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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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서른세 번째.
신간회 편을 두 번에 나누어서 , 오늘은 먼저 그 발기 과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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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 방법이 바뀌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무단정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일본 천황은 조서를 발표해서 이른바 ‘일시동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자기의 동등한 신하요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수상 원경도 3.1운동이 난 해, 8월 19일에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 『조선은 일본의 판도나 일본의 속국이 아니요, 또한 식민지도 아니다. 즉, 조선은 일본의 연장이다.』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운동이 일본의 차별정책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인가.
한국에 자주독립을 주면 간단한 것을. 일본인들은 그럴 기색은 없이 차별을 없애는 것만으로
한국인들을 구슬리려했습니다. 이때 이미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감옥에 갇히거나 해외로 망명했을 땝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통치자들은 한쪽으로 탄압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문화정치라는 말로
한국인들을 무마시킬려 했던 것입니다. 하여간에 문화정치 때문에 한국어로 된 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창간이 허가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국내에서의 무력적인 투쟁은 이미 불가능하던 땝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방법으로 민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아, 조선 두 신문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교육운동, 경제자립운동, 여성해방운동, 소년운동 등 민중운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이미 소개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운동, 애국부인회운동 등은
이때 생긴 것들입니다. 이 운동들은 결국 그 목표를 한국의 독립에 두었다는 것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럴 즈음에 나타났고 자라난 운동 중에 비극적인 운동 하나가 있습니다.
사회주의운동 내지 공산주의운동입니다. 소련이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고
맑스레닌주의가 새로운 이념으로 세계를 풍미하는 여파가 이 나라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1922년, 7월에 일본에는 일본공산당이라는 것이 창립됐습니다. 그 일본공산당 강령 초안에는
- 『조선, 중국, 대만, 화태로부터의 일본군대 철수.』
나라 잃고 서러워하던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산당 괴수 레닌도 약소민족의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어주었습니다. 독립을 갈망하던
이 나라의 일부 청년들은 이 공산주의의 이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1920년, 상해에서는 이미 고려공산당이라는 것이 조직됐고 국내에서도 1922년에
서울청년회라는 공산주의 서클이 생겼습니다. 맑스레닌주의가 무엇인지도 자세히 모르고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한편, 3.1운동에 성공하지 못한 민족주의 진영에서도 새로운
투쟁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천도교 측의 최린 일파는 자치론을,
그리고 안창호, 이광수 등은 민족개조론을 내세웠습니다. 이광수는 1923년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설에서 이광수는
민족운동에 방향이 없음을 통탄하고-.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아래 모든 정치적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즉,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함은 물론 참정권, 자치권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이광수의 이론은 하나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때까지 거의 맹목에 가까운 반일독립운동이 있었을 뿐이었던 때.
일본의 통치권을 일단 승인하는 조건 아래 독립운동을 하자는 이론을 편 것입니다.
실제로 맹목적 독립운동은 희생만 자꾸 낳았지 결과가 신통치 못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에 의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열과 현실적인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세력은 물론 두 갈랩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한국에 제1차적이고 최대의 목적은 독립이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추구하는 목표는 두 세력이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두 개의 이념이
다른 세력에 뭉쳐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분열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게
당시의 여론이었습니다. 나라는 잃고 있었지마는 우리 배달민족의 통일된 기관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여론 속에서 태어난 것이 신간횝니다. 새 신자, 줄기 간자, 신간회. 1927년 1월에 창립됐습니다.
고(故) 조지훈 교수는 한국민족운동사라는 저술에서 신간회를 성립시킨 요인으로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신간회는 민족운동의 대표기관이 어떤 형태로든지 있어야 된다는 국내의 동향, 곧 민족주의운동 지도자들의 모색이었다.
둘째, 국외에 있어서의 공산주의운동자들이 국내의 특수사정을 인식하여 종래와 같은 신흥세력만으로는
도저히 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고유의 잠재세력과의 결합을 인정하게 되어
국제공산당이 이를 승인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일제의 고등경찰 정책이었다. 신간회와 같은 방대한 단일단체의 조직을 허가한 것은
그들 나름으로 세 가지 중요한 책략이 있었다. 결사 자유를 주는 듯이 가장한, 소위 문화정치의
회유책. 그리고 이미 허가한 단체들을 탄압하면 비밀결사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므로
합법투쟁의 표면화를 유도하여 사건 취초를 단일화 시키려는 것.
또 그리고 전성기의 공산주의운동은 민족주의를 키움으로서 꺾고 민족주의의 융성은
공산주의로 꺾으려는 고육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
언뜻 보면은 우리 민족운동의 단일대표위원을 만들자는 정도로 생각되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이토록 복잡했던 것입니다. 즉, 공산당들은 그들대로 계산이 있었고
또 신간회를 허가한 총독부 측은 총독부 측대로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계산. 독립운동에도 계산이 작용되고 일본 통치자들도 교묘한 계산을 할 줄 알았던 1927년돕니다.
이미 순진하고 맹목적인 독립운동의 시기는 지났고 무조건 탄압하던 일본의 통치시대도 지나간 땝니다.
언론인 유광렬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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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는 1927년 1월 20일에 그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됨에 따라 민족적 중심 단결을 요구하는 시기를 타서
순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 발기인 28시 연명으로 작일, 좌기와 같은 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책임자의 말을 듣건대 신간회의 목표는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 하여 실지 정책과 사업을 2월 25일 열리는 창립총회에서 결정할 터이다.
일,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일.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일.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
발기인 심영, 김명동, 김준연, 김탁, 권동진, 정재철, 이갑성, 이석훈, 정태석, 이승복, 이정, 신석우, 신채호, 최익선,
최원순, 박내홍,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선언서는 발표되기 전에 다 압수됐고 그 강령 셋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언뜻 들으면
이상한 듯한 이 강령은 그때 사정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사학자 이선근 씨의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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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회 창립대회 이백여 명 회원이 출석하야 대회 창립하고 부서를 제정.』
1927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신간회 창립대회는 기보한 바와 같이 재작 15일 오후 7시 15분부터 시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홀에서 개최되얐는데 당야 출석회원은 약 이백여 인. 그 중에는
여자회원도 칠팔 인이 있었고 2층 방청석엔 방청인으로 대 만원을 이루었었는데
개회가 되자 즉시 신석우 씨를 임시의장으로 추천하고 서기는 김준연, 신연익, 장기현. 삼씨.
사찰은 권태석 씨 외 11인을 추천한 후 먼저 회원의 증명이 있었고 곧 의사진행으로 들어가
신간회와 조선민흥회의 합동경과보고와 회의 명칭은 편의상 제3 간판을 붙이지 않고
신간회라고 하얐다는 것과 기타 그동안의 경과, 상황 보고가 있고 규칙 통과에 들어가
규칙 심사위원으로 권동진, 최익환, 박내홍, 송내호, 이동고 씨를 선거하야 규칙을 심사케하여 가지고
개체 무수정으로 통과를 시키고 선언에 관한 것은 위원에 일임하기로 가결하였다.
장래 공기가 더욱 긴장된 중에 임원선거가 있어 무기명투표로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양 씨를
선거한 후 다시 간사는 35인을 선거하기로 한 후 전용위원으로 권동진 씨 외 11인을 선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에 창립됐습니다. 민족운동의 대표기관이 생긴 것입니다.
회장은 이상재 선생, 그리고 부회장은 홍명희가 당선됐으나 개인의 사정과 내부의
미묘한 사정 때문에 사임하고 권동진이 부회장직을 맡았습니다.
회관은 관수동, 현재 국일관 부근에 있는 이갑수 씨 저택 사랑방을 얻어 썼습니다.
창립 당시 35인의 간사를 뽑았는데 이 35인 간사진은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의 신간회에는 아직 사회주의 계열이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신간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세력 단일화. 이것은 하나의
범국민적인 정당이라 할 수 있는 단체였고 나라 없는 백성들은 신간회를 우리의 자주적인
정부로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국민들의 기대가 컸던 신간회.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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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줄기 간자 대신 나라 한. 즉, 새로운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할려다가
총독부에 의해 신간회로 이름을 바꾸었지마는 한국 민족의 통일적인 단체로서의
기대를 안고 1927년 2월 15일에 출범의 신호를 울렸습니다.
신간회. 민족주의 세력이 처음에는 주도권을 잡았지마는 조직 내에서의 투쟁에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통치자들도
신간회가 이 나라 민중의 대표기관으로 활약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여간에 이미 돛을 달고 출항한 신간회의 항로.
그 항로가 어땠는지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말씀해주신 분, 이선근, 유광렬, 신일철. 그리고 해설에 김영배. 음악에 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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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오늘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신간회, 그 첫 번째 편을 보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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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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