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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장인환
제1부: 근세의 표정
장인환
1969.06.22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여섯 번째.

오늘은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 편을 보내 드립니다.

(음악)

-『스티븐스를 암살한 장인환 씨, 미국에서 귀국. 이억품상 23년.』

1927년 4월 23일, 동아일보.

- 『기울어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뜨거운 생각을 품고 지금부터 23년 전에 창해만리

태평양을 건너가서 19년 전에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 당시 한국정부 재정부 고문이면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에게 양해를 구하러 간다던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미국 관헌에 붙잡여 10여 년 동안을 감옥생활을 하야 역사의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장인환 씨는 지난 3월 19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야 23년 만에 한 많은 고국의 땅을

밟으며, 20일 오전 5시 40분 평양역 도착 열차로 그리운 고향에 귀환하야 방금 그 삼촌 되는 선교리 104번지

장명진 씨 집에 여장을 풀었는데 천하에 큰 뜻을 품고 일생일대의 반생을, 혹은 피보다 뜨거운 눈물을

음침한 철장 속에서 하염없이 뿌리며 부질없는 인생에 깊은 한을 느끼던 씨는 변천 많은 고국의 설움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더라. 』

장인환 씨의 귀국. 장인환. 멀리 미국 땅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의 분노를 터트려 미국 사회를

한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D.W.스티븐스라는 친일파 미국인을 암살한 주범입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오클랜드 역전에서 권총을 쏘아 스티븐스를 암살하고

미국 경찰에 체포. 재판을 받아 25년 금고형을 받고 10년을 복역, 모범수로 석방됐다가

1927년 4월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미 오십이 넘은 장년.

- 『요코하마에서부터 형사의 미행을 받으며 귀국한 장인환 씨는 역시 끊임없는 형사의

눈초리 밑에서 찾아간 기자에 대하야 말하기를. 』

- 20여 년 동안 낯선 땅에서의 지난 일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그 사건은 만 10년 동안을

철창 속에 있다가 3년 전에 출옥했습니다. 마침내 고국이라고 돌아는 왔습니다만

즐거운 줄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슬퍼질 따름이외다.

- 『말하기를 꺼리는 씨의 창연한 빛이 떠도는 얼굴에는 옛일을 말하는 듯하나

당시 뜻을 같이 하고 손을 같이 하였던 전명운 씨에 대한 말을 피하며-』

- 전명운 씨요...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하아... 혹 아는 사람은 아실 테지만.』

(음악)

사학자 이선근 씨의 말을 우선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도 있고, 이완용에게 칼을 휘두른 이재명 의사도 있고

그 후 계속해서 의사, 열사들이 나타났으나 그 최초라 할 수 있는 테러리스트는

장인환 의삽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장인환 의사가 거사한 다음 해가 됩니다.

일본의 침략정책에 항거해서 단신 암살 작전으로 나가 실행한 최초의 테러리스트가 장인환 의삽니다.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 외교고문이었던 D.W.스티븐스라는 미국인은 미국에 와서까지

일본의 침략정책을 찬양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 첫째, 고려는 재팬의 보호를 받은 뒤로 발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고려의 주민들도

재팬의 보호정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 둘째, 고려에 대한 재팬의 정책은 미국이 필리핀에서 취하는 정책보다 더 유화적입니다.

일본의 보호 아래 고려는 새로운 정부를 조직했는데 이때 정부 요직을 얻지 못한 소수인물들이

불평을 가지고 재팬을 반대하지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농촌의 농민들까지도

일본의 보호 정치를 환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음악)

이런 터무니없는 기사가 각 미국 신문에 실리자, 미국에 있던 교포들은 흥분했습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는 우리 교포들이 많았습니다. 거기 있던 한인공립협회라는

우리 교포 단체에서는 그 대책을 토의하고 대표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4명을 페어먼트 호텔에 보내서 스티븐스에게 신문기사를 정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친일파 스티븐스는-.

- 한국 황제 자신이 어리석고 관리라는 자들이 백성을 학대하고 재산을 탈취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원한이 많다는 건 당신들도 알 거요. 미안하지만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소!

일본의 보호가 없었다면은 러시아에게 나라를 뺏겼을 거요. 내가 신문기자들에게

한 얘기는 모두가 사실이니까 정정할 수 없소!

- 야! 뭐야! 이놈아!!

( 때리고 싸우는 소리)

(음악)

스티븐스는 우리 교포 청년들에게 매를 맞다가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그냥 있다가는 신변이 위험할 듯해서 그는 이튿날 아침, 워싱턴으로 갈려고 정거장으로 나갔습니다.

오클랜드 정거장. 정확하게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 자, 이놈! 스티븐스!

한국 청년 하나가 권총을 대고 쏘았으나-

(달리는 소리 및 격투하는 소리)

(총소리)

(음악)

먼저 총을 쏠려고 했던 청년은 전명운. 권총이 불발돼서 맨손으로 달려들어 싸우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청년이 총을 쏜 것입니다. 이 나중에 나타난 청년이 바로 장인환.

그가 쏜 총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맞춰서 결국 죽게 했고 또 한 발은 전명운 의사의 어깨에 맞았습니다.

장인환은 그 역전에서 체포됐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법정에서는 장인환 의사의 재판이

3월 27일부터 시작됐습니다. 재판의 원고는 스티븐스의 유족. 피고는 장인환.

그러나 물론 일본과 한국 간의 재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학자 홍순옥 씨가 당시 일본 측의 태도를 증언합니다.

(음성 녹음)

장인환 의사는 공판장에서 시종일관 떳떳한 태도를 취했다고 김원용 씨의 저서

‘재미한인50년사’에 기록돼있습니다.

- 한국 정부가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으로 초청한 것은 한국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한국의 국록을 먹으면서 그 직위를 이용하고 한국의 원수인

일본에 협조해서 한국을 모해했습니다. 이런 배신자를 용납할 수 없으므로

내 몸을 희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죽였습니다.

1877년, 평안남도 평양군 대동면에서 출생한 이 청년은 겉으로는 학자풍으로 매우 점잖아 보였습니다.

일찍이 기독교에 들어가 세례를 받았고 1905년 2월, 하와이 이민단에 끼여 하와이 섬, 마우이에

있다가 이듬해인 1906년 8월에 미 본토로 건너가 대동보국회 회원이 되었고, 생계는

노동으로 유지하면서 만리이억의 고국을 그리워했습니다. 장인환 의사의 공판은

280일이나 걸리는 지루한 날짜를 끌었습니다. 일본 측이 갖은 공작을 다해서 장의사가

사형 언도를 받도록 했고 우리 교포 측에서도 이 재판을 후원하기 위해서 후원회까지 조직했습니다.

교포들의 성금으로 변호사를 대고 재판비용을 댔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명 변호사들이었던

카클린, 파웰, 패렛 등 세 변호사가 열렬히 장의사를 변호했습니다.

패렛 변호사의 변론.

- 이 사건은 국제 상 관계를 일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더욱 공정한 중재자가 돼야 할 것입니다.

남의 집을 폭탄으로 깨트리고 다수 인명을 살해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면 1급살인자가 될 것이고 그보다 경하면 2급, 혹은 3급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판에서 먼저 분별할 것이 죄의 등급이며, 죄의 원인을 생각하면, 오늘의

한국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에, 원고 측 변호사가 말하기를,

장인환이 한국에서 이런 일을 했으면은 곧 사형에 처했을 것이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옳은 점이 많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권을 일본이 가지고 저들 뜻대로 하기 때문에

한국의 애국자는 일본의 형벌을 받고 있으니 장인환도 한국에 있었다면 무조건 사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인환이 미국에 있어서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한국에 미국사람이 많이 가있고, 그 미국인들은 모두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데 오직 스티븐스가

한인에게 총살을 당했으니 우리는 스티븐스의 죄를 알 수 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장인환의 처지에 놓였다고 가정하고 생각하시면은 판단은 스스로 공정해질 것이외다.

변호인들은 한국의 처지를 공판장에서 호소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의 역사를 조사, 연구했습니다.

카클린 변호인은 다분히 감정에 호소하는 변호를 했습니다.

- 한국의 천연자원을 일본인들이 채굴하고 논밭을 일본인들이 경작하며 한국사람은 굶어 죽게 됐는데

분한 마음이 안 들면 한국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혈기 있는 젊은이로서 그런 일을 당하고

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일에 협조하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할 심정을 생각해야

공정한 판단이 내려질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재판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십쇼.

만일에 우리가 장인환을 죽이면 그 사람은 정의를 주장한 애국자인 까닭에 죽는 것이니

그것이 옳은 일이다, 애국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로운 일인가 생각하십쇼.

(음악)

미국인 배심원들도 감동했습니다. 280일 간을 끈 지루한 재판이 끝나 미합중국 고등법원

쿠 판사 담당 법정에서 장인환은 제2급 살인죄로 금고 25년형을 받았습니다.

생명은 구해진 것입니다. 샘 퀜텐 형무소에서 복역하기 시작했고 10년 만에 모범수로 뽑혀

출옥했습니다. 출옥일자는 1919년 1월 17일. 감옥에서 나왔으나 장인환 의사는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교포들의 도움으로 연명해 나갔지마는 몸과 마음이 다함께

피곤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귀국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에 검은머리가 희끗희끗하야 감옥 문 밖을 나섰으나

그를 맞아주는 동포는 있을지언정 반겨 웃는 살뜰한 친척은 없었다. 그러나 씨는

고국을 떠나기 전 20여 년 전부터 유희하던 고아사업을 하기 위하야 평북 선천 읍내의 고아원

외부총무의 임무를 띠고 귀국한 것이라고 한다. 』

1927년 4월에 귀국했을 때는 이미 쉰한 살의 장년. 아니, 노년기에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일본인이 이제 완전히 통치하고 있는 조국. 형사들은 계속 감시를 하고 젊어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을 휘둘러 나라의 적을 죽일 수 있었던 애국적 테러리스트 장인환의 귀국한 모습은

그토록 쓸쓸했습니다.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귀국했던 장인환 의사는 끝내 일본 치하의 고국에 적응하진 못했습니다.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에 못 이겼을 것입니다. 정확한 일자는 기록에 안 나왔으나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업을 하다가 병이 들어 안식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장인환 의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병사가 아니라 자살이었습니다.

1930년 5월 22일, 향년 54세.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이 해외각지에서 날아왔고

교포단체가 모여 사회장을 치루어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프레스 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음악)

장인환 의사. 그의 뒤를 따라 의거에 나섰던 안중근, 강우규, 김상옥, 윤봉길 등 모두가

짧은 재판 기일만 살고 사형에 처해졌지만 장인환 의사는 다행히 미국에서 저지른 의거라

사형을 면하고 22년을 더 살았습니다. 10년은 옥중에서, 12년은 고국과 미국에서

그러나 그는 조국의 광복을 못 본 채 이억만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1962년에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으로 그의 업적에 보답했습니다.

한 개인의 의거를 단순히 얘깃거리로만 생각할려드는 사회의 인심을 보여준 예가

장인환 의사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얘깃거리를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단순한 영웅심에서 저지른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국가라는 것,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인류의 정의라는 것에 대한 신념에 대해

반영된 의거였습니다. 장인환 의사의 명복을 우리 다 함께 빌고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음악)

(음악)

말씀해주신 분. 이선근, 홍순옥, 신일철. 기사낭독 안종국.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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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오늘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장인환 의사 편을 보내 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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