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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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네 번째.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신간회 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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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1927년 2월 15일, 일본의 식민지 하에서 민족의 단일정당을 지향하고 창립된
단체, 신간회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좌익세력, 사회주의자들 내지 공산주의자들까지 포섭해서 이 나라 최초의 좌우익 합작을
시도한 것부터가 문제점이었습니다. 하여간에 신간회는 당시 이 나라 지성인의 총 결합체였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 신간회는 지방에까지 파급됐습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에서
신간회를 파악한 내용이 있습니다.
- 『지방에 있어서의 대일조선인 중 저명한 인물은 거의 다 신간회에 가입했고
또 집회, 회원 권유 때 언동을 종합해보면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시사 문제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요개하여 반항적 기세를 선동하며 분교 확대에 힘쓰고 기회를 포착하여 민족적 반감의 원인을
만들고 있어 지방 인심을 자극하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신간회는 당시 한국의 저명인사들이 거의 다 참여했고 또 이 운동의 목표가 한국의 독립임은
일본 고등경찰이 파악한 그대로였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여 창립된 신간회.
그러나 그 자체 내의 문제점은 끝내 신간회를 분규의 단체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즉,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 좌익운동가들은 물론
맑스, 레닌의 공산주의 공식만 알고 여기 충성을 했던 자들입니다. 맑스레닌주의를 한국 실정에
맞게 토착화하는 작업도 안 했고 한국적 입장에서의 비판도 하지 않고 받아 들였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15일자부터 13회에 걸쳐 실린 ‘전환기에 직면한 조선신흥운동’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김영식이라는 이 필자는 공산주의자로 보이는데 그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흥계급해방운동과의 관련에 중점을 두면서 제국주의 자본 행정에 제약된 조선자본주의의
특질을 요약, 열거해보면 첫째, 조선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의 몰락기에 생성하였다.
둘째, 조선자본주의가 운명을 걸고 있는 형태는 순연한 국가자본주의적이다.
고로 다른 어떤 주의의 자본보다 가장 직접적으로 긴밀한 결탁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셋째, 조선자본주의는 반동성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
이 논문은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룩한 대표적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허덕이는 당시 한국에서 굳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찾자는 의도부터가 우스꽝스럽습니다.
공산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소위 계급투쟁론을 억지로 한국에 적용시켜 볼려니까
이런 엉터리 현실 파악이 생기는 것입니다. 3.1운동 직후부터 공산주의 이론은
새로운 사조로서 일부 젊은 층에게 어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과격하고 진보적인
이론을 현실화시켜 볼려고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각종 씨의 ‘조선민족사상변천의 개요’라는 글에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허점을 지적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당시 민족주의 측에서 사회주의 측을 공격한 글입니다.
- 『민족운동이라고 하면 단지 혈통과 역사와 전통을 복구하려는 운동만이 아니라
반드시 부의 분배와 권력의 균형 등을 총체로 하는 전 민족의 행복을 위한 운동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고로, 민족문제로서 사회문제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고 사회문제로서 민족문제를
의미하지 않는 것이 없다. 』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이야말로 전체 인민의 행복을 위해 싸운다고 외쳤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일부 특수층의 이익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이각종 씨의 논문은 그 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운동 자체가
전 국민의 행복을 위한 운동인 것입니다. 이각종 씨의 논문은 계속됩니다.
-『맑스나 엥겔스의 어떤 부분에 사회혁명의 신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너무나 천박하다. 무슨 운동이든 조선 특수의 사정을
토대로 해서 서는 데 참다운 생명이 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 대해서 보아도 세계엔
민족이 있고, 국법이 있고, 역사가 있는 이상 우선 출발점은 민족에서 아니면 안 된다.
그 사회혁명의 선구라 하는 노서에서마저도 아직 국내에선 민족을 가지고 굳히고 있지 않는가.
노자의 쟁의에 관해서도 정확한 의미에 있어선 우리 조선에는 아직껏 극렬한 노자 문제는 없다.』
이렇게 당시 한국적 현실에 대해 눈이 어두운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의 공식을 억지로 한국 현실에 맞춰볼려는 기본적인 오류를 공산주의자들은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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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신간회는 탄생했고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인격적으로 전 국민의
추대를 받고 있던 이상재 선생이 회장직을 맡은 지 석 달 만인 5월 19일에 돌아가신 것이
또 신간회 혼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형식적이나마 갖추어질려던 지도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신간회에 직접 관계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죽고 남은 분이 얼마 안 계십니다.
신간회 초기에 관계했고 당시에는 일시적으로 좌익계열에 서있던 김준연 씨가 증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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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의 대립이라는 심각한 내분을 안고 있으면서도 신간회는 당시 한국의 여러 문제
해결에 활약했습니다. 시민적 자유의 신장운동으로서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경제적인 운동, 그리고 진실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자는 운동으로서의
한국학도 이 신간회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한국인의 모든 문제에 신간회는 관여했습니다.
농촌에서의 소작인 문제까지도 직접 개입해서 해결했습니다. 신간회 활동의 클라이막스는
광주학생사건입니다. 1929년, 그러니까 신간회가 창립된 2년 뒤인 11월 3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불붙은 학생들의 투쟁. 총독부 측은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강력한 보도관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은 더욱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습니다.
신간회가 광주학생사건에 개입한 것은 이 땝니다. 사건이 터진 사흘 뒤, 신간회에서는
김병로, 허헌, 양 변호사와 신간회 경성지부장이었던 조병옥 씨를 현지에 급파해서
실정을 파악하게 했습니다. 조병옥은 그때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다가 민중운동에 직접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민족진영 측의 강력한 투사로서
조병옥 박사가 클로즈업되기 시작한 것은 이 땝니다.
당시 신간회 회원이었던 이관구 씨의 얘기를 우선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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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간 조병옥, 김병로, 허헌 등은
경찰 측의 방해를 받아 실정조사도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지의 관리들에게
엄중한 항의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신간회 측은
광주실정보고대회를 청년회관에서 개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집회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총독부 당국에 대한 성토대회를 겸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비밀회합을 가졌습니다. 민족운동 사상 처음으로 생긴
민족단일당인 신간회는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터트린 항쟁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와 같은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나설려 했습니다. 거사일은 12월 1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준비를 했습니다.
조병옥이 지부장으로 있는 경성지부가 거사 본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의 비밀이 일본 경찰에
알려졌습니다. 거사 며칠 전, 경기도 경찰부의 고등계 경찰로 유명한 미와 경부가
신간회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 조병옥 선생님 좀 뵈러 왔는데요.
- 웬일이쇼, 미와 경부.
- 네, 조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무슨 얘기?
- 에, 또... 치안 상 만일의 사태를 염려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뭐,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13일에 거행하기로 한 민중대회는 중지해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 민중대회?
- 헤헤헤, 민중대회를 중지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누가 민중대회를 연다고 합디까?!
- 하하, 금시초문이시군요. 그게 사실이기를 저도 희망합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그날을 넘기시도록 부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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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이려던 민중대회. 그러나 그 기밀이 벌써
고등계 주임 미와에게 새나간 것입니다. 신간회 측은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조병옥이 강경히 말했습니다.
- 사후대책이요? 대책이 있을 수가 있어요? 기밀이 새나갔어두 해야 해요!!
애초부터설랑은 위험은 각오한 일이 아니에요?! 예정대로 밀고 나갑시다!!
나이 어린 학생들의 외침이나 민중의 여망을 저버릴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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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기밀이 새나간 상태에서 강행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대회 8시간 전.
일본 경찰은 신간회 본부를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간부들을 체포했습니다.
신간회 대검거사건. 권동진, 홍명희, 김병로, 조병옥, 이관용, 이원혁 등 44명의 신간회 회원과
자매단체였던 여성단체 근우회, 청총, 노총 관계인사 47명, 도합 91명이 검거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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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된 간부들은 대부분 3년여의 형무소 생활을 했고 그동안 신간회는 김병로를 위시한
나머지 인사들로 버틸려 했으나 이미 낙조기에 들어섰고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의 방침이
바뀌어져서 신간회 해체론을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의 정책이
바뀐 것입니다. 그동안 지켜오던 정책을 변경해서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세의 투쟁은
민족주의자와의 공동투쟁을 포기한다는 정책 변화였습니다. 즉, 재래에 있었던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전선을 포기한 것입니다. 1931년 5월 16일, YMCA회관에서는
전국에 남아 있는 대의원 77명이 참석해서 신간회 전체 회의를 열었습니다.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던 총독부 측에서도 기꺼이 허가한 이 집회. 신간회 해체 회의였습니다.
일제 총독부 측에서는 애초에 좌우합작을 환영해서 초기에는 민족주의를 밀어서
공산주의를 꺾고, 신간회 말기에는 공산주의를 이용해서 민족주의세력을 붕괴시킨 것입니다.
정치학자 홍순옥 씨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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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15일에 창립되어 만 4년을 자라다가 1931년 5월 16일에 해체된 신간회.
당시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 나라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해서 조직했던 민족의 단일당, 신간회는
태어날 때부터 좌우익 합작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좌익세력의 난동과 일제 총독부 당국의
고등술책에 말려들어 자진해체라는 비운을 겪었고.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을 끝으로
신간회 편을 끝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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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주신 분. 김준연, 이관구, 홍순옥, 신일철. 해설에 김영배. 음악에 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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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신간회 편을 두 주에 나눠서 보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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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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