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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숙명학교 맹휴
제1부: 근세의 표정
숙명학교 맹휴
1969.06.29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일곱 번째.

오늘은 숙명학교의 맹휴 편을 보내 드립니다.

(음악)

- 『숙명여교생, 단연히 맹휴, 6개 조항의 요구조건.』

1927년 5월 27일 동아일보.

- 『재작 25일 시내 수송동 숙명여학교 생도 400명은 학교당국자에 대하야 나까지마 사감 면직,

사이토 교무주임 사퇴, 생도 대우 개선, 조선재봉선생 개인, 조선인선생 채용 증가, 인격 선생 대우 개선 등

요구안을 제출하고 26일에 이르러선 일제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는데 원인은 전기 요구조건과 같이

일본사람을 배척한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는 바, 숙명학교는 본래 조선사람의 경영이었으나

교원을 채용하는 것이나 기타 모든 것에 대하야 일본인이 전부를 좌우하는 까닭에

기숙사사감까지 일본 여자를 두어 조선가정의 풍속도 잘 모르는데다가 순 일본식으로만 지키려 하고

조선재봉도 일본인 교원이 가르치게 되므로 일반 생도들에겐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며

전 교원 20명 중에 조선사람은 겨우 5명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대접도 하지 않는 것 등에

분개하야 그와 같이 동맹휴학을 한 것이라는데 일반생도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당국의 책임 있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더라. 』

숙명여학교 학생들의 맹휴. 1927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은

동맹휴학이라는 것으로 일본의 식민정책에 저항한 일이 많습니다. 동맹휴학 단계를 넘어서

본격적인 투쟁으로까지 발전한 예를 우리는 광주학생사건에서 보게 되지만 광주학생사건 이전에,

더군다나 여학생이 이토록 조직적인 스트라이크를 전개한 것은 이 사건이 최초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도라면 아직 이 나라에 여권 확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적입니다. 교육열은 팽창해서

몇몇 여학교들이 있었지마는 그들이 이토록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명여학교 400여 명은 일치단결해서

학교당국에 여섯 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당당히 투쟁에 돌입한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보도가치가 대단했으므로 동아일보는 계속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학교당국뿐만 아니라 총독부 측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기도 학무과장 다카하시는 신문기자회견에서-.

- 현재 조사 중이므로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에... 일설에 의하면

학교당국자들 사이에 분규가 있다고도 하나, 이 역시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어떤 조치도

취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본인 경기도 학무과장은 동맹휴학의 원인을 교직원들 사이의 분규라는 듯이 일단 발표했습니다.

초점을 흐리는 작전임에 틀림없습니다. 학생들의 요구조건에도 명시됐듯이, 이 스트라이크의

초점은 일본인 교사 배척이었습니다. 일찍이 한국 황실의 내탕금으로 설립된 숙명학굔데

1927년에는 어느새 일본인들의 전유물로 돼서 교사 20명 중에서 15명이 일본인 상태였고

교무주임은 사이토 선생은 이 학교를 너무 노골적으로 일본화 시키고 있던 것입니다.

학생들의 투쟁원인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당시 5명 한국인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성희경 여사가 스트라이크의 원인을 증언합니다.

(음성 녹음)

(음악)

- 『학부형회 개최. 해결책을 강구.』

400명 학생들이 일단 맹휴에 돌입하고 등교를 거부하자 학부형들이 나섰습니다.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 우리 애들의 요구조건을 나도 자세히 검토해 봤습니다. 6개 항목 모두가 그러지 않습디다.

기숙사사감선생, 재봉선생까지 내지분이라니. 아, 그분들이 조선의 생활풍속을 아십니까?

조선옷 만드는 재봉을 알아요?!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및 고함 소리)

-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학부형 어른의 뜻에 저도 동감은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학부형회의를 연 것은 분규를 더 확대하자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고함 소리)

-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글쎄 제 말씀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음, 전 뭐 학교 측을 두둔하자고

나온 사람이 아니올시다. 빈대가 밉다고 해서 초가삼간을 태워버려서는 안 되겠다. 이 뜻이에요.

숙명여학교는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학교 아닙니까. 학교의 명예가 있다 이 말씀이에요!

그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건을 해결하자는 거예요!

(음악)

학부형들은 일단 이성을 찾기로 했습니다. 일단 학생들을 등교시키기로 했으니.

- 『학부형 측에서 이렇게 생도를 등교시킨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내용이 있으나 대체로 말하면

생도들의 본분은 학업이니 모든 것을 학부형 측에 맡겨두면 생도들의 6가지 요구가 무리한

것이 아닌 이상 가령, 생도들이 꺾이어 공부를 한다 할지라도 선생 측에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 터이니 멀지 않은 장래에 자연히 해결되리라 하는 전망인데 학부형 측에서는 학교를

감시하리라더라.』

이리하여 5월 29일에 일단 학생들은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그래도 학교 측은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생각을 안 했습니다.

- 『숙명여학교생 또 동요. 7일 오후부터 다시 수업 거부. 저번 맹휴 당시에 학부형회 의원이

한 주일 후에는 생도들의 요구조건에 상당한 회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후부터 배척하는

사이토 교무주임과 나까지마 사감은 병이라 하여 출석치 아니 하나 퇴직을 성명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필경은 생도들의 요구를 유야무야 중에 스러지게 한 후 다시 출근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야

다시 생도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나섰더라.』

학교 측의 지연전술을 학생들은 용서치 않았습니다.

- 『학생 전부 귀향. 시골학생들은 전부 시골로 돌아가.』

급기야 학교를 진공상태로 만든 상태가 일어났습니다. 해결은 단시일 내에 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강경책을 썼습니다. 6월 25일부로 학부형과 보증인들에게 통고장을 보냈습니다.

- 『오는 7월 1일까지 생도들은 등교시킨다는 통지를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랍니다.

만일 우 기일까지 회답이 없는 경우에는 귀하가 보증한 생도를 등교케 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겠으며-.』

학교 측에 이런 통지를 받은 학부형 측은 분개해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강경한 결의를 했습니다.

- 사건 해결에는 힘쓰지 않고 개별적으로 등교하라는 통지를 바라야 생도 측에만 희생자를 내리고

문제는 유야무야에 묻어버리려 함은 가장 성의 없는 악랄한 처지로 인정됨.

일. 학부형 측에서는 20일 대회의 결의에 의하여 좌와 같은 태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줄로 인정함.

가. 학부형 측은 개인으로서는 학교당국, 기타 본 사건에 관하야 교섭에 응치 못할 것.

나. 문제 해결 때까지 등교 여부는 생도의 자유에 일임할 것.

다. 사이토 교무주임의 사퇴를 권고함.

(음악)

학부형 측까지 학생들에 동조해서 학교당국에 맞섰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서

이 사건 취재를 맡았던 현 국회의원 서범석 씨의 증언입니다.

(음성 녹음)

(음악)

5월에 시작된 이 스트라이크는 여름이 지날 때까지 진공상태를 면하지 못하다가

결국 새 학기가 다가오는 8월 20일에 일단 학생들이 등교했습니다.

학교 측의 후지자와 하깡.

- 문제의 초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이토 선생은 교무주임 자리를 내놓기로 했습니다.

평교사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후임 교무주임은 곧 다른 선생을 초빙할 것입니다.

에, 재봉교사 나까지마 선생은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하고 동교 졸업생으로

방금 지방에 가있는 오경선 여살 재봉교사로 초빙하고 기숙사사감까지

겸하게 했습니다.

학교 측의 일보후퇴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투쟁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평교사로 남은 사이토 교사의 수업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학교 측의 강경책이

또 나왔습니다.

- 『문제의 숙명여교. 돌연 35명 집단 정학.』

기숙사생들의 무단외출을 이유로 35명을 무더기 정학 처분한 것입니다.

또다시 사건은 크게 터졌습니다. 이번에는 교사 중에서 한국인인 세 여선생이 사표를 냈습니다.

한국인 교사까지도 학생 측에 가담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학교 측은 35명의 정학을

해지할 용의가 있으나 주모자들 몇 명을 처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8월 27일.

- 『 4년생의 무기정학, 전교생도 동정맹휴.』

최고 학년인 4학년 학생 전원의 무기정학 처벌을 가한 것입니다.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 『학교 측에선 4학년 생도 54명에 대하야 한 사람씩을 교장실에다 불러다 놓고

스스키 교사 외 한 교원이 사이토 교무주임 배척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취조한 결과

생도들은 한결같이 배척을 각각 자기 의사로 한 것이오 남의 충동을 받거나 한 일은

없다고 하였던 바 학교에선 27일 아침에 이르러서 26일부로 전기 54명 4학년 생도

전부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한다고 발표하얐다. 』

(음악)

그리하여 3학년 이하 학생들은 동정맹휴에 돌입하였고 사태는 극도로 악화했습니다.

사회 여론은 학교 측에 불리해만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 『숙명의 사이토 교무주임, 필경은 사퇴.』

애초 이 사건의 초점이었던 사이토 교무주임을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 『무기정학생에게 3일까지 등교 명령.』

결국 무더기 무기정학을 해제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일본의 식민지교육정책은 1927년도에 벌써 뿌리를 박고 안정될려는 듯이 보였습니다.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를 일본인들이 완전 지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숙명여학교 학생들은 그 식민지와 교육에 단연 반기를 들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철학교수 신일철 씨는 그 일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음성 녹음)

(음악)

1927년도,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에 이 나라 여학생들은 일본의 식민지교육체재에

반기를 들었고 그 당당하고 조직적인 투쟁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이 나라 여권운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통쾌한 사건입니다. 1927년 5월에 시작해서 9월에 끝난, 넉 달 동안의

오랜 투쟁을 우리 여성들은 꿋꿋하게 버텨낸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한 것입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서범석, 성희경, 신일철. 기사낭독 안종국.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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