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 얘기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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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 1일의 민족대표 33인에 관한 얘기를 사학자 이선근 박사와 소설가 서기원 씨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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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초하루 당일의 광경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까요.
- 네.
- 일본 측에선 그 불의의 기습을 받은 것처럼-.
- 예.
- 퍽 당황한 걸로 느껴지는데요. 에... 기마헌병대가 나온 것이 어두워질 무렵에 나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해질 무렵에 나왔죠.
- 그동안 벌써 정오부터 하면 너 댓 시간, 시간이 있는데요.
- 네.
- 시위하고 만세를 부르고 하는데 경찰관들은 제지를 전혀 못했군요.
- 못했죠.
- 네,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 어... 그런데 걸작은요. 경찰관에도... 경찰들은 아주 제지하려고 그러잖아요?
- 네.
- 그 중에 한국사람이 순사고, 헌병보가 있거든.
- 네...
- 이런 사람보곤 말이야, 우리 학생들이 말이야. ‘당신도 한국사람 아니냐? 우리 독립하는 데 괜히
간섭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같이 만세 부르자.’ 그래서 헌병보들이나 순사보들이 말하면 복장 벗어부치고
같이 만세 부르러 나왔거든요.
- 네.
- 그러니까 에, 그 당시 인제 보통 순사 가지곤 말이지, 적어도 참 심문-.
- 엄두를 못 내겠습니다.
- 엄두도 못 내죠.
- 네.
- 그리고 인제 요전 시간부터 얘기한 대로 각 지방에 모인 분들이 말하자면 수십 만 장안에 꽉 찼거든요.
어디다 갖다 손대냐. 네, 마 이 당시-.
- 한편으로 민족대표 33인은 어땠습니까? 태화관에서...
- 예. 이날은 이분들이 말이면 에, 정오를 기해가지고 전부 태화관으로 모이자.
- 네.
- 태화관으로 모여가지고 어... 그때 태화관 주인이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 근데 어느 문헌을 보니까 명월관이라는 요리집의 분점 비슷하게...
- 그렇게 됐죠.
- 네.
- 맞아. 명월관 본점은 지금 단성사 앞 태화정, 요즘 그 무슨 극장 돼있죠? 무슨 극장인가. 같은 활동까지는 아는데
단성사 바로 앞집이...
- 피카디리인가... 그게..
- 근데 고 뒤에 거기가 명월관 본점입니다.
- 네.
- 명월관 지점이 태화관도 있고 지금 여기 저... 동아일보사 여 뒤에, 무교동 근처에 중국요리 하는 집 있잖아요?
- 예.
- 그것도 옛날 태화관 지점 노릇을 한 적이 있어요.
- 아아...
- 명월관이 그 당시 요리업은 제일 큰 거고, 말하자면 군림하다시피 했고 어, 그 지점 노릇을 태화관에서 했지.
에, 이 태화관으로 모여가지고 이분들이 말하면 거기서 선서 낭독을 하고 그리고 이... 포도준가 술 갖다 놓고 설랍네
오늘 이후로 어떤 사태가 날지 모르니깐 드루 참 맹세하면서 같이 인제 한 잔씩 왔다가 들고, 축배 좀 들고 그때까진
독립선언 하러 모인다고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모인다. 그래서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나와 설랍네
큰일 났거든요.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맞아. 거기 늘 자주 댕기던 분이 말하자면 손의암이에요.
- 네.
- 손병희 선생. 와서 울상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 저희 내일부터 문을 닫지 않습니까? 어떡합니까?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의암 선생, ‘뭐 정 그러면은 인제 우린 우리 임무를 갖다가 일단 여기서 끝냈으니까
네가 경무청에다가 전화를 걸어서 여기 우리 있다는 걸 갖다가 통고를 해라.’
- 네.
- 그래서 안순환이 그 사람이 당황해가지고 ‘여기서 독립선언을 하고 말이야. 여러분들이 모여서 이러이러 했습니다??
하고 전화통화를 했다고 합니다.
- 아... 33인 중에 한 분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들었는데-.
- 아, 근데 내가 들은 건 그렇지 않습니다.
- 네.
- 역시 소위 그... 당시에 말이죠. 요리집 주인이 마저 안순환이 얘기 들으면 근사한 얘기 아니에요?
- 그렇죠.
- 그렇게 안 하면 문 닫고 야단 날 테니까 저도 얼굴이 핼쑥해가지고 하니까는 손 의암이 껄껄 웃으면서
어쩌면 그렇다면 역으로 가라. 마 그래가지고서 그 당시 인제 경무청에서 와가지고 어, 경무청에서
차를 가지고 와서 모든 양반 모셔다가 투옥을 시켰다 그거지.
- 네.
- 에...
- 거기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 네.
- 너무 소극적이고 약한 자세가 아닌가. 좀 더 강력하게 말이죠.
- 네. 근자에 와서 말이죠. 아, 지금 선생 말씀처럼 그런 말씀을 하는 분도 있고.
- 네.
- 또 글로도 쓴 분들이 있죠. 그런데 나로 보면 이것은 말이죠. 그 당시에 그 독립선언 내용에도 나옵니다마는 우리는 고도의 질서를
지키면서 일본민족을 원수로 대하지 말고 우리 주장만 정정당당히 하자.
- 네...
- 질서를 지키는 게 평화적인 시위운동, 평화적인 항거를 하자. 난 이것은 그... 그 당시에 정세로 봐선 말이죠.
역시 33인이라든지, 그 당시 독립운동에 그... 리더십을 장악한 분들이 이런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난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다.
- 네.
- 그럼 왜 그러냐 그거예요. 이 당시에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얼마만한 경비태세를 취했냐,
3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우리나라에서 주둔했습니다.
- 네.
- 그리고 2개 함대 이상의 해군병력이 우리 해안선을 경계하고 있었어요. 하나는 북백으로 진에다 두고
그리고 동서양의 유구한 해군병력이 있으니까.
- 네.
- 적어도 그만한 병력에다가 또 일본사람 헌병대 경관들, 이건 전부다 군사를 받았고 또 이 당시 벌써
수십만 말하면 일본 이민 들어와 있잖아요?
- 네.
- 일본 차이나 이민들, 걔네들 전부 병력 다 맞춰서 다 제한군입니다.
- 그렇죠.
- 또 그네들이 자경단이라는 거, 고려군단의 자경단 조직 다 없거든요. 이건 다 일본 쪽에서 할 때
언제든지 정규병이나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말하면 수십만 병력을 딱 깔아놨는데 우리 한국 측으로 보면
그 당시 방곳 하나 손에 못 쥐고 있잖아요? 거기다 만일에 폭력항쟁 한다, 무력항쟁 한다. 그려면은 그네들한테
좋은 구실을 주는 겁니다.
- 네.
- 좋은 구실을 줘가지고 참 일제 사격을 가해설랍네 수천수만이 한 장소에서 쓰러져 나갈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런 점을 생각해가지고 비폭력항쟁을 갖다 했다. 역시-.
- 그런 비폭력 무저항주의라고 할까요.
- 네.
- 인도의 간디가 유명합니다만.
- 네.
- 그 무렵에도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던가.
- 아마 고것은 말이죠. 거... 인도독립운동을 말하면 군사운동이 있잖아요.
- 네.
- 고거 보시면 그 당시에 대도기를 시작했으니깐 드루 또 이것은 말이면 우리가 볼 것은 그 당시에
그 3.1운동의 주도세력 있잖아요?
- 네.
- 이것이 종교인, 교육인, 문화인 아닙니까.
- 네.
- 특히 말하면 3대 종교의 최고 간부급들이 모여서 했거든요. 그러니까 종교적인 수장을 받드는 그분들이,
또 객관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일제의 거창한 무력 앞에서 우리가 참 말하면 무더기 아까운 피를 갖다가
흘리면서 우리가 해야 되느냐. 난 그 당시의 정서로 봐서 저네들의 군사역량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볼 때는 이건 까딱 잘못하면 말이죠. 어... 지속은 못하고 단 며칠 동안 가지도 못하고 무슨 핍박과 압박을
받기 쉽거든. 그런 점에 이건 참 심사숙고한 나머지 그런 조치를 취했다.
- 네.
- 물론 일부분들이 서 선생 말씀한 대로 거 어째 젊은 학생들을 갖다가 전면에 내세워서 피 흘리게 하고 지도자들은
행동을 말이야 그런 식으로 취했냐, 비겁하지 않냐. 그런 얘기를 하는 거를 나도 글로 쓴 것도 더러 보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 국내정세, 이것을 냉엄하게 분석해보면 오히려 현명한 판단이었고 현명한 행동을 취했다는 게 나옵니다.
현명한 행동을 취했다, 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네.
- 마,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서 그 당시 말하면, 그 당시에 참 주동역할을 담당했던 그분들에 대해서 어...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것은 그 당시 정세를 갖다가 실제로 모르니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다-.
- 네. 33인의 구성인데요.
- 네. 그분들 가운데에는 이... 유림대표라고 할까...
- 예.
- 그... 의병항쟁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유림 측의 대표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네.
거기 대해선 학계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 네.
- 선생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 근데 이 당시의 거... 유림의 거물로서는... 어... 대체로 인제 가령 중추원 부의장 노릇한 말하면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거든요?
- 네.
- 문장대가로 쳤지. 또 유림의 양반 측의 일부들, 과거엔 말하면 권력층 아닙니까?
- 네.
- 대체로 한일병합에 협력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역시 거기에 대해선 거, 유교사상 근본이 좋게
말해서 중용주의인데 어떤 권력구조가 딱 서면 거기다 타협하는 것도 역시 유교사상의 약점이 아닌가 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네.
- 에, 따라서, 일전에 그런 이야기 했죠? 동경유학생들이 처음에 나와 가지고 비밀리에 말하면 요전 시간에 말씀하신
송계백이라든지 몇 명이 나와서 어... 여기 선배들하고 호흡을 맞춰가지고 몇 군데 전부 다 예비교섭을 해봤다
그거예요. 역시 그 당시에 한규설 같은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 네.
- 그런데 한규설 같은 분한테 다가가서 교섭을 하니깐 그분은 어떤 얘길 했느냐 일제의 영향이 이만큼 센데
거기서 이런 거족적인 운동을 일으키다가 잘못되면 큰 사단이 나지 않나. 차라리 나보고, 나보고 총독부 앞에 가설랍네
할복자살하라. 그러면 내가 어떤 결심하지 모르나 이런 거족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데 자긴 가담할 수 없다.
- 네.
- 그런 얘기까지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마, 유림, 유교사상에 젖은 분들이 상황판단이든 모든 걸 갖다가 빨리 못하고
거기서 제외됐던 것만은 사실이죠. 또 참가를 안 했던 건 사실이고.
- 네.
- 그러니까 결국은 33인을 우리가 분석해보면은 기독교 대표가 여섯 명, 천도교 대표가 손병희 선생 이하 열다섯 명.
- 네...
- 불교 대표가 두 사람입니다.
- 천도교하고 기독교...
- 천도교하고 기독교가 양대 기둥으로 주도 역할을 했고 불교는 역시 같이 협력을 했다.
난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한 일이고.
- 네, 김윤식의 경우는 따로 건백송가하는 걸-.
- 그건 나중에 뒤에 가서-.
- 중도한테 해냈습니까?
- 네, 장서를 냈죠. 그리고 유림에서도 나중 가서는 마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깐 드루
건백서 장서를 갖다가 낸 적 있잖아요?
- 네...
- 적극적으로 참가를 안 했죠. 어... 그리고 캐드립도 참가를 안 하고.
- 아, 감사합니다.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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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 1일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 이선근, 서기원 두 분의 대담을 들으셨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얘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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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의 샘.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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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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