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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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여덟 번째.
오늘은 사의 찬미로 알려진 윤심덕 편을 보내 드립니다.
(음악)
-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남녀의 정사.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1926년 8월 5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톱은 어느 젊은 남녀의 정사사건입니다.
김우진과 윤심덕.
-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얐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승객 명부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음악)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는 이 노래, 사의 찬미. 즉 죽음의 찬미. 그 낭만적인 정사사건과 함께
유명한 이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
(음악)
- 『윤심덕은 본래 평양생 장으로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또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다시 경성여자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치고 강원도 어느 곳 보통학교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그 후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음악학교를 수업한 후
1년 동안 더 성악에 관한 연구를 하여 가지고 5년 전에 귀국하야 자기 집안들이 모다
서울로 올라온 것인데 윤 양은 그 당시 악단의 명성으로 조선의 악계를 풍미하다가
일시 세상에 염문을 전한 후로는 악단에 자취를 감추고 작년 겨울에 극단으로
방향을 전환하야 토월회 여배우로 있었다. 또한 김우진 씨는 목포에서 백만장자의
맏아들로 연전 동경 조도전대학 문학과 본과를 마치고 연극에 관한 연구와 조예가 깊은 청년으로
수년 전 일본에서 역시 정사를 한 아리지마 씨를 몹시 숭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자기
집에 너무 돈이 많아서 오히려 그 호화로운 생활을 오히려 끝없는 고통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고통을 참지 못하야 지난 얼마 전에 무단히 집을 하직하고 나와선 경성에 잠깐 들렸다가
그 달 9일에 동경을 건너가 있던 것이라 한다.』
신문은 이 청춘남녀의 정사사건을 연속 보도하고 있습니다. 매우 낭만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그 사랑의 내력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두 남녀와 가까이 지냈던 극작가 이서구 씨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음성 녹음)
(음악)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이라든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든가 하는 얘기는 오늘날까지
유행가 구절에 살아남아 있고 감상적인 청춘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언뜻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랑 같습니다.
윤심덕은 서른 살까지 홀몸으로 있었지마는 김우진에게는 고향 목포에 처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사하기 7,8년 전부터 맺어졌다고 합니다.
둘이 모두 동경유학시절, 김우진이 와세다대학생, 그리고 윤심덕은 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사랑의 싹이 텄다고 합니다. 사랑의 싹. 사회적으로는 조혼의 풍습이 남아 있었고
일부 지식청년들은 자유연애에 심취했던 시대입니다. 특히 동경유학생들은 자유연애의
기수들이었습니다. 어려서 결혼한 본처는 고향에 두고 신여성을 찾아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구식 결혼한 본처는 소위 자기의 이상에 맞지 않으므로 이상에 맞는 신여성과 사랑을 속삭여야
지식인처럼 보이던 시댑니다. 고 김동인 씨의 김연실전이라는 소설이 당시 동경유학생들의
사랑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김연실이라는 주인공도 윤심덕이처럼 음악학교를 다니던 여성입니다.
김연실은 동경유학생답게 사랑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을 안 하는 동경유학생이란
못난 여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김연실은 어느 날 이창수라는 농과대학생과 단둘이
교외로 데이트를 했습니다.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바라보니 빨갛게 붉은 듯 낙조가
무성한 잡초 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열이 솟구치는 두 남녀.
- 선생님.
- 네.
- 참 아름답죠? 저 낙조 말이에요. 저 낙조가 형용하자면 뭐 같을까요?
- 글쎄올시다.
- 아이, 방금 떨어질 듯, 도로 솟을 듯, 영혼의 불이 하늘에서 춤추는 것 같잖아요.
- 아, 글쎄올시다.
김연실은 자기를 완전히 명작소설의 주인공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 창수의 하숙방에서
밤새워 사랑을 속삭입니다. 이튿날 아침.
- 사실은 고향에 어려서 결혼한 아내가 있습니다. 연실 씨.
- 아이, 창수 씨.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요. 우리 둘의 사랑만 굳으면 그만이지 사랑 없는
본댁이 있으면 어때요?
이렇게 김연실은 소설의 주인공이요 자유연애의 선봉장이라고 환희에 젖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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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연실전을 인용한 것은 당시 동경유학생 내지 신식청춘남녀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윤심덕의 사랑을 단순한 비련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를 이런 장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흐흑...
- 하아... 심덕 씨.
- 우진 씨... 사랑합니다. 영원히... 아...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이 세상에서 못 이룬 사랑,
우진 씨, 저 세상에선 우리... 우리 꼭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음악)
이룰래야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랑. 사회적 인습에 짓눌린 애련한 청춘남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을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우선 두 사람의 나이가 30을 넘고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요즘도 30살이면
연애 같은 것은 초월할 나입니다. 더구나 당시 여자 30이면 중년여인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순진무구한 소년, 소녀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해타산에서 오는 세속적인 관계일까요? 물론 사랑을 위장할 추잡한 관계는 아닙니다.
두 남녀는 사랑한 것이 틀림은 없습니다. 김우진이 동경에서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 『난 아무리 야위어도 굳게 먹은 나의 결심을 변할 순 없다. 지금에 와서 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정에
돌아오길 기다리며 내가 가정에 의지하여 전과 같은 그러한 생활을 바라는 듯하지만
도저히 또다시 그런 비인간적인 생활로 또다시 굴러 들어갈 수는 없다. 난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래도 이대로 굴하지 않고 한 개의 사람으로서 본래의 인간성에 기인한 참생활을 하여 보겠다. 』
김우진은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인간적인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이란 물론 목포에 있는 본가. 그의 부친은 일찍이 장성군수를 지냈고 목포의 감리를 지낸
세력가로 당시에는 목포의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김우진은 부친과 극도로 대립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구시대 인물인 부친과 신식교육을 받은 아들의 대립은 흔한 일입니다.
더구나 김우진은 부모가 일찍이 시켜줘서 결혼한 아내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우진은 집을 나와 떠돌면서 희곡을 공부하던 청년. 문학서적의 탐독에서 온 것일까.
허무주의적인 사상에 극도로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 윤심덕은 어땠는가. 이서구 씨의 증언도 있지마는
윤심덕 씨는 쾌활한 성격이었습니다. 남성처럼 탁 틘 인물이었고 낙천적이었습니다.
그런 성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여인은 인생이 평탄하지가 못했습니다.
서른 살까지 독신으로 지내야 했던 사실부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심덕은
독신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자관계가 많았습니다. 김우진과 열렬하던 때에
윤심덕에게는 다른 애인도 있었습니다. 평양의 부잣집 아들인 이용문 씨에게도
처자가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여러 곳에서 혼담도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인지 서른 살까지 결혼을 못했습니다. 요새도 서른 살이라면 노처녀.
1926년도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윤심덕은 비관적인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윤심덕이 정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동아일보 기자가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언니 되는 여자는
- 정사요? 아,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애 성격이 남자같이 아주 활발하지 않습니까?
집에 있을 때도 내가 혹시 근심하는 빛이 있으면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왜 그렇게 침울한 생활을
하느냐고 항상 말하던 앤데요. 자살할 리가 없습니다.
(음악)
윤심덕의 성격이 도저히 자살할 것 같지 않다고 주변에서 생각했지마는 하여튼 자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애인과 같이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 위에서 투신정사를 한 것입니다.
정사할 즈음의 모습을 이서구 씨에게서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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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은 가정생활에 불만이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허무주의에 심취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평소에 아리지마를 숭배했다는 것을 봐도 김우진은 자살, 특히 정사를
꿈꾼 게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윤심덕, 평소의 성격으로 봐서 정사랑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토월회에서 윤심덕의 상대역을 하던 이백수 씨가 나중에 회고한 일이 있습니다.
- 아, 지나가는 말같이 이런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 ‘아,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악마 같애요. 난 언제든지 한 남자를 죽일 테예요.
그 죽이는 남자는? 으흥, 아주 천진스럽고 죄 없는 남잘 거예요.’
- 이러는 겁니다. 예술가란 이런 식으로 속세인간과는 별달라 하나 의심한 적 있습니다.
(음악)
이 정사사건을 연재로 다룬 동아일보 기자는 그 맨 마지막에 이런 결론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 『그와 같은 윤 양이 정사를 했다는 데 대하야 아직도 세상에는 그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윤 양을 잘 아는 여러 사람의 관찰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윤 양은 결코 정사까지 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우진 군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자기의 할려는 바, 장래 사업과
희망에 대하야 자기의 두 주먹과 의지보다도 자기의 집 금력을 더욱 믿었다가 절망하고
답답한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는데 윤심덕은 김우진의 이 처지를 동정하야
어디까지든지 그를 구해줄려고 무한 애를 썼다. 그리하야 연락선 위에서 투신하기 직전까지도
윤 양은 김 군을 달래고 그 마음을 돌리도록 있는 정성을 다하여 보았을 것이다.
김 군의 결심이 의외로 강경하야 단 둘이 배에 올랐다가 그의 애인이 죽음의 나라로 가는데
자기도 그와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알고 같이 정사를 한 것인 듯하다.
(음악)
하여튼 1926년 여름에 윤심덕, 김우진 두 남녀의 정사사건은 장안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취입한 윤심덕의 이 노래,
사의 찬미는 그 정사사건과 관계되어 청춘남녀의 심금을 울려 주었습니다.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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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은 6.10만세사건이 일어난 햅니다. 이 정사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서울 거리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투옥돼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떤 젊은이들은
피 흘리며 만세를 불렀고, 어느 젊은이는 현해탄 연락선 위에서 죽음을 찬미하면서 달콤한 정사를 했습니다.
사의 찬미, 죽음의 찬미. 이 가사는 한국말이되 곡은 서양의 곡입니다. 사랑이니 자유연애니 하는
서양사조가 들어와 자유연애를 하던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은 가사만 따로 써서 부른 노래처럼 어설픈 모방에
허무주의를 행동화했던 것입니다. 윤심덕, 김우진 두 남녀의 정사사건은 이념 없는 당시 젊은이들의
사치감정을 표시해주었습니다. 죽음의 찬미, 이 서글프고 우울한 노래는 어느덧 전통화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퇴폐적인 유행가가 판을 치는 풍토를 이룩해놓은 것입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이서구, 신일철. 기사낭독 안종국.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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