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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의 샘
얘기의 샘 2 - 안중근 의사의 최후
얘기의 샘 2
안중근 의사의 최후
1968.11.00 방송
(음악)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 얘기의 샘.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에 관한 얘기를 사학자 이선근 박사와 소설가 서기원 씨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음악)

-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두의 의거 현장보다도 그 후에 일제에 체포돼가지고 여순 감옥에서 최후를 마치실 때까지-.

- 네.

- 그 의연한 태도와 애국충정, 또 철석같은 결의, 아, 그런 것이 또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근데 이등박문의, 그 당시에 그

내외...정치에 차지했던 비중을 봐가지고 얼마나 세계에 큰 충격을 줬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데요.

- 네네.

- 그 영향에 관해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 먼저, 그 안 의사가 쓰러트린 이등박문이요.

- 네.

- 그 존재라는 것은 가끔 말씀드렸습니다만 한때 이홍장이와 같이 동양의 쌍벽이라고 동양의 피스마크라고 그랬는데

이홍장이는 몰락과정을 밟는 청족에 태어났고 이등박문이는 말하면은 신화하는-.

- 네.

- 제국주의 일본에 태어나서 명치유신에 커다란 역할을 했죠. 그리고 일본의 소위, 그 명치헌법을 기조한 사람 아니에요?

- 네.

- 그리고 명치천왕의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인물. 그 배짱도 세고. 또 우리가 관상을 보더라두요.

일본 사람 가운데는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하고 이등박문이 그 생김생김이-.

- 네. 풍신이 좋습니다.

- 풍신이 그, 섬나라 일본사람하곤 다릅니다. 뭐, 그래서 서양 사람들도 그 당시 이등박문에 대한 평가를 갖다가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또 일본사람이 쓴 이등박문의 모습보담도 서양 사람들이 쓴, 요전 시간에 말씀한 글레드라든지 이런 인간들이

쓴 책들이 많이 소개돼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동양 말하면 제1의 거물이다. 그런 이등박문을 갖다가 쓰러트린

만큼 안 의사의 하얼빈역두의 총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를 진동시킨 거죠.

- 네.

- 그리고 요전 시간에 잠깐 빼놨습니다만. 그, 정미정변 난 이후로 안 의사가 서백리에서 독립군을 수십 명 모아가지고

그 독립군에 핵심 체류에서 독립군 약 300여 명을 갖다가 편성했어요.

- 네.

- 그래가지고 하얼빈역두에서 거사하기 전에 벌써 독립군을 가지고 인솔하고 설랍네 안 의사 자신이

함경북도 두만강을 갖다가 월강해설랍네 국내에 침입해 들어와서 세 차례 일본군하고 지독한 접전을 했다 그겁니다.

- 네.

- 그러면서 물러나갔다가 다시 인제 이등박문이가 하얼빈에 나타난다니깐 드루 우덕순 이하, 조도선 이런 사람들하고

아주 계획을 세워서 하얼빈 역에서는 자기가 지키고 그 앞에서는 우덕순 이하 다른 동지 세 사람한테

맡겼다가- .

- 네.

- 틀림없이 그대로 안 의사 자신이 자신의 소규의 목적을 달성한 거 아니에요? 그 다음에 일인들이 여순 감옥에다

가둬두고 10월 26일에 안 의사가 의거에 성공하신 다음에 체포돼가지고 다음 해, 1910년 3월 26일에 여순에서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 네.

- 약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지. 근데 이분에 역시 물론 조국을 위해서 이런 굉장한 참 세계를 증강시키는 큰일을 했고

옥중생활을 하는 만큼 추호도 개인 인간적으로도 말하면 남 곁에 섣부른 모습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전 시간에

말씀한 안 의사의 필적이 그 당시 인제 바깥으로 많이 새나오지 않았어요?

- 네.

- 여순 감옥에 일인들이 전부 간수 아닙니까. 일인 간수들이 안 의사의 인격에 관해서 전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몄다 그거지.

- 그, 저, 여순 감옥의 전옥.

- 네.

- 전옥이 수기를 남긴 게 있는데 기억이 납니다마는.

- 네네.

- 안 의사의 인격에 감동을 받은, 그런 구절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 네, 그리고 그네들이 감동을 했기 때문에 안 의사의 필적 하나를 갖다가 받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했거든요.

- 아하...

- 안 의사 필적이 전부 감옥에서 쓰신 거 아니에요?

- 네.

- 그것이 어떻게 바깥으로 새나갈 수가 있냐? 이것은 전부 일인들, 전옥, 간수들이 받아둔 거라 가능하죠.

- 네.

- 그리고 안 의사가 인제 여순 감옥에 계실 때에 그, 자기 동생, 사촌동생이지. 안공근이나 안명근.

- 네.

- 이런 이들이 인제 찾아와서 만날 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때마다 안 의사가 주로 안정근, 자기 아운데

두 아우, 안정근, 안공근. 이분들한테 항상 얘기하던 것이,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유골은 하얼빈공원에다가, 하얼빈공원 근처에다가 가매장을 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된 뒤에

본토로 이장해다오.

- 네...

- 난 이 문구를 들을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아직도 안 의사의 유골을 갖다 옮기지 못하지 않았어요?

- 네.

- 헤이그에서 분사하신 이준 선생님 유골은 몇 년 전에 이장을 했습니다만 안 의사 유골은 아직도 이장을 못했죠.

이런 말씀을 하면서 내가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조국주권의 회복을 위해서 진력할 테니 너희 동생들도

나를 위해서 동포에게 고하되, 각기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해서 동심협력해서

대한독립의 성공을 바란다. 대한독립의 성공의 소리가 천국에 들릴 경우, 내가, 내 또한 천국에서도

춤을 출 거다.

- 네.

- 내 뜻을 바쳐서 끝끝내 싸우라고 하는, 이런 부탁을 자기 친동생, 혹은 사촌동생한테 유언처럼 항상 얘기했다.

추호도 그 죽음에 대해서 미련을 남기거나 그런 것이 없이 대범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그러면서 문자 그대로

대한남아로서의, 건강한 대한남아로서의 위신에 대해서 전 남아들이 우러러 볼 수 있으면 그만한 태도를 취하고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숨졌다.

- 일부는 잊었습니다마는 일본의 상당한 거물 변호사 한 사람이 안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서

여순으로 가서 공판정에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 네네, 네네.

- 고 당시에 고 변호한 기록은 지금 맞습니다.

- 네.

- 어느 모로 보나.

- 변호사도 말이죠. 꽤 감동을 했던 모양이에요.

- 네네.

- 안 의사의 태도에 대해서 말이죠.

- 안 의사가 말하면 사형당할 때 연세가 서른두 살입니다.

- 네.

- 한참 말하면 장년기에 들어 설랍네 활약할 그런 시기니까. 그러면서 그만큼, 그, 참,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니까 역시 일본사람들도 공정한 기록이 있잖아요. 그거 보면은 선생님 말씀대로 어... 참, 안 의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망발 같은 거 하지 못하죠. 요 전부터 말씀 드린 거, 최근에 나온 어, 그, 괴상한

설을 퍼트린 사람도 있습니다.

- 네.

- 마, 이런 것은 내가 볼 때는 무로도라고 하는 그 당시 일본이 나중 가서, 소위 대동아전쟁 터지고 나서

1936,7년대에 괴상한 설을 퍼트렸어요. 안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것은 한국에서 손을 썼다.

- 네.

- 합병 같은 거 외려 재촉한 역효과가 났다. 인제 그렇게 얘기합니다마는.

- 혹시 미국이나 구라파 쪽에서의 반향 같은 게 뭐 기록에 남아 있는 게 있습니까?

- 고것은 인제 역시 그, 이 당시 이등박문의 존재가 크지 않았어요?

- 네.

- 그렇니까 영미 계통에서는 말하면 요걸로 안 의사에 대한 얘기를 갖다가 함부로 못 썼지. 그러나 그 뒤에 나온

기록 같은 거 말하면 가령 맥킨리라든지.

- 네.

- 혹은 헐버트라든지 이런 사람이 쓴 데 보면은 역시 안 의사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면서 어... 좋게 쓴 것이 사실입니다.

- 또 좋지 않게 쓸 수가 없겠죠.

- 네. 나중에 그, 윤봉길, 이봉창. 그런 의사들의 일련의 의거와 이, 전통적으로 혈맥이 말이죠.

- 네.

- 이어있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도 안 의사의 의거는 참 선구적인 의거였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겠군요.

- 안 의사는 내가 볼 땐 그렇습니다. 역시 우리민족의 위대한 전통의 저항정신, 가령 인제 그 신라나 고구려 때

선랑회나 화랑도의 정신 있잖아요?

- 네.

-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서는 그 개인의 목숨을 갖다가 초야같이 버린다. 대의 앞에 죽음을 내놓는 것을 갖다가

홍무에 비긴다. 그런 정신이 맥맥이 흘러서 왕조 500년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구한말에 와서 안 의사한테 와서

아주 굵은, 큰 산맥으로 드러났다.

- 네.

- 그랬다 그것이 다시 아까 서 선생 말씀한 대로 기미독립운동 터지면서 광주사건이라든지, 그 다음에 에,

윤봉길, 이봉창, 이런 굉장한, 참, 세계를 갖다가 다시 잡아놓은 의사들의 혈맥으로 됐다. 나중에 그렇게 보는 거죠.

- 네.

- 그런 만큼 그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혈맥이 보통 평화시기에는 말이에요. 못났고 바보 같으나 일단 결심하고

덤벼들면은 전 세계를 놀랄만한 의거도 감행할 수 있다, 난 그렇게 봅니다.

- 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을 비롯해가지고 한국민족은 퍽 용기가 없는 민족이다-.

- 네.

- 겁이 많은 민족이다, 이런 누명을 씌우고 한 모양입니다만. 안중근 의사의 의거 하나로서 그런 오명을 씻고

말이죠.

- 네.

- 세계에서 한국민족을 재인식시킨 그런 효과도, 그런 공적도 아울러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 안 의사로 참 말하면 한 번 쏜 총 한 방에, 내가 볼 때는 그 당시 말하면 중국에서도

몇 개 사단 병력 이상의 효과를 냈다 이거죠.

- 네.

- 어, 나중 가서 윤봉길 의사의 에, 홍구공원 사건에 대해서도 어, 중국사람 자신들이 백만 병력 이상의

효과를 냈다고 얘기하고들 있으니까 말씀이죠.

- 네, 감사합니다.

- 예.

(음악)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에 대해서 이선근, 서기원 두 분의 대담을 들으셨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이완용 저격사건에 관한 얘기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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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의 샘. 버들표 유한양행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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