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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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마흔 번째.
오늘은 박열의 투쟁, 첫 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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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 불령사 박열 사건. 어제 보도관제 해제. 』
1925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박열.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던 한국인 박열은
1925년도부터 일본과 한국을 통틀어 가장 큰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이른바 박열 사건. 1923년 8월에 체포되어 예심을 마치는 데 2년이 걸리고 1925년 11월에야 신문에
그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의 신문을 읽으면서 박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대정12년 4월경에 일본 동경부 비밀처소에서 대중에 반역을 표방하고 과격한 무정부주의의 선전과
폭력적 직접 행동을 목적한 불령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실행에 착수하였었는데 조선 사람
경남 양산군 출생의 박열(일명 박준식) 이하 11명의 조선 사람과 다섯 명의 일본 사람으로 구성된
한 단체는 그만 비밀이 탄로되어 마침내 그해 8월 1일에 동경 경시청에 체포되어 그간의 전후전말은
당국으로부터 신문의 게재를 엄금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었는데 동경지방재판소
이시다 검사 주임 하에 시라다, 구로카와, 가쓰키, 세 검사가 엄밀한 취조를 마친 결과, 치안경찰법
위반죄로 마침내 기소가 되야 그간 다치마쓰 예심판사에게 엄중히 취조당한 바 또다시 불경죄에
해당하는 사실이 발각되었으나 근근히 예심을 종결하고 공판에 붙게 되었다.』
기사에도 나타나듯 박열은 무정부주의잡니다. 무정부주의자. 고대 희랍에 시노페, 디오게네스부터
그 사상적 여론을 찾을 수 있는 이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은 정치적 사회적인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일본에 수입되어 일찍이 고도쿠, 오스기 등의 무정부주의자를
낳았던 것입니다. 박열은 오스기의 계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요 최후의 무정부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의 압제 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박열의 무정부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부정이며 거기에 대한 투쟁을 당면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면 박열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 『박열은 경부선 김천역에서 약 이백 리가량 되는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한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다섯 살 되던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고향에는 육십여 세의 늙은 어머니와
이미 결혼한 누이, 그리고 동생 한 명과 함께 농업을 경영하던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일찍이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땐 살림이 넉넉하였으나 죽은 후론 파산 지경에 이르렀는데
박열은 8,9세의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 때로부터 조선 고유의 유교적 권위의식에 많은 의심을 품고
그는 배워야 된다는 결심으로 함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함으로 차츰 개성은 발달되어-.』
당시 신문은 이하 그의 약력을 삭제 당했습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즉, 국민학교를 졸업한 박열은
열다섯 살 때 상경해서 경성 제2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니다가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1919년 열여덟 살 때 그는 일본 동경에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무정부주의운동에 휩쓸린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구조와 천황제도에 반대해서 이를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했습니다.
1923년에는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를 죽이려고 폭탄을 제조, 음모하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것입니다.
박열에 대해 얘기를 잠시 중단하고 1920년대 소위 무정부주의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를 철학자 신일철 씨에게서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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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단순히 무정부주의자로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가 체포됐지만 그가 그토록 화제의 인물이
됐던 이유는 다른 점들에 있습니다. 언론인 유광렬 씨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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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 냉혹한 사건 뒤에 자리 잡은 로맨스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가네코 후미코. 스물한 살 난 일본 여인입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하마마Tm시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기구하게 보낸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방탕해서 집을 뛰쳐나갔고
어머니는 재혼을 했습니다.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했습니다. 어린 후미코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갖은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아홉 살 때 한국에 나왔었습니다. 충청북도 부강에 있는 고모집에 와서
국민학교를 마쳤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귀국. 어려서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란 사람이 원래 이상했습니다. 후미코를 강제로 시집보냈습니다. 상대는 후미코의 이종사촌오빠가 되는 남자.
그 남자는 불교의 중이었는데 재산이 많은 것을 보고 후미코의 아버지가 딸을 주었던 것입니다.
열여섯 살 때 당한 강제결혼이었습니다. 후미코는 결국 그 남자와 헤어지고 동경으로 왔습니다.
동경에서 후미코는 이를 악물고 갖은 노동을 다 해가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정축영어학교에
다니면서 고학을 한 것입니다. 박열이 후미코를 알게 된 것은 1922년.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낸
두 남녀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이념까지 맞아서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둘은 사랑하는 애인이요
동지였습니다. 1923년, 천황암살사건도 같이 저지르려했고 똑같이 체포됐습니다. 사형 언도가
내릴 만한 중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둘은 옥중결혼을 선언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난 신랑과
스물한 살 난 신부. 그러나 중대범인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이 청춘남녀의 사랑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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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떳떳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옥중에서도 여유 만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감옥에서 1926년 새해를 맞으면서는 시까지 지어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공판을 앞두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재판정에 요구조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 일. 공판정에서는 일체 죄인의 대우를 말고 또 나더러 피고라고 부르지 말 것.
일. 공판정에서는 조선예복차림을 허가할 것.
일. 내 좌석은 재판장과 꼭 같은 것으로 설치할 것.
일. 공판하기 전에 나의 선언문 낭독을 허가할 것.
이상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는 함구하고 일체 신문에 불응하기로 결심함.
대단한 배짱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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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판일.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1926년 2월 26일에 열렸습니다.
동경 대심원 대법정. 법원 주변엔 삼엄한 경비망이 펴졌고 방청할려는 인파가 모여들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가 묘사한 당시의 풍경을 읽어봅시다.
- 『오전 8시 40분이 됨에 박열과 금자문자는 형무소로부터 수인자동차를 타고 대심원 구내에 있는
지하실 가 감옥에서 잠깐 쉰 후, 조선예복을 입고 경관에 끌려 빈틈없이 서 있는 방청객 사일 지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분주하던 대심원 뜰 앞이 일시에 고요하게 되며
형형색색의 감상으로 최후의 공판정에서는 박열부부의 모양을 주목하는 가운데도
피고 두 사람은 태연자약하게 방약무인의 태도로 대법정으로 들어갔다. 9시 10분. 재판정은
공판개시를 선언하고 피고에게 신문하기 시작하였다.
- 피고의 이름이 무엇인가.
- 나는 박열이다!
- 그것은 조선말인가.
- 그렇다.
- 박열이라는 이름과 박준식이라는 이름 중에서 어느 것이 본명인가.
- 둘 다 나의 본명이다.
박열은 일본 재판정에서 떳떳하게 한국어로 대답한 것입니다. 옷도 한복으로 입고 꼭 반말로 대답했습니다.
- 나이는 몇인가?
- 모른다.
- 이 기록에는 명치 35년 2월 3일이 피고의 생일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런가?
- 혹 그런지도 모르지.
- 직업은?
- 그 기록엔 뭐라고 있는가?!
- 잡지업이라고 있는데 그런가?
- 그렇다.
- 주소는?
- 시곡 부구전 12번지.
- 그건 시곡형무소 주소가 아닌가? 그 전 주소는 어딘가?
- 그 기록에 있는 대로다.
- 부아대대 반정 부고 147번지인가?
- 그렇다.
- 본적은?
- 조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이다.
- 『이렇게 박열은 어디까지든지 반항적 태도로 재판정의 심문에 대하야 답변하였다.
다음에 금자문자의 심문에 들어가 -
- 성명이 무엇인가?
- 금자문이요.
라고 하얀 조선옷에 금테안경을 쓴 금자문자는 똑똑한 음성으로 미리부터 지어두었던 조선이름으로
‘금자문’이라고 대답하였다.
- 나이는?
- 스물 둘이요.
- 직업은?
- 인삼행상이요.
이렇게 인정심문을 마친 뒤, 재판장은-
- 아, 본 건의 심문은 안녕질서를 해롭게 한다고 인정되므로 공개를 금지한다.
이리하야 개정된 지 겨우 10분 만에 방청객을 몰아내메, 모처럼 애써서 겨우 들어갔던
여러 방청객들은 면면히 섭섭한 기색을 나타내면서 퇴장하였는데 그 중엔 조선 사람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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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공판이 있는 그 해 3월 25일에는 동아일보가 발행정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을 때 박열부부는 태연하게 미소까지 지었습니다.
그리고 3월 25일, 사형 언도가 내리자 가네코 후미코는 법정에서 만세까지 불렀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사형 언도. 그러나 그 해 4월에는 의외로 감형이 됐습니다. 무기징역이 된 것입니다.
정치학자 홍순옥 씨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무정부주의자 박열. 이십 대의 청년으로 떳떳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일제에 항거했던 박열 사건은
일단 무기징역 확정으로 끝을 맺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1926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는 놀랄 만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 『대역범 박열의 애인 금자문자, 옥중에서 자살.』
(음악)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그것은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살에는
복잡한 내막이 있었습니다. 일본 정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또다시 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유광렬, 신일철, 홍순옥. 기사 낭독 안종국.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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