어오고, 동척이 들어와 가지고 설랍네 역시 금융조합이, 쉽게 말하면

에, 고리채의 무서운 조직망 아니겠어요?

- 네.

- 거기에 대한 피해가 아주 막심했다. 어, 그와 동시에 인제 지금 말씀한 대로 한국의 농민층 내지 중산층은

완전히 몰락해서 땅으로 무너졌거든요.

- 네.

- 따라서 인제 참 말하면, 에, 그, 일반 농촌상황은 과거의 소작농은 전부 농노로 전락을 하고 과거의 중농, 호농까지도

말하면 나중에 가서는 소작농, 큰 소작농으로 전락을 했다.

- 네.

- 따라서 이러한 상태를 갖다가 우리가 어떻게 다시 부활시키느냐, 그러면서 인제 대체로 1922년 이후에 들어가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 큰 대지주 있잖아요?

- 네.

- 대지주가 말하면 동척 같은 거, 일본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역시 인제 그 민족의식이 강력히

되살면서 각 농촌에설 랍네 소작농의 항거-.

- 네.

- 소작쟁의, 마, 이런 것이 도처에서 대두가 됐다. 그러니까 이 소작쟁의 같은 것은 말하면

일면으로 보면 계급투쟁 같은-.

- 네.

- 그런 성격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소작쟁의 갖다가 자유주의가 침투하면설랍네 여기 작용을 하게 되죠.

그러나 그 반면에 뭔고 하니 민족적인 항쟁, 이것이 자주국가에서 가장 그 당시의 일본의 소작쟁의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니까 농민들이 그, 자주적인 독립운동의 일익으로서 소작쟁의도 일어나고 물론 그와 동시에 그, 말하면

계급투쟁 같은 이런 성격도 띠게 되는 거죠. 그런데 농민이 볼 때에는 피압박계급이 곧 일본사람 대지주라

이런 형태를 띠어 설랍네 일본 자본가에 대한 항쟁, 혹은 또 동척이민들이 와서 지방에 들어가서 굉장히 행패가 많았거든요?

- 네.

- 어, 가령 전라도 같은 데는 말하면, 에, 거의 한 군 같은 걸 갖다가 전부 동척이 매수해가지고 설랍네

자기네 강제로 매수해서 이민시키고 그러면서 이민들이 별 짓 다 하거든요? 가령 지방에 와서

근로자에 쭉 퍼지면 근로자에 이사 갔던 곳에 대부분 일인들이 들어와 있었어요.

- 네.

- 그래서 같은 고을이라도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는 가혹한 조건으로 융자를 해주고 토지 수탈하고.

토지 수탈을 미끼로 해설 랍네 많이 융자가 된 거 아닙니까?

- 네.

- 마, 그래서 인제 이런 형태에서 말하면 중산계급까지 완전히 몰락하게 됐다.

- 근데 저,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요. 입도선매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 네네.

- 그 무렵에 입도선매라는 얘기가 퍽 많이 나오는데요. 물론 그 이전에도 이조시대부터 그런

에, 폐습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별안간에 급작스럽게 많이 퍼진 것은 아마 그 무렵이

아닌가 싶어요.

- 입도선매가 그, 이조시대에도요. 일제의 자본공세가 침투해 들어오기 전에는 말하면, 문헌 상 보면 입도선매가

별로 없습니다.

- 네, 나라에서 그, 양곡을 대여해주는 제도가 있었죠. 형식상.

- 네, 대체로 그, 입도선매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말씀 조건 곁으로 들어갑니다만 청일전쟁, 갑오전쟁 나기 전에 말이죠.

- 네.

- 원산 중심에서 황주 배상 문제가 나왔죠.

- 네.

- 고것이 그 당시에 원산에 들어온 일본 사람, 그, 시전 고리채업자들이 그때부터 입도선매를 시작했어요.

그러니깐 드루 1880년대 말기부터-.

- 역시 일제침략으로 그런 게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여간 해서 과거에 입도선매라는 것은 별로 없었다고 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드루 일제자본이 침투해

들어온 후부터 입도선매가 나왔다.

- 네.

- 마, 그러자 지금 말씀한 대로 그런 비참한 지경에 있는 농촌사회에, 혹은 그 당시 상업자본이라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별로 있습니까? 소비품이라는 게 전부 일본제품이거든요. 그러니깐 도시나 농촌에 있어서 설랍네 일본의 소비품.

이걸 갖다가 막으면서 경제적으로 자주운동, 자활운동을 전개하자. 이것이 1922년대부터 어, 대단히 싹트기 시작하는데.

- 네.

- 때마침 이 당시에 묘한 얘기는 그 당시 일본 내각이 가도내각입니다.

- 가도.

- 가도. 그런데 일본이 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대단히 곤란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일본의 가도내각과 그,

가등내각이 전후의 경제공황,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큰 정치공약으로 뭘 내걸었냐. 긴축정책, 소비절약.

- 네. 1차대전 이후에 세계적인 불황-.

- 그렇죠. 불황이죠. 공황.

- 네.

- 그 속에설랍네 일본정부가 그런 정책을 내걸었거든. 그 정책을 우리들이 역이용하게 되는 겁니다.

- 네.

- 일본 내각이 소비절약과 긴축재정, 근검절약하는 거. 이것을 장려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식민이라도

우리 민족 자신이 소비절약하면서 우리 토산을 애용하자.

- 네.

- 그러면서 스스로 우리가 말하면, 자력으로 우리가 그, 산업 부흥시키는 이런 걸 하자, 그래서 맨 처음에 난 것이 1922년에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 댕기는 박태화라는 분 이하 인테리들이 자작회라는 걸 꾸몄죠.

- 아.

- 자작한다, 스스로 자 자하고 질 작 자. 농민 대중한테 호소하면서 자급자족하자는 얘기가 될 겁니다.

- 네.

- 우리나라에서 나온 상품을 갖다가 우리가 써가고 외국상품을 갖다가 배척하자. 그렇게 시작했죠. 네.

- 네. 시간이 다 됐습니다.

- 네.

(음악)

오늘은 경제운동의 대두에 대해서 이선근, 서기원 두 분의 대담으로 들으셨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물산장려와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음악)

(광고)

(음악)

얘기의 샘. 스칼프터, 동서약품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1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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