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얘기의 샘
얘기의 샘 2 - 3.1독립선언
얘기의 샘 2
3.1독립선언
1969.01.16 방송
(음악)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 얘기의 샘.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3.1독립선언에 관한 얘기를 사학자 이선근 박사와 소설가 서기원 씨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음악)

- 3.1독립운동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마는.

- 네.

- 먼저 그, 그와 같이 대규모의 거족적인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말이죠. 에, 사전에 일제 측 경찰에

적발되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이 됐다는 거.

- 네.

- 아주 놀라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 그래서 그와, 뭐 그런 데 대한 에피소드, 또한 그 준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금의 출처, 혹은 그저 좀 측면적인

면에서 재밌는 말씀 있으면-.

- 네, 마, 대개 짐작하시는 분은 짐작합니다만 그 항상 인제 국내 3.1운동의 주동적인 역할을 어디서 많이 했냐-.

- 네.

- 마, 이것가지고 논란이 많이 있죠. 그러나 인제 한 사학도로 공정히 보면은 이 당시 3대 종교단체가 함께 움직였다-.

- 네.

- 동학 천도교하고 신파 기독교하고 불교하고가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늘 이런 운동을 전개하면 말이야.

어, 대개 메인 장소, 중심이 어디냐. 이것은 역시 손의암을 말하면, 손의암이 천도교의 이 당시, 제3세 교주 아니에요?

- 네.

- 그런데 이 양반이 스케일이 크거든. 그리고 손의암은 말하면 1905년 그, 을사조약 이후로 교육문화운동에다가

표면에 치중하면서 내용으로는 그 천도교의 조직망 있지 않습니까? 교단조직에다가

다시 이중으로 비밀조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 네.

- 잘 알다시피 천도교는 접촉제도가 있잖아요?

- 네.

- 그 접촉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들을 다시 뽑아가지고서 참 즉석부대로 설랍네 항상 어떤 행동개시를 하던

같이 일어나자, 그래서 그 역시 교단조직 밑에다가 더 강력한 조직을 폈다, 그와 동시에 잘 아시다시피

천도교에선 지금까지 재정조달을 갖다가 신도의 성금운동에 많이 의뢰하지 않았어요?

- 예.

- 어, 각 신도들이 하루 세 때 밥 줄 때에 식구 한 사람 앞에 한 숟갈씩 쌀을 떠서 모은다. 그래가지고 그걸 갖다가 본부에다가 바친다.

이것이 인제 거 참 말하면 아...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전국 신도가 인제 올리는 것이 굉장하거든요. 그래가지고 묵묵한 가운데

조직으로 확장시키고 자금을 갖다 마련했다고 합니다.

- 네.

- 그러니까 역시 교단이니까 교주에 의해서 했더라도 언제든지 자금을 갖다 비밀리에 돌릴 수 있다.

그래서 그 역시 천도교가 아, 대체로 많이 주동역할을 하고 동시에 인제 천도교들이 주동을 하면설랍네

알아보니까 기독교 측에서도 움직인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것은 따로따로 봉기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 된다.

그래서 이 당시에 이런 중간역할, 3대 종교단체가 같이 하도록 움직이는 데 역할을 한 분들이, 에, 현상윤 씨라든지

에, 육당이라든지. 에, 혹은, 어... 물론 천도교 측에서도 최진 선생, 최린 씨라든지 이런 분들이 많이 활약을 했고

어, 이 당시 기독교 측에 있어서는 내가 들은 바로는 어, 대체로 소장 측에서는 어, 이갑성, 박희도라는 분이 있었지.

- 네.

- 이런 분들이 인제 많이 활약을 해서 지방에 계신 에, 남강 이승훈 선생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마, 이래 설랍네

양대 종교단체가 합류를 하게 됐다는 것이 큰 모멘트. 그러면서 불교 측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라든지

혹은 백용성 씨. 마, 이런 분들이 역시 불교대표로 참가를 했다. 에, 그래서 그, 늘 자주, 지금 우이동에 보안각이 있잖아요.

의암 선생 계시던-.

- 예.

- 그런 데로 가끔 모이고, 여기서도 그 양반이, 옛날 명월관이란 요리집이 있었어요.

- 네.

- 명월관 지점에서 이런 데서 자주 모이고 또 참, 호탕한 기상으로 설랍네 의암이 돈도 잘 쓰고 그러니깐도.

그런 장소를 택해서 비밀리 모였다 그거지. 내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은 인제 그 사람들이 얼른 모이기 전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그 당시 이분들의 뒤를 밟는 사람이 내가 들은 얘기로는 신철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고 그래요.

신철인가, 김철인가.

- 네.

- 네. 헌데 인제.

- 조선사람 형사군요.

- 조선사람 형사지.

- 네.

- 그자가 늘 미행해 설랍네 따라다닌 것 같은데 그자가 거사 전에 찔러놓으면 일이 낭패거든.

그래서 최린 씨가 하루 대담하게 말하면 그자를 찾아가지고 딱 설파했다 그거야.

- 네.

- 아무래도 그대가 눈치 챈 것 같은데 너도, 너도 그 당시 말로 조선 놈 아니야, 너도 한국 놈 아니야.

그러니 이 운동 터질 때까지만 입을 닫아라.

- 네...

- 음, 간곡히 부탁을 하니까 이 형사가, 한국사람 형사가 ‘좋습니다, 제가 결코 입을 안 띠겠습니다’ 말이야.

그랬던 비화가 있지. 그러나 나중 가서 이 사람은 그 당시 일인 경찰로 보면 말이야. 아주 긴요한 형산데

나중에 터진다면 어떡해요. 터진 다음에 가서는 이 사람이 인제 그, 다른 구실을 잡아가지고

만주에서 독립군이 들어와. 그런데 자기가 그걸 갖다가 사찰하러 갔어.

- 네.

- 그래가지고 의주로 가다가요. 그것을 일본경찰이 알았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의주 내리기 전에 기차간에서 체포됐다 그겁니다.

- 아.

- 그래서 일설에는 이분이 나중에 가서 체포돼 설랑 불게 됨으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 네.

- 그래서 나는 그 비록 한때는 일제의 주군하사를 했으나 기미독립운동, 3.1운동이 터지는 그 직전에 아슬아슬한 판국에

이만큼 역시 민족 본연의 애국심을 발휘해서 입을 다물고 이름 없이 죽어간 그런 애국형사도 있었다.

아, 뭐 이런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신철이라고도 그러구요.

- 네.

- 뭐, 그러니까 그런 분이 있어서, 뭐 이런 분은 나중 가서 될 수 있으면 확실한 사실을 펴내가지고

우리가 참 정중하게 표창도 해야 된다.

- 네.

- 나중 가서 황옥사건 있잖아요. 경보. 뭐 그런 사건도 나중 가서 티가 납니다마는 역시 이 당시에는 아까

말씀한 대로 3대 종교단체가 동원이 되고 주동이 된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입니다.

- 네.

- 난 요즘 말해서, 선생도 아시지마는 거 기미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이 뭐냐 할 때

어떤 분들, 농민, 노동자라고 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데 이거는 너무 기계적인 해석이고

그 당시에도 대체로 우리나라 농민들이 말하면 그거야 우리나라의 인구의 8할이 농민이니까 그랬으므로

또 이선근이 같은 사람도 우리 집안만 보면 말이야, 농업으로 돼있습니다 그 당시에.

내 선친은 교육자고 학교 세워서 교장으로 서셨는데 말하면은 전부 그렇기는 했습니만도

그런 식으로 갖다가 말하면 붙인 자는 몰라도 역시 광범위한 문제겠죠. 이 나라의 지식인들이

교육자가 주동이고 종교인인 주동이 되면서 역시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학교기관이 많지 않았어요?

여기서 학생들이 크게 동원됐다.

- 그럼 역시 그때 간혹 있을 수 있었던 조직이나 단체라는 게 종교단체밖에 없지 않습니까?

- 종교단체 하나밖에 없죠.

- 지식인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죠.

- 옳습니다. 그거 무시하고 말이야. 역시 말하면 지식인들, 지성인들, 인텔리계층이 역시 중심이 됐다. 나중에 동원된 대중들,

그야 은근히 많이 동원됐죠.

- 네.

- 그러나 역시 기미독립운동에 그 주동역할은 지식계급이 했고 전의적 역할, 핵심적 역할을 한 데는

학생들이, 각 급 학생들이 무더기 피를 흘리면 설랍네 크나큰 역할을 담당했다. 영광은 스승들한테

돌리더라도 실제는 학생이, 말하면 세계약소민족운동의 그 해방투쟁 형식이 대체로 학생들이 늘 전의적 역할을 하잖아요.

- 네.

- 그러니깐 2.8일부터 독립선언이 3.1독립선언의 전의적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요전 시간에 말씀한 대로

유학생들이 돌아가 가지고 설랍네 학교 가는 길에 모두 후배, 선배들 찾아가지고 자기 고향 내려가서 자기 고향의 부형들을

동원시켰으니깐 드루 부형들이 농민이지.

- 그때 시길 보면 말이죠. 3월 3일 날이 고종의 인산 아닙니까. 며칠 전부터 시골에서 많이 올라왔죠?

- 그렇습니다.

- 유생들, 뭐 노인들 말이죠. 올라와서 대한문 근처에 가서 인제 곡을 하고 말이죠. 서울 장안이 모두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꽉 찼던 모양입니다.

- 수십 만 명 찼습니다. 대체로 내가 추측하거는 그 당시에 서울 인구가요. 내가 처음 서울 올라와서 말하면

대체로 그 당시에 인제 신문 같은 데 보면 30만 시민이었거든요. 서울 시민.

- 예.

- 요즘 400만 시민이지 않습니까. 실로 감개무량합니다만 실제로 그저 25만에서 30만, 거기에 지방 사람들이 수십만이 올라오고

적어도 10만 이상 모였을 겁니다.

- 네.

- 내 집안에서 보면 말이야. 그 당시에 내 조모님이 생존해 계셨어요.

- 네.

- 내 조모님이 칠순이 넘으셨는데 ‘야, 인젠 마지막이다.’ 지방에서는 서울 올라올 힘 있는, 경제력 있는 분들은 대개 다 올라옵니다.

노인들이 제일 많이 올라왔지.

- 예.

- 못 올라온 사람들은 산꼭대기를 올라가서 서울을 향해서 아침부터 망곡을 해요. 곡을 하고 또 누가 명령

내리기 전에 저분들이 전부 복상을 다 입었습니다. 백립 쓰고 다 여자는 씀뎅이 두르고 다니고.

- 네.

- 뭐 그래가지고 민족의 설움을 갖다가 고만 거기에 전부 폭발시켰어요. 고 찬스를 잡아가지고 3월 1일 날

거족적인 궐기를 갖다가 시도했다.

- 네.

- 그런데 내가 알기에도 어, 이 당시 전국의 십여 개 도시가 3월 1일 날 오후 2시를 기해서 한 날 한 시에 봉기하지 않았어요.

- 네.

- 그러면서 각 지방에, 서울서 독립선언서를 갖다가 인쇄해가지고 배부했습니다.

- 그러고 보면 말이죠. 아주 비밀리에 연락이 잘되고.

- 비밀리에 아주 잘됐죠.

- 아주 조직화돼 있었던 것 같애요.

- 에, 마, 마침 나왔으니깐 드루 이 당시에 운동자금을 대기는 천도교에서 주로 댔어요.

- 예, 재정이 제일 풍부했던 모양이에요.

- 재정이 제일 풍부했죠. 그러고 인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미사 날이 있잖아요. 선교사들이 도움을 줬지.

- 아.

-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자금을 말하면 대부분 천도교에서 댔다. 또 독립선언서 인쇄도 그 당시에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가 아니면 인쇄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 네.

- 네, 보성사에서 거 인쇄할 때 아슬아슬하게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들킬 뻔한 얘기도 있습니다만.

- 네.

- 그만큼 큰 역할들을 담당했죠.

- 네, 감사합니다.

(음악)

오늘은 3.1독립선언에 대해서 이선근, 서기원 두 분의 대담을 들으셨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3.1독립선언의 선포와 장안의 모습에 관한 얘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음악)

(광고)

얘기의 샘.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입니다.

(입력일 : 2011.02.01)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