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여덟 번째.
오늘은 양기탁 선생 편을 보내드립니다.
(음악)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우리 신문이 불의와 과감하게 투쟁하는 전통을 이룩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우리 국민을 계몽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한 것이 신문이었습니다. 부패는 물론,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통을 이룩해놓기까지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우리는 초창기 신문인들의 용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신문인,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서 우리는 양기탁이라는 언론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기탁. 일찍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나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해서 유명한 장지연 선생도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지만 양기탁 선생은 철저하게 개인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끊임없이 투쟁한 용기의 사나이였습니다.
양기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에서 언론인으로 출발했습니다.
1905년 8월에 창간된 신문입니다. 유광렬 선생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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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그는 1871년 4월 2일 평양 소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양시영 씨는 서북지방의 유명한 한학자였습니다. 양기탁의 아명은 의정.
어려서부터 총명한 어린이였고 열다섯 살 때는 벌써 그 지방의 수재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895년, 민비가 살해된, 소위 을미사변이 나던 해에 스물다섯 살의 청년 양기탁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북 출신이라는 조건도 있었지마는 그의 뜻이 단순한 벼슬살이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가 파란만장이었듯이 그는 갖가지 일에 심취한 청년이었습니다.
당시의 우국지사들과 접촉해서 나라를 구할 방법을 연구했고, 동학당에도 관계했고 서양문물의 흡수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1897년, 스물일곱 살 난 그는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을 도와주었습니다.
코리언 잉글리시 딕셔너리(Korean English Dictionary), 즉, 게일의 한영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입니다. 그리고 양기탁은 외국문물을 직접 보기 위해서 일본에도 건너갔었습니다. 양기탁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인 베델과 만나서부텁니다.
베델, 한국 이름으로 배설이라 불리우는 영국인은 원래 신문기자로 한국에 취재하러 왔던 사람입니다.
한국의 딱한 처지, 일본의 야비한 침략정책에 분개해서 한국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양기탁과 배설은 인종이 다른 인간이었지만 뜻을 하나로 했습니다.
1904년 8월,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창간했습니다.
뒤에 코리아데일리뉴스로 바꾼 이 신문은 영어로 발행해서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8월에 양기탁과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세력이 우리나라 정부에 뿌리박고 있어서 신문의 검열제도를 까다롭게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정책을 공격하는 기사를 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양기탁과 베델은 그 검열정책을 교묘하게 피하는 수단을 짜낸 것입니다.
- 미스터 베델, 신문의 발행인이 돼주셔야겠소.
- 오, 제가요? 한국어 신문의 발행인이 나, 영국인이 된다는 것은.
- 아니올시다. 미스터 베델. 사전검열제도를 피할려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영국인인 선생이 발행한다면 검열을 안 받고도 신문을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 황제폐하께서 자금은 하사하시겠답니다.
- 오호,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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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영합판회사 발행으로 그 사장은 영국인 베델로 1905년 8월에 발간된 것입니다. 검열 없이 발행하는 신문, 일본의 침략전쟁에 정면으로 항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억눌려지내던 우리 민중은 대한매일신보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습니다.
‘일본경찰의 포악’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인 경찰 관리의 난폭함을 여지없이 폭로했고 ‘한국 내의 일본인’이라는 제목으로 토지 수탈을 일삼는 일본인들의 행위를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초대통감 이등박문이도 감탄해서 얘기한 일이 있습니다.
- 한국 내에서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한국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이등박문, 나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신문의 붓 하나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확증 있는 일본의 여러 가지 나쁜 정책을 반대해서 그칠 새 없이 한국인을 선동하고 있다.
이등박문의 이 부드럽게 표현한 말은 곧,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인들에겐 눈에 가시라는 뜻입니다.
보호조약이 조인됐을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1905년 11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 『칙어 엄정 한국 황제께서는 한국 독립을 중렴하사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칙어로 불윤하셨더라.』
즉, 한국의 황제는 을사보호조약을 결코 인정 안 한다는 기사였습니다.
합법적인 조인이라고 여기던 일본인들은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등박문 이하 침략자들의 보복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발행인 베델에 대한 추방공작을 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베델의 부인이 귀국해서 영국 신문기자와 인터뷰한 기사가 있습니다.
가장 측근에 있었던 부인의 정확한 증언입니다.
- 내 남편은 영국인이고 코가 크며 노랑머리, 눈이 움푹 패인 백인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다고 반대자들이 선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계속 신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인 코크번 씨가 도쿄에 불려갔다 돌아와서 그는 남편을 영사관에 불러다가 영사 재판에 돌렸는데 그때 그들이 주장한 혐의는 남편이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출판물을 발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내 남편에게 변호사를 구하고 손을 쓸 여가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남편의 목을 졸라 그의 사업을 못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본정부 측에서 영국 공사관에 압력을 가해서 베델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양기탁에 대한 탄압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1908년 7월 12일, 양기탁은 체포됐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모집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이란 그 전 해에 경상도 대구의 우국지사 서상돈, 김광재, 두 사람이 부르짖은 것으로 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완용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해온 천삼백만 원을 빨리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서울의 한국인 신문사와 출판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벌렸던 것입니다. 이때,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서를 대한매일신보사에 두기로 해서 양기탁이 그 총무로 일했었습니다.
그것을 트집 삼아 일본 관헌은 양기탁을 체포했습니다.
발행인 베델은 상해에 있는 영국인 형무소로 복역하러 떠났고 양기탁은 한국에서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역시 베델부인의 회상담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 남편이 상해에서 복역하고 돌아왔을 때, 양기탁 씨는 아직 감옥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양기탁을 감옥에서 만났을 때는 아주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인 사람들은 일본인이 잔학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남편이 양기탁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감방에 열아홉 명의 죄수와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 감방은 드럽기 그지 없구 남녀가 한데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카카타의 암흑동굴보다도 더욱 처참한 곳이었습니다.
양기탁 씨는 굶주리고 매 맞아 병들어서 마치 산송장 같았습니다.
참으로 그의 처참한 모습은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양기탁은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의 잔인한 관료들은 양기탁이 옥에서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기탁은 그 체력 또한 정신에 못지않게 강인했었습니다. 영국 공사관을 통해 교섭해서 간신히 출옥을 해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몸이 일어날 만하자 양기탁은 병원을 빠져 나갔습니다. 병원에서 소동이 일어나서 행방을 찾았더니 그는 그 쇠약한 몸을 이끌고 자기의 신문사, 즉 대한매일신보 편집실에 가서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악)
그 초인적인 끈기와 용기의 소유자, 양기탁은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일본의 잔인한 침략정책을 저지하진 못했습니다. 무수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전 후 여섯 차례에 걸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투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한일합방이 되고, 3.1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을 때 그는 편집감독으로 추대됐습니다. 이때, 양기탁 선생에 대한 당시 인상을 유광렬 선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음성 녹음)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치야부화’ 즉, ‘아는가 모르는가’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 글에서도 그의 넘쳐흐르는 정열은 나타나 있습니다.
- 『우리는 약한 계급에 있는 민족으로서 세계 대세에 따라 점차로 두각을 나타내어 정치적 운동이 각 방면에 나타나는 바로, 그러나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사회를 떠나 정치를 논하는 자는 필경 거짓과 어리석음에 빠질 것이니 하등 실리가 없다.』
정치적 운동보다는 우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노력을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유럽의 벨기에를 예로 들어 약소국가가 사회적인 번영을 위해서 노력해서 정치적인 독립을 누리자는 지극히 논리적인 글을 쓰고 있습니다. 3.1운동으로 너무나 큰 희생이 생긴 걸 보고 양기탁은 전면적인 정치운동을 무모한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벌써 50대에 접어든 노년기의 양기탁은 투사적인 기질을 잃었다고 속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투사 양기탁은 늙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이 시간에도 취급한 미국 의원단 내한 때 양기탁은 앞장서서 진정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만주로 탈출, 그의 정열은 계속 불을 뿜었습니다.
만주에서 양기탁 선생을 직접 만나 뵈었다는 김홍일 장군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만주에서 그는 의성단을 결성했고 정의부를 조직해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행동 통일에 힘썼습니다. 1926년에는 상해임시정부로 갔습니다.
그해, 2월 18일에는 임시정부의 제2대 국무령으로 추대됐습니다.
국무령이라면 대통령과 마찬가지의 직책입니다. 그러나 양기탁은 명예욕과는 등을 진 인물이었습니다. 국무령 자리를 사양하고 다시 홀몸으로 투쟁에 나섰습니다. 화흥중학교, 화성의숙, 동명의숙 등을 세워 혁명 간부 양성에 힘을 썼고 전후, 대동민보 등을 발간해서 만주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계몽에 애를 썼습니다. 고려혁명당을 조직했고 독립운동자 후원회를 발기하기도 했습니다. 파란만장의 생애라지만 양기탁이야말로 그런 인물입니다.
말년에는 중국 강소성 표현 고당암에서 선도의 수행을 쌓다가 1938년 4월 20일에 그의 생애를 마쳤으니 향년 68세. 철학교수 신일철 씨는 양기탁 선생의 인간과 업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일본의 압제 하에서 투쟁한 인물도 많고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많습니다.
양기탁. 그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생애를 살다 죽었으나 그의 전기 하나 쓰여진 일이 없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됐으나 그 후손도 찾을 길 없습니다.
일찍이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고자 고초를 무릅쓰고 싸웠고 합병 후에도 계속 투쟁하다가 이억만리에서 숨을 거둔 양기탁.
신문기자로 출발해서 광복군에서 직접 총을 메고 싸우기까지 사생활을 완전히 희생시키면서온갖 고초를 다 이겨냈습니다. 양기탁, 그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싸우는 일로 일생을 마친 한국인입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유광렬, 김홍일, 신일철. 기사낭독 주상현.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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