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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송학선
제1부: 근세의 표정
송학선
1969.05.04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아홉 번째.

오늘은 송학선 의사 편을 보내드립니다.

(음악)

- 『금호문 사건, 작일 오후 1시 해금. 단도 휴대하고 자동차 습격. 자동차 위에 뛰어올라 두 명을 찌르고 경계망 중에서 수십 군경과 격금까지.』

동아일보 1926년 5월 2일자.

- 『지난 4월 28일 오후 1시 10분에 경성부 평의원 고산, 좌등, 지전 삼씨가 택시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으로부터 금호문으로 나와 와룡동 창덕궁 경찰서장 관사 앞까지 갔다가 길에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다시 돈화문 앞으로 돌아오려던 차에 돌연히 청년 한 사람이 자동차의 좌측 후방으로부터 달려들어 우측으로 뛰어올라 왼손으로 자동차 창을 잡고 바른손에 날카롭게 간 양식 칼을 들고 좌측에 앉았던 고산 씨의 바른편 가슴을 찌르고 다시 왼편 허리를 찌른 후에 다시 중앙에 앉은 좌등 씨의 가슴과 배를 찌르고 제동 방면으로 도주하려 하던 것을 발견한 김화순사 등원희가 경적을 불며 그 뒤를 추격하였는데 범인은 경적소리를 듣고 이왕직 주마수 문 앞에서 옆으로 뛰어나와 붙잡으려 하던 순사 오환필의 배를 찌르고 넘어뜨리고 다시 달아나는 것을 전기 등원순사가 말을 채쳐 범인의 앞을 가로막으므로 범인은 도로 몸을 돌이켰으나 그때 이미 후방에서 수십 명의 기마경관과 도보순사가 추격하여 왔으므로 휘문고등보통학교 문 앞으로 들어가서 몸을 돌이켰는데 그때 마침 등원순사가 빼어들고 내려치는 칼을 교묘히 피하고 이어 떨어지는 그 군도를 집어 휘두르며 서로 어울려 일장의 격금을 하던 중.』

1926년 4월이라면 이 나라에 국상이 있던 땝니다. 즉, 이씨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황제가 4월 15일에 승하하시어 전국의 국민들이 애통해 마지않던 땝니다. 그때 창덕궁 앞에서 어느 한국인 청년 하나가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본인을 습격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 『범인 송학선. 고양군 연희면 아현리에 본적을 두고 부모와 동생 두 사람을 데리고 지내면서 극히 빈한한 생활을 하여 왔던 금년 30세의 송학선임이 밝혀졌다. 그는 어릴 때 서소문 안 사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사람으로 남대문통 어떤 일본인의 농구점에 고용살이를 한 일도 있었다.』

송학선. 송나라 송, 배울 학, 착할 선. 30세의 가난한 청년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청년은 별로 위대하지도 못한 일본인들을 찔렀을까.

- 『범행의 원인은 총독으로 오인. 범인 송학선의 범행 원인에 대하야 종로 경찰서에서 취조한 범인과 범인의 부친 송성진과 모친 김씨의 청취서에 의하면 범인은 가정에는 별로이 취미를 두지 않고 간혹 부모에게 걱정을 끼친 일도 있었다 한다. 범인은 항상 할빈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숭배하고 있던 터이므로 재등 총독을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그 전부터 신문이나 혹은 기타에서 총독의 사진을 보고 용모를 알아두었던 터인데 그날 좌등 씨가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그의 얼굴과 체격이 재등 총독과 흡사하므로 재등 총독으로 그릇 인정하고 저격한 것이라고 범인은 자백하얐다고 한다.』

(음악)

결국 송학선이라는 이 청년은 사이토 총독을 죽일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그 얼굴을 잘못 알았으므로 엉뚱한 일본인인 경성부 평의원 고산효행을 죽이고 3명의 일본인에게 중상을 입힌 것입니다. 거사 당시의 송학선은 활극배우처럼 용감했습니다.

휘문고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을 때 그 학교 학생들이 목격했습니다.

그 중의 한 학생이 목격담을 기자들에게 들려준 것이 있습니다.

- 다른 곳에서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본 것은 바로 우리 학교 정문 앞이 됐습니다.

그 사람은 위에는 샤쓰만 입고 밑에는 조선 바지를 입고 평상화를 신었는데 칼은 바른편 손에 들고 바로 우리 학교 정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골목 입구에는 순사가 대여섯 명이나 칼을 빼어들고 섰는데 달려들진 못하고 있다가 돌멩이를 집어 던집디다.

던져도 이리저리 피하면서 하나도 맞지를 않고 도리어 그 돌멩이를 집어서 순사들에게 던집디다.

그러다가 헌병 두 사람이 육혈포를 빼가지고 그 사람을 향하여 네 방인가 세 방인가를 쐈는데 그것이 공탄이라 그런지 한 방도 맞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하기야 육혈포를 든 헌병도 손을 벌벌 떨던데요? 그런데 헌병이 총을 쏘니까 그 사람은 오냐! 쏴 죽여라! 하는 듯이 기운 있게 두 팔을 쫙 벌립디다. 그래서 총까지 놓아도 할 수 없으니까 필경은 경관들이 칼을 겨누고 달려드는데 경관 한 사람은 댓발이나 되는 대가지로 풀풀 찌르고 덤빕디다.

달려드니까 얼마동안 대항을 하고 나서 옆으로 통한 샛길로 해서 쫓겨 가다가 돌아서서 뒤에 바싹 따라오는 일본 순사 한 사람을 칼로 차서 넘어뜨리고는 다시 한참 싸움을 하다가 그대로 쓰러져버리니까 경관들이 달려들어 포박을 합디다.

내가 본 것은 그뿐인데 들으니까 구경하는 학생들더러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불러!하고 소리를 치더랍디다.

(음악)

이 용감했던 청년, 송학선. 체포되고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어 서장이 직접 심문하는 자리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 너는 무슨 이유로 고산효행 씨를 살해했는가.

- 고산을 죽이다니! 나는 재등 총독을 죽였는데 어째서 고산을 죽였다는가?

- 뭐야?! 넌 고산을 죽이고 어째서 총독을 죽였다고 말하는가!

- 총독은 내가 여러 해 동안 벼르던 자다. 옛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일본인 상점에 걸려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도 일본인 총독을 죽일 거다 결심하고 십수년간 남대문역을 배회하고 혹은 총독부를 배회하며 기다렸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그 기회를 얻었는데 어째서 내가 죽인 게 고산이란 말야!

총독을 죽인 것으로 믿었고 자기 행동의 정당함을 떳떳하게 주장할 줄 알았던 송학선.

우리는 그 용기와 행동을 미루어보아 불세출의 영웅을 상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송학선, 그는 하나의 평범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젊은 나이를 보냈습니다.

처음에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 경찰은 송학선의 배후조사에 나섰습니다.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틀림없이 배후조종자가 있을 것이고 어쩌면 상해에서 온 독립단원일 거라고 추측하고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순수한 단독 범행이었습니다.

그해 7월 15일, 송학선 의사의 제1회 공판이 열렸습니다.

- 아, 칼은 무슨 목적으로 가져갔는가. 강도질할 목적은 아니었든가?

- 내가 언제 강도질을 했소?

- 그러면 뭣할려고 칼을 창덕궁에 가지고 갔었는가?

- 창덕궁 안에서든 어디서든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져갔었소.

- 총독을 언제 본 일이 있는가?

- 정거장에서 한번 본 일이 있었소.

- 피고는 정2심에선 그 칼을 강도질할 목적으로 가져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그런 말 한 일 없소. 내가 밥을 굶었습니까? 왜 강도질을 하겠소.

이 공판장에서의 심문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일본인 재판관은 송학선의 범행이 전혀 단독으로 한 것인 만큼, 또 송학선의 신분이 낮은 것을 미끼로 강도라고 몰아 세울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송학선은 비록 학문은 없으되, 자기 소신을 떳떳이 밝힌 것입니다. 자기는 안중근 의사를 어려서부터 존경했고 그래서 일본인 총독을 살해할 결심을 했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송학선 의사의 공판장에 변호를 맡았던 법조계의 원로 이인 씨가 생존해서 증언하십니다.

(음성 녹음)

(음악)

그해 7월 23일,

- 『전날 사형의 구형을 받은 송학선은 작 23일 아침 8시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밥 한 그릇을 태연히 먹고 간수들의 엄중한 호위 아래 경성지방법원으로 구치감에 잠깐 들렸다가 10시쯤하야 베고이적삼을 경쾌히 입고 깊은 삿갓에 쇠수갑을 찬 손으로 판결을 받고저 제7호 법정에서 또다시 나타났는데 방청석에는 그의 모친 이하 여러 친척들을 위시하야 다수한 방청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으며 다수한 정복 경관들은 법정의 내외를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언도공판의 있던 날의 모습입니다. 물론 사형언도가 내렸습니다.

- 『물론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 선언을 피고에게 들려주자, 송학선은-』

- 사형?

하고 약간 안색을 변하며 재판장을 쳐다보고는 곧 간수에게 끌려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돌아갔다.

(음악)

송학선 의사의 막내 아우되는 송삼학선 씨가 생존해서 월간 신동아에 형님을 회고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 『그때는 내가 열여섯 살 나던 해 봄입니다. 일인경찰들이 우리집에 들이닥치고, 가택수색을 하고 동네에 송학선이가 총독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은 처음엔 믿지 못했습니다.

형님은 누구와 시비를 한다든지 더구나 남을 죽일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형님은 평소에 남한테 싫은 얘기 한마디 않고 지내던 양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외모부터가 순하디 순하게 생겼더랬습니다. 그러나 저만은 대강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 농구상을 그만두고 형님은 북아현동 집 건너방에서 나와 한 이불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때 형님은 바깥출입을 별로 안 하고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뒷산 애기능에 올라가는 일이 많았을 뿐입니다.

그때 나는 사립보인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형님이 없으면 뒷산으로 찾아 올라가곤 했습니다. 이 형님은 뒷산 애기능 잔디 위에서 책을 읽거나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는 뜀박질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형님이 날카로운 비수를 꼬나쥐고 나무 앞에서 찌르는 연습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순하고 어질기만 한 형님. 더구나 몸이 느리고 둔해서 동네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기가 일쑤였던 형님에겐 정말 격이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형님의 칼 쓰는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웠습니다. 형님의 어디에 저런 날쌘 면이 있을까? 놀랐습니다. 집에서 쉬는 때에는 형님은 틈만 있으면 숯돌에다 칼을 갈았습니다.

그 형님이 가지고 있던 비수는 모두 세자룬데 그것을 번갈아서 날카롭게 갈아 쓰는 붕대로 칼날을 감아가지고 미닫이 창틀 위에다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음악)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기까지 하던 송학선. 그러나 그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야심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야심이 그처럼 대담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유광렬 선생은 그 거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음성 녹음)

1897년 광무2년에 가난한 상인 송성진 씨의 장남으로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고 집이 가난해서 서대문관립보통학교 1학년을 다니고 그만두고 어려서부터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점원 노릇을 해야 했던 불우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 그는 이 나라가 일본에 침략당하는 과정을 눈여겨 바라보았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바보처럼 순하던 청년. 남하고 다툴 줄이란 모르고 말이 없던 청년.

이 한국 청년이 서른 살 나던 해에 총독을 찌르고자 칼을 휘둘렀습니다.

송학선. 그의 배후에서 조종한 독립투사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안중근 의사를 존경했던 이 청년은 전혀 혼자의 힘으로 거사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1927년 4월 19일 오후, 경성 복심법원 검사 정원의 입회하에 서대문형무소 사형실에서 비밀리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 창덕궁 앞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체포된 지 채 1년이 못 되는 날에 송학선 의사는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이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의 한국인이 일본침략자들에게 보여준 항거는 당시 나라 잃은 우리 동포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힘을 주어 항일투쟁에 이바지했던 것입니다.

송학선 의사.

(음악)

(입력일 : 201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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