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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의 샘
얘기의 샘 2 - 동경 유학생의 궐기
얘기의 샘 2
동경 유학생의 궐기
1969.01.13 방송
(음악)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 얘기의 샘.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동경유학생들의 궐기에 관한 얘기를 사학자 이선근 박사와 소설가 서기원 씨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음악)

-3.1운동의 전야에 관한 말씀 계속인데요.

- 예.

- 동경유학생이라고 할 것 같으면 2.8선언에서 3.1운동의 소주라고 할까.

- 그렇죠. 전주...

- 유명한데요. 그 무렵의 동경유학생들의 동태는 어땠습니까?

- 대체로 먼저 잠깐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에 그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언제부터 생겼냐-.

- 예.

- 마, 이것부터 먼저 되지, 이것은 주로 말해 멀리 올라 가면은 병자 수호적 체결한 후에 내가 기록 본 것은

경진수신사, 1880년에-.

- 김기수-.

- 어, 고것은 고 전이고, 병자수호조약-.

- 예.

- 고 다음에 제2차로 김홍집이 가지 않았어요?

- 예.

- 거 김홍집의 기록을 보면 맞아. 그 당시 유학생들을 불러서 접견한 얘기가 나옵니다.

- 아.

- 그리고 요 언젠가 말씀한-.

- 관비가 아니고 이제 사사로이 간 케이스겠죠.

- 예, 역시 인제 이것은 순전히 사사로이 간 사람은 말이죠. 이동인 같은 사람이 사사로이 갔고-.

- 예.

- 그 당시 관비로 많이 보냈습니다. 관비 아니면 갈 수가 없으니까. 에, 마 그래서 그런 유학생들을 갖다가

인정한 얘기가 나와요. 어, 마 그리고 그 다음에 인제 주로 구한말에 있어서는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 네.

- 육군사관학교는 갑신정변 때부터 말하면 육군사관학교에-.

- 도야마 호선학교.

- 도야마 호선학교, 거길 많이 갔었어요. 우리나라 구한말에 유명한 참, 말하면 사관학교 출신으로 국내에 들어와서

민족운동의 그, 일각을 차지해서 크게 활약했던 이갑 씨 같은 이, 또 노병윤 같은 이. 이런 분들이 대체로 동경사관학교

출신입니다.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란 말이죠.

- 네.

- 그런 분들이 중심이 되면서 어, 1910년 이후 12,3년 경 말하면 그 당시 보면은 역시 육당 같은 분, 육당 최남선이라든지-.

- 예.

- 혹은 호암 문일평이라든지, 이런 분들도 대개 동경 유학한 분들 아니에요? 그런데 먼저 동경 유학생들이 친목단체로서

학우회라는 것을 조직했거든요.

- 예.

- 학우회가 결성된 것이, 처음 결성된 것은 1912년 10월 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 당시에 발기한 분들 가운데

중요한 멤버들은 최한기라고 하는 분, 또 민세 안재홍.

- 예.

- 아, 또 조소항 같은 분. 이분도 일본 유학한 분이거든요. 어, 그러고... 어, 신석우 씨 같은 이. 이런 분들이 중심이 돼서

맨 처음에 학우회를 조직하고 학지광이라고 하는 그, 기관지를 발간했어요.

- 학지광.

- 학지광, 학지광이라. 나도 인제 중학교 때 가끔 학지광을 받아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 그 무렵의 유학생이면은 합병 후에는 역시 전부 사비로 가는 게 태반이겠죠?

- 사비로 가는 게 태반인데 고 저, 동경 그, 아시겠지만. 왜 고지마 지구라고 있잖아요?

- 예.

- 거긴 인제 옛날 우리나라 공관 자리, 그거 일부를 갖다가 인제 그대로 전용을 해가지고 유학생 감독부라는 걸 뒀어요.

유학생을 감독한다.

- 조선총독부에-.

- 조선총독부에서- 그 기관이군요.

- 예, 해가지고 거기에다 인제 사비로 가는 사람들, 혹은 이 당시에도 약간 말하면 관비로 가는 것이 있는데

에, 전부 다 거기서 합숙을 시켜서 기숙사를 만들었죠.

- 예.

- 나도 맨 처음에 일본 갔을 때, 기미독립운동 후입니다만. 에, 감독복지기숙사가 있고 그 앞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그래서 많이들 거기 운동 하러도 가고 그 집회장소로도 했습니다.

- 네.

- 그런데 이 당시에도 역시 감독부라는 것이 에, 있었거든요. 어, 그래서 인제 대체로 집회장소는, 에, 공식집회도 거기서 많이 하고.

때로는 인제 그.. 동경 칸다쿠에 말하면 에, 우리나라 사람들 YMCA가 돼있었어요. 거, YMCA가 돼있으니까 어, 그 빌딩에서

인제 예배 보기 위해서 있다가 거기서 많이 모의를 하고 그래서 유학생 친목단체로 결성된 학우회라는 것이 항상

유학생 전체에 대한 에, 친목, 조정... 어, 말하면 서로 어... 컨트롤한다고 할지-.

- 예.

- 마, 이런 단체에서 그건 자율적으로 해나갑니다. 그래서 학우회 간부들이 일본 유학생 사회를 리드하는

학생운동의 선구자격이죠.

- 이 선생님께서 유학하신 때는 언제쯤 됩니까?

- 아, 내가 한 것은 3,1운동 후니깐요. 어, 1923년에 내가 건너갔습니다.

- 네, 한 4,5년 후에-.

- 네. 4,5년. 아, 4,5년은 안 됐군요. 어, 2학년 때. 3년 후에 나갔으니까. 1922년에 갔죠.

- 그 무렵에 학생운동의 분위기 같은 게 살아 있었겠습니다.

- 네, 살아 있죠. 살아 있고. 마, 그래서 요 전 시간에 말씀한 대로 그 당시에 동경 유학생들이

그 대체로 학우회 간부쯤 되면요. 우리가 가 있을 때도, 경시청 형사가 늘 미행을 다닙니다.

- 네...

- 요인들, 그리고 학우회에서 인제 한 달에 한두 번이든지, 한 학기에 며칠날씩 에, 거기서 웅변대회를 열었거든요. 토론대회 같은 거.

그러면은 우리 국내 서울 같은 데서는 그런 집회가 절대로 허락이 안 되지만,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수도 동경 한복판이니깐

그렇게 여기 서울처럼 바로 총독부 코 밑에서 그렇게 폭압을 하는, 그런 것보단 조금 낫습니다.

- 네.

- 미행은 쫓아다니지만 그래도 가끔 집회도 하고 어, 그리고 인제-.

- 연설에 따라서 과격한 말이 나오면 인제 경관이 뒤에 입회하고 있다가 말이에요. 연설중지! 고함지르고 그랬던 모양이죠?

- 아, 그건 굉장하죠. 어, 중지시키고 나중에 해산 명령하고. 즉석에서요.

- 어, 처음에 중지도 말하면 에, 몇 가지가 있죠. 처음엔 주의! 그럽니다. 아하하하하하.

- 아하하하하.

- 잘 안 되면 중지하고 중지 안 들으면 해산 명령해 설랍네 바로 출동을 하는데. 에, 그렇게 간부들 미행을 하니까

요 전 시간에 말씀한 대로 재미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세 분을 파견하면서, 어... 한편으로

독립군 자금을 모은다.

- 네.

- 동경 유학생 학우회 간부들이 모모한 분들이 매가지고 마, 그 당시에는 역시 나중 가서 2.8독립선언에 서명한 분들이

대체로 학우회 중요 간부들이거든요.

- 예.

- 에, 최팔용, 서춘, 송계백, 에, 춘원도 마 이 당시에 있었으니깐요. 또 내사백, 이정근, 윤창섭, 백관수. 이런 분들, 그 중요 멤버들이에요.

그분들이 여기서 인제 공모한 것은 뭐냐. 해외에 망명한 우국지사들, 혁명투사들이 이런 운동을 전개하더라도

일제의 직접통치를 받는 일제 통치 영역 내에서 봉기하지 않으면은-.

- 네.

- 이건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 중요한 얘기네요.

- 중요한 포인트거든요. 그래서 그 일제의 식민통치를 직접 받는 영역 내에서 우리가 궐기해야, 그래야

해외혁명선배들이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해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뒷받침이 되면서 크게

성과를 거두지. 만일에 해외에서 혁명가들이 암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잠잠하면 으레 일제나

총독부에서 말이야. 코웃음 칠 거다. 봐라, 국내에선 말이야 다 자기네 총독정치에 만족을 해서 반항 안 한다.

이것은 불평론자들이 만영한 불평을 털어놓는 데 불과하다. 합리성을 인정받기 어렵더란 말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이것은 일제의 직접통치를 받는 영역 내에서 일어나자. 더군다나 동경 한복판에서 일어난다고 그러면

제국 일본의 수도 심장부 한복판에서 한 거니까 세계에 주는, 세계의 이목에 주는 영향이 클 거다.

단지 우리 자신이 일어나야 된다. 물론 이 당시엔 그랬습니다. 만일에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줄잡아서 내란죄, 반란죄로 몰린다 이거예요. 반란죄로 몰린다면 으레 생명은 각오해야 됩니다.

결사의 각오 없이는 궐기를 못한다, 마, 그러면서 역시 젊은 세대들, 지식인들이 일어나자. 그러면서 학우회 이름을,

지금까지 조직은 학우회밖에 없는데 학우회 가지고 일어나면 말이야. 학우회는 곧장 탄압당해서 해산당하고

다시 우리가 그런 집회를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학우회는 희생시키지 말고 별도로 비밀결사대를 만들자.

- 네.

- 그래서 만든 것이 조선청년독립단입니다.

- 네.

- 청년의 이름으로 독립을 전개하자, 난 이것이 대단히 의의 있는 명칭이라고-. 그래가지고 학우회 간부들이 청년독립단에

말하면 주요멤버들이 돼서 독립선언문은 전부 그 이름으로 하기로 하자, 그래가지고 인제 거, 경시청의 형사들이

미행하는 것을 갖다가 인제 떼면 설랍네 여러 차례 밀의를 하고 인제 운동 기회도 또 마련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서 인쇄 같은 걸 하는데 자금이라든지. 여러 가지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하나도 필요 없고

보통 그 당시 인쇄술도 만만치 않고, 그러면서 역시 우리가 동경 한복판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당시의 동경 유학생이 외치지 않더라도 국내는 또 국내대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 네.

- 대체로 국내 움직임은 두 갈래로 들어왔지.

- 네.

- 상해나 동경을 통해 들어온 것이 하나 있고, 어, 일면에는, 이것은 내가 이갑성 옹에게 직접 들은 얘깁니다만

그 당시 미국에 계시던 이승만 박사가 선교사를 통해서, 모 선교사를 통해서 구두로다가 국내의 기독교 사회에다가

신뢰를 했다.

- 예.

- 국내에서도 반드시 호응해줄 걸로- 그래서 그 당시 YMCA, 참 말하면 지도자로서 유명한 월남 이상재 선생 같은 분 있잖아요?

또 지방에서는 거... 남강 이승훈 선생 같은 분. 그래가지고 뭐뭐한 분들이 전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먼저 동경 유학생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의 초안까지 해가지고 국내에다가 겨울방학을 이용해가지고 대대적으로 밀파했어요.

- 네.

- 거 밀파한 분이 그 당시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어, 송계백입니다.

- 감사합니다.

(음악)

오늘은 동경 유학생들의 궐기에 대해서 이선근, 서기원. 두 분의 대담을 들으셨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사전 대책에 대한 얘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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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얘기의 샘. 신용 있는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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