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일곱 번째.
오늘은 월남 이상재 편을 보내드립니다.
(음악)
(박수 소리)
-으험, 으험, 허.
1926년, 종로청년회관에서 시국강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연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 (마이크 음성 소리)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지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본 얘기부터 하겠소.
길가에서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싸우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생이요 또 한 아이는 소학생인데 그 머리 큰 중학생 녀석이 나이 어린 소학생이 가진 호떡을 뺏어먹는 광경올시다. 그 중학생 녀석은 소학생의 호떡을 뺏어가지고는 별 떡을 만들어준다고 하면서 그 호떡을 조금씩 베어먹습니다.
소학생이 앙탈을 할 수밖에요. 이번엔 그 중학생 놈이 달떡을 만들어주겠다고 살살 꿰더구만요.
또 베어먹기 시작해서는 반달 모양을 만들었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 호떡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 소학생이 하두 어처구니가 없어서 울고만 있습니다.
(박수 소리)
- 중지! 연설 중지!
(음악)
칠순이 넘었으되 정열이 넘쳐흐르고 우스꽝스러운 비유 속에 비수 같은 공격을 담은 연설을 해서 당시의 한국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던 월남 이상재 선생.
한국의 최근사에는 여럿 뛰어난 인물이 있어 항일투쟁이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자랑하지만 월남 이상재 선생이야말로 우리 민중의 지도자로서 길이 기억돼야 할 인물입니다.
선생은 서거하시기 전 당신의 육성을 녹음해두셨습니다.
이 귀한 육성은 일찍이 장례식에서도 틀어서 많은 조객들로 하여금 추모의 정을 더했다고 동아일보에 기록돼있습니다.
(음성 녹음)
당시는 물론, 녹음기술이 아직 서투른 때라 상태가 분명치는 않습니다마는 그 억양이나 언변은 들으신 대로 분별이 되고 있습니다.
연재를 조선청년에게 라고 한 이 음파는 길이가 7분 30초로 돼있습니다.
이어서 언론인 유광렬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 『이상재 선생이 장서하였다. 선생이 가시니 조선은 어디서 의를 찾으며 어디서 스승을 찾으랴. 근자에 선생의 늠름한 얼굴에도 주름살이 잡히고 위엄과 자애를 겸한 광채 있던 눈도 흐리어졌다 할망정 늙은 청년으로 자처하시는 만큼 정신만큼은 새파란 청년이다. 그리 쉬이 가실 줄 뜻도 아니 하였더니 의외로 오늘의 슬픔을 맞이하였도다. 오늘 조선의 용기와 신념이 아쉬운데 그 용기와 신념의 전형인 선생이 가시었도다. 오늘 조선이 의기와 희망에 목말라 하거늘 의기와 희망의 현신인 선생을 잃었도다. 이놈, 너도 나를 두고 먼저 가느냐.
슬하의 아드님을 먼저 보내면서 태연히 말씀하시더니 인제 선생은 우리를 두고 먼저 가시었도다. 바른 말이면 무슨 말이나 누구 앞에서나 직언키를 불사하시더니 이제 누구라서 우리의 의로움을 대변할까.』
1927년 3월 29일. 월남 이상재 선생께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동아일보는 이상과 같은 슬픔을 그 사설로서 쓰고 있습니다.
선생은 영원한 청년으로 자처했고 일본의 압제 하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이 민족의 앞길을 설계했습니다. 물론 자기일신의 영달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하셨습니다.
구한국정부에서 의정부 총무국장이라는 관직을 지냈을 때 축재는커녕 가족의 식생활마저도 위협을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선생의 30년 지기인 유진태 씨가 회고하듯.
- 『선생이 그와 같이 일평생을 재산 한 푼 없이 살았으나 겉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빈한한 사람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낙천적이었던 어른입니다. 음.
재산을 모을려면 비루한 수단은 안 썼어도 자기 일개인 가정은 꾸며나갔을 겝니다.
그러나 생활에 대한 걱정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요새 어찌 지내시느냐고 묻지를 못했습니다.』
선생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청빈한 생활이었습니다. 노년에까지 겨울에도 방에 불을 못 때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선생을 찾아 왔다가 냉방에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돈을 내놓으며
- 선생님, 이 돈으로 불이나 때고 계시죠.
- 고마우이.
때마침 어떤 고학생이 찾아와서 학비가 곤궁함을 호소했습니다.
- 음, 여기 돈 있네. 가지고 가서 공부나 잘하게.
- 고맙습니다, 선생님.
- 선생님, 돈을 학생에게 다 주시면은 나무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또 갖다 주겠지.
(음악)
가난했으되 낙천적이었던 노인, 아니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님이었습니다.
요새와 같은 금전만능시대에서 평가해보면 한낱 옛날선비의 얘기처럼 들리지만은 한 인간의 청빈이란 단순한 얘깃거리로만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좋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집니다.
선생은 일찍이 미국에 외교관으로 가있었고 일본에도 여러 차례 다녀온 분입니다.
금전의 위력, 물질문명의 혜택을 직접 체험한 어른입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간 것입니다. 돈의 유혹을 안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합방 직후에 총독부에서는 내무부장 오자미를 시켜 선생을 유혹한 일이 있습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판을 지키면서 계속 일본인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선생을 찾아온 오자미는
- 오만 원 올시다.
- 오만 원? 그 돈을 날 주는 겐가?
- 예, 이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셔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예이놈!!! 그 돈으로 땅을 사란 말이냐?! 당장 이 자리에서 날더러 죽으라고 하는 소리로구나. 나, 하늘로부터 태어나기를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할 운명이야! 썩 물러가거라!!!
(음악)
단순히 청빈한 생활 이외에도 선생이 남긴 일화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1850년에 태어나서부터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화해가는 과정을 살고 1927년 끝내 한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77년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는 생애였습니다. 1884년 우정국 주사로부터 관직에 들어서기 시작해서 1887년 주 미국공사관 서기관, 1892년 전환국 위원,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우부승지를 거쳐 학무위문참위로 학무국장을 겸임, 1895년 학부참사관, 법부참사관을 지내고 이듬해인 1896년에는 외국어학교 교장, 내각 총서 및 중추원 일등 의관이 되고 계속 의정부 총무국장의 관직을 맡았습니다.
그해,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그 부회장이 됐습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일체 관직을 떠나 황성기독교청년회, 즉 YMCA에 가입해서 청년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일본의 압제에 항거하는 우리 민중의 지도자로서 월남 이상재 선생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청년이었고 비관을 모르는 투사로서 우리 민중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한국미술협회라는 것이 창립됐습니다.
그 창립 회석에는 이등박문을 비롯하여 매국노인 이완용, 송병준 등도 참석했습니다.
선생께서도 참석했는데 공교롭게도 맞은편 자리에 이완용과 송병준이가 앉아있었습니다.
이 두 매국노를 마주보자 선생은 갑자기 비위가 상했습니다.
- 대감네들은 일본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지.
두 매국노는 무슨 뜻인지 모를 수밖에.
-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오?
- 대감들이 망쳐먹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으로 가 사시면 일본도 곧 망할 것 아니오?
(음악)
한일합방 뒤에 일본에서는 대인사들 중에 유명한 사람을 골라 한국시찰단을 조직해서 우리나라에 와서 각계명사들을 만나 일본 선전을 할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황천호랑이라는 자가 선생을 만났습니다.
- 한일합병 뒤에 선생의 소감이 어떻습니까?
- 좋소이다.
- 네? 어째서 좋습니까?
- 덮어놓고 좋소이다.
- 한일합병이 좋으시다면 까닭이 있을 거 아닙니까?
- 당신네들이 내가 좋지 못하다고 하면 한일합병을 취소하시겠수? 그럴 바에야 내 속에 있는 말을 할 필요가 있수. 당신네들은 덮어놓고 좋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 아니오?
(음악)
3.1운동 다음에 일본에서는 천재적인 정치가라는 미기행웅이 우리나라 시찰을 온 적이 있었습니다.
미기는 선생을 만나 얘기했습니다.
- 일본과 조선은 마치 부부와 같은데 남편이 설사 조금 잘못한다 해서 아내가 들고 일어나서야 됩니까?
물론 미기의 이 말은 3.1운동을 비난하는 뜻이었습니다.
월남 선생은 대답했습니다.
- 그렇죠. 그러나 정당한 부부간이 아니고 만일 강제로 업혀간 억지 부부라면 어떻겠소?
(음악)
선생의 날카로운 독설 그리고 유모어는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의에 빠진 당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위트 있는 농담을 항상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농담 하나하나에 뼈가 들어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현재 YMCA의 총무로 월남 선생의 뒤를 잇고 있는 전택부의 씨의 말을 들어봅시다.
(음성 녹음)
(음악)
일신은 가난 속에 살면서도 나라 잃은 우리 민중에게 용기를 주다가 77살을 일기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1927년, 나라 없는 민중은 사회장을 모셨습니다.
- 『연도에 인산인해, 아침부터 시민 중 조의를 표하고자 하는 남녀노소 군중들은 경운동 천도교회를 중심으로 그 근방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 근방을 비롯하야 낙원동, 경운동 일대와 종로 2리 삼종목과 남대문 통 일종목으로터 동 오종목과 경성역 부근에 이르는 장의 행렬이 통과하는 연도에는 오전 11시경부터 실로 사람이 성을 쌓아서 마침 작년 이맘때 국장 당일과 같은 대혼란을 이루었었다더라.』
(음악)
나라 잃은 민중의 지도자, 아니 민중의 벗이었던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은 그렇게 호화스러웠습니다. 수백 개의 조기와 만장이 열을 지었고 행렬은 삼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6일까지 들어온 조의금 집계가 오천 칠백 육십 육 원이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청빈한 생활, 노년에도 나무가 없어 방에 불을 못 때고 사시던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한 재산이 될 금액, 오천여 원이 조의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 『전 민족적으로 선생의 부음에 울고 선생의 영결에 곡하였으며 남녀 수천만이 선생의 영구 옆에 슬퍼하던 것은 그 인격에 대하는 인정의 소치인 것은 물론이지만은 다른 인종이나 국민이 가지는 정서에서는 얻어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으로 그 현장에서 애도하는 것은 이에 조선인 심정의 일단이요 사회의식의 발현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음악)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어느 날, 월남 이상재 선생에게 동년배 되는 노인이 충고했습니다.
- 하아, 여보게. 젊은 사람들한테 너무 실없이 굴면 버릇이 없어지지 않겠나?
- 허허, 여보게. 내가 청년이 돼야지. 그럼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있나?
(음악)
청년 이상재. 칠순이 넘은 나이로 청년들과 어울려 농담할 수 있었던 월남 이상재.
일본 치하의 답답하고 우울한 시기에 이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중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훌륭히 했습니다. 개인의 영화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증거를 사생활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일본인들 앞에서도 바른 말을 주저 없이 했습니다.
자기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하고 싶은 얘기도 못하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지도층 인사들과는 전혀 다른 용기 있는 인간상이었습니다.
올바르게 얘기하고 올바르게 행동했던 최후의 한국인이라고 이상재 선생을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들 유광렬, 전택부, 신일철. 기사낭독 주상현.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입력일 : 201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