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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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아홉 번째.
오늘은 월간지 개벽의 수난 편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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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계 일대 참극, 개벽의 발행금지. 한 달 걸러 압수당하던 개벽 잡지. 이제로부터 영원히 발행을 못해.』
1926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기미년 9월 2일에 이돈화 씨, 이두성 씨 외에 여러 유지가
발기하야 그 이듬해인 경신년 5월 20일에 발행 허가를 얻어가지고 동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행한
월간 잡지 개벽은 세상에 나타난 지 7년 동안에 갖은 고통과 각색, 파란 중에서 꾸준히 자라오던 바,
재작 8월 1일, 총독부 경무 당국으로부터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돌연히 그 발행을
금지하였으므로 동지는 최근에 발행되어 압수를 당한 8월호 제72호를 최후로 발행할 자유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더라.』
1920년에 발행을 시작한 종합잡지 ‘개벽’.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에 의해 발행이 허락되었던
잡지 개벽은 7년 만에 강제로 발행 정지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같은 해에 창간된 동아일보도 그렇고
조선일보도 그랬습니다. 일제의 언론탄압이란 말할 수 없이 잔인했습니다. 일단 발행을 허가해놓고는
총독부 당국은 눈을 부릅뜨고 감시를 했습니다. 1920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를 보십시다.
- 『개벽 창간호 압수. 발행 당일에 즉시 압수. 총독정치 이래로 조선에 처음으로 신문지 조례에 의한
잡지 ‘개벽’은 예전과 같이 작 25일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는데 경무당국의 규의에 거치는 문구가
있어서 압수를 당하였는데 개벽사에선 창간호 중에 저촉된 부분만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한다더라.』
개벽은 창간호부터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간호 표지는 개벽 호외라고 찍혀 있습니다.
사실의 보도가 대부분인 신문에 비해서 비판적인 논문을 주로 실어야 하는 종합잡지의 수난은 가히 추측할 만합니다.
개벽은 당시 세력이 컸던 천도계 측에서 발행했습니다. 이번에 신문화 자료를 공급하는 의미에서
천도교회 측은 옛날에 발행되었던 개벽 전부를 영인본으로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책임자 이광순 씨가
개벽 발간 때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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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호외라는 표지를 붙인 창간호는 1920년 6월 25일자로 나왔습니다.
158페이지의 규모로 나온 창간호의 권두언을 우선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간 시기는 아직 3.1운동의 여파가 가시기 전입니다.
- 『아, 후문. 아, 벽력. 모래가 날리며 돌이 닿도다. 나무가 부러지며 풀이 쓰러지도다.
아, 검은 천지로다. 수라장이로다. 아니 이것이 혼돈이 아닌가.
아, 총검. 머리가 떨어지며 다리가 끊어지도다. 이놈도 꼬꾸라지고 저놈도 자빠지고도다.
생을 위함이냐. 사를 위함이냐. 새 바람이 일도다. 흰 빛이 비치도다. 온 세제는
찬란한 빛의 세계로다. 평화의 소리가 높도다. 개조를 부르짖도다.
온 인류는 신선한 자유의 인류로다. 운이 래함이냐 시가 도함이냐. 아니, 이것이 개벽이로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중이 피 흘리는 것을 통곡했고, 그러나 눈을 떠 세계를 바라보면
자유와 평화의 소리가 들린다고 권두언은 외치고 있습니다. 개벽, 즉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주장하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창간사를 읽어봅시다.
- 『소리 있어 널리 세계에 전하니 온 세계 모든 인류 이에 응하여 부르짖기를 시작하도다.
강자도 부르짖고 약자도 부르짖으며 뛰어난 자도 부르짖으며 열등한 자도 부르짖도다.
동서남북 사해팔방이 다 같이 이 소리 중에 묻혀 있도다. 병력이냐 지진이냐 우리는 아직
이 소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도다. 좌우간 다수가 목말라 외치고 다수가 요구하는
인민의 소리임을 명백하도다.』
창간사에서도 우리 민중의 외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짓눌리고 원통하게 탄압받는
우리 민중의 대변자가 되고자하는 창간의 의도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알라는 논문이 제일 첫 번에 실려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처지에서 고질화 있는 옛날의 인습을 타파하고 발전해가는 세계 대세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회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나 종합잡지를 표방한 만큼
과학기사도 있고 문예란도 있습니다. 1930년대 개벽이 다시 발간된 이른바 ‘후기 개벽’ 시절에
편집인으로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는 개벽이 문학사에 기여한 공로를 중심해서 얘기합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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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통치하에서의 언론기관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간호부터
압수를 당해야 했던 개벽 잡지의 역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72호를 내는 동안에 발행금지를
당한 것이 33횝니다. 발간 호수의 반 이상을 발행금지 당하는 수난이었습니다. 1925년 8월에는
일시발행정지처분을 받았었습니다. 밖에 있는 일화에서 당시에 해외에 망명해 있던 우리나라 인물들을
소개하는 특집을 했었습니다. 이동휘, 서재필, 이승만, 박은식, 신채호 등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대해서
해외에 망명해서 그때까지도 항일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인물들을 소개하는 이 특집기사를
일본 통치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 『개벽지의 발행정지. 꽃피자 찬 서리. 개벽의 비운.』
그해, 8월 3일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 『언론이란 이름만 남은 조선 안에서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신문 잡지는 경제적 경영 곤란보다
더 헤아릴 수 없는 당국자의 뜻을 맞추기 어려워서 소위 발매금지라는 액운을 한 달치고도
몇 번씩을 당하게 되어 언론을 생명으로 삼는 직접 당국자는 물론 이로서 양식을 삼는
조선의 민중은 항상 말 못할 고통과 보람 없는 탄식으로 그날그날 넘기는 형편인데
언론 취체에 대한 방침을 끝까지 고집하는 총독 당국은 삼시 국장이 취임한 이래로
더욱 그 태도와 방침이 여지가 없어 그동안 각종 신문 잡지에 발매금지가 거의 날마다 계속하다시피
하던 바, 작 1일 8월호로 발행한 개벽지 상에 당국의 규의에 저촉되는 기사가 실리자
즉시 발매금지를 당한 동시에 1일 오후 2시경에 총독부 당국에선 경기도 경찰부를 거치어
개벽에 대하야 발행정지의 지령을 단연히 교부하야 오개 성상의 역사를 가지고 조선 문화 향상에
많은 공로를 끼친 개벽은 일시에 서리를 맞게 되었더라. 이에 대하여 기자는 편집인 이돈화 씨를
삼청동 자택으로 방문한 즉, 씨는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 난 마침 어디를 갔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을 들었습니다.
개벽이 창간된 지 5년이나 됐으므로 빈약하나마 경제적 기초가 겨우 잡히게 됐다고 할 만한
오늘날에 이 지경이 됐으니까 지금부터 두 달이나 석 달 뒤에 다시 간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제상으로 봐서 새로 착수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 『한편, 개벽 잡지를 정간함에 대하야 경무국 고등경찰과 모 당국자는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 개벽의 압수는 이번 기사뿐 아니라 제재기사와 그 태도를 보아 당연히 처치하는 것인데
벌써 전부터 주의를 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계속적으로 압수를 당하니
에, 역사적으로 보아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어, 이렇게 정간을 시킨 것입니다.
아, 요전에도 경무국장으로부터 언론기관 대표자에게 일일이 경고한 바가 있었는데
이번 개벽의 발행정지 사건이 그 정책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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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히 석 달 뒤인 10월 5일에 발행금지령은 해제됐습니다. 그러나 탄압은 계속됐습니다.
압수를 당하고 호외를 내면 그 호외까지 압수당해서 또 호외를 내는, 이런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월간잡지가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계속하고 1926년 8월 1일,
이번에는 발행정지처분이 아니라 발행금지처분을 받은 것입니다.
- 『발행금지란 최후의 처분을 당한 개벽 잡지에 대하야 곤도 도서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
- 현재 조선에는 신문지법에 의지하야 발행권을 얻은 언문 잡지는 신민, 시사평론, 조선지광, 개벽 등
넷인데 개벽은 대정 9년 5월 2일부로서 발행권을 얻어가지고 창간호를 발행한 이래 72호가 나왔으며
천도교 기관 잡지로서 처음에는 학술, 종교에 관한 기사를 게재함으로서 목적을 삼는다하야
보증금도 바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초부터 정치, 시사문제 등 제한 외에 관한 기사를 써서
차압이 빈번하였소. 그 다음에 대정 11년에 이르러 정치, 경제, 일반에 대한 기사 게재를
허락하였으나 논조는 의연 불온하야 당국으로부터 경고와 서류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오.
이리하여 72회 발행 중 32회가 압수를 당하였고 금 8월호에는 과격한 혁명사상 선전에
관한 기사를 만지하였으므로 경무국장, 정무총감, 총복부가 상의하여 당연히 처치를 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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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우리 민중의 대변자가 되고자 몸부림쳤던 하나의 종합잡지, 개벽은 일제의
탄압에 짓눌려 압사하고 만 것입니다. 1920년 6월 25일에 창간돼서 26년 8월 1일까지
만 6년 2개월 통권 72호로서 발행금지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와서
총독부 출판법이 공포돼서 다시 개벽이란 이름의 잡지가 속간된 일이 있습니다.
1934년 11월호부터 속간됐으나 겨우 4호를 내고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해방 뒤인 1946년에
다시 개벽은 속간됐으나 아홉 권을 띄엄띄엄 내고 휴간됐습니다. 개벽 시대라고까지
자부하는 개벽의 본격적인 활동기는 역시 1920년부터 26년까지의 만 6년간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부수인 7000부를 발행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잡지였습니다. 일제통치자들의 갖가지 압력 속에서 버틸려 버틸려 노력하다가 결국은
발행금지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철학교수 신일철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 새바람이 일도다. 흰 빛이 비추도다. 온 세계는 찬란한 빛의 세계로다.
평화의 소리가 높도다. 계도를 부르짖도다. 온 인류는 신선한 자유의 인류로다.
운이 래함이냐, 시가 도함이냐. 아니, 이곳이 개벽이로다.
(음악)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20년에 기세도 드높이 창간되어 만 6년간 민중의 울분을 심었던 잡지 개벽.
기업적인 안정을 위해서 정권에 타협하지도 않았고 저속한 오락기사에 몰두하지도 않았던 잡집니다.
그래도 잡지 개벽은 민중의 환영을 받아 72호를 발행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발행했습니다. 그 꿋꿋한 기상이 언론계의 전통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 민중은 복될 수 있습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백철, 이광순, 신일철. 기사낭독 안종국.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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