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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신문의 전통
제1부: 근세의 표정
신문의 전통
1969.04.13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여섯 번째.

오늘은 신문의 전통 편입니다.

(음악)

1896년,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4월 7일에 독립신문이 창간됐습니다.

-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날 처음으로 출판한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쌈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 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야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랴 함.』

편벽되지 않겠다는 것을 첫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른바 엄정중립 내지 공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상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전체 민중을 위하여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훗날 회고했듯이.

- 독립신문의 사신은 두 가지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즉, 공정한 언론, 그리고 민리민복을 위한 언론. 공정과 민리민복 두 가지야말로 내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목적인 것입니다.

(음악)

그리고 1920년 4월 1일에 창간한 동아일보는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산정 수려하여 초목 창성하며 백화 난발하여 연비 어약하니 만물 사이에 생명과 광영이 충만하도다. 이 명문으로 서두를 장식한 창간사에서

- 『일.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적 전체로 본 이천 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한 즉, 그에 의사와 이상과 기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기를 기하노라.

이. 민주주의를 취지하노라. 이는 단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곧 인류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함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의무를 주장함이라.

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준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쉼은 오묘라.』

동아일보도 소수특권계급이 아닌 전체로 본 이천 만 민중의 기관임을 내세웠습니다.

(음악)

그리고 1969년, 4월 7일. 신문의 날에 신문인협의회가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 『신문이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 편견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고 공공의 이익에 위배되는 개인의 이익이나 무가치 또는 부도덕한 목적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은 부동의 원칙이다.』

신문의 자유를 신문주간에 표어로 내건 1969년의 이 선언문은 계속해서-

- 『 어떤 일당 일파에도 예종함이 없이 인류와 국가,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염원하는 스스로의 판단에 입각하여 정확한 보도와 공정한 평론을 기약함이 신문의 자주요 독립이요 자유요. 바로 이것이 신문의 사명이고 책임이고 윤리라고 보아야 한다. 』

어떤 일당 일파에도 예속되거나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이 신문의 정신. 그것은 1896년, 독립신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지켜 내려온 이 나라 신문의 정신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 나라 신문은 그들에게 예종되지 않았었습니다. 전체로서의 민중의 것이 바로 신문이라는 정신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치하에서도 이 정권의 독재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항거한 가장 큰 세력이 신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신문의 공신력은 대단합니다. 신문기사라면 우리 민중은 곧 진실로 받아들이는데 버릇이 돼버렸습니다. 그만큼 한국 신문의 역사가 공명정대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음악)

- 『해방 전의 민족 신문은 단순히 신문만을 파는 데가 아니오. 민중을 계몽하고 언론을 창달해서 일제에 항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신문을 내게 된 것이었다.』

언론계의 원로 김을한 씨가 일제시대 신문을 회상하는 글입니다.

- 『 다시 말하면 정치운동이나 독립운동을 드러내놓고 할 수가 없으므로 합법적으로 신문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하려고 한 것이니 일면타협, 일면항쟁이라는 말은 그 때문에 생긴 표어였던 것이다.』

일제시대 신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문은 한국의 독립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혹심한 보도관제와 뉴스원의 봉쇄를 맡으면서도 독립운동의 관한 기사보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해방 전의 신문을 펼치면 어느 면이고 한국의 독립과 관계되지 않은 기사는 없습니다. 총독부 관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표현을 돌려서 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항거 정신을 나타냈습니다.

신문은 민족의 독립을 그 목적으로 했습니다. 민중을 계몽하고 혹은 선동해서 나라의 독립을 고취하는 데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1921년 10월, 동아일보가 창간된 지 일 년 남짓밖에 안 되었을 시절입니다. 그 당시 하와이에서는 만국기자대회가 열렸습니다.

만국기자대회. 즉, 세계신문기자대회입니다. 1921년 10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 톱.

- 『본사 대표 김동성. 부회장에 당선.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에서 조선 경성에 있는 동아일보 대표자 김동성 씨는 방금 하와이에서 개회중인 만국기자대회에서 부회장에 선거되었드라. 20일 호놀룰루 특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서 동아일보에서 파견한 대표 김동성 씨가 부회장으로 당선됐다는 소식. 국가의 지휘가 제법 향상된 오늘날의 한국인으로서도 차지하기 힘든 대회 부회장.

나라도 없던 때, 그리고 커리어라면 세계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땝니다.

그 당시 세계기자대회에서 한국인이 하여간에 대회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약소민족의 비애 속에 살던 한국인들은 누구나 한번쯤 흥분했을 큰 소식이었습니다.

만국기자대회에서 한국인이 참가했다는 사실부터가 놀랄 만한 일입니다.

만국기자대회에서 김동성 씨가 부회장으로 당선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신문인들이 한국의 신문을 인정해주었다고 흥분하기 전에 우선 그 경위를 자세히 들어봅시다.

당시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던 김동성 씨는 현재 생존해 계십니다.

우선 김동성 씨의 얘기는 미국 의원단이 내한했을 때의 얘기가 매개가 되겠습니다.

(음성 녹음)

들으신 바와 같이 동아일보 대표로서 김동성 씨는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쟁쟁한 신문기자들 틈에 끼어 부회장으로 당선되기까지 했습니다. 그 부회장 자리는 참가한 모든 나라 대표에게하나씩 돌아간 명예입니다. 동아일보는 그 사실을 물론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수 2명이 참가한 뜀박질 경주에서 2등을 한 거랑 뭐가 다르냐고 꼬집기 전에 우리는 당시 한국 신문인들의 정열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계로의 진출을 모색했다는 정열과 거기서의 대화를 통해 한국인의 처지를 호소한 정열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정열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민중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었는가.

김동성 씨가 귀국할 때 부산으로부터 각 역마다 환영객들이 붐볐고, 동아일보는 사고로서 그 환영에 감사한다는 글을 싣고 있을 정돕니다. 어떤 의미로든가 일제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한국 민중에게 용기를 준 한국 신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이 만국기자대횝니다.

(음악)

해방 전의 신문기자는 일반 회사원과는 달랐습니다. 신문 경영 자체가 기업화보다 문화기관으로서의 출혈을 불사했지마는 거기 종사하는 기자들은 직업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신문기자라면 일반 회사원이라는 생각은 안 들 만큼 일제시대의 신문기자는 자부심 강한 지사였습니다. 오랜 신문기자 생활을 거친 원로급 인사들이 회고합니다.

유광렬 씨와 최은희 여삽니다.

(음성 녹음)

(음악)

두 시민이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 내가 옳아!

- 아니야. 내가 옳아!

- 내가 옳아, 아니야!

- 아니래두!

- 이이이이...! 참! 신문에 났단 말야!

- 어? 신문에?

- 이이이이, 봐. 이 신문!

- 엣, 니 말이 맞구나.

이런 풍경은 흔합니다. 물론 활자의 공신력이라는 것이 있어서겠지마는 그보다도 이 나라에서는 신문에 났다 하는 자체가 진실과 같이 여겨집니다.

독립신문 이래 민족 신문이 온갖 고초 속에서도 이룩해놓은 전통인 것입니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일찍이 미국의 제퍼슨이 말했지만은 일제 치하 한국인들은 우리의 정부가 없는 속에서도 믿음직한

신문이 있었기에 용기를 잃지 않고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독립신문을 기점으로 해서 계산된 한국 신문의 역사는 이제 겨우 73년.

100년도 못되는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신문은 갖가지 창연한 업적을 남겼고 그 업적보다 더 위대한 전통을 세웠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할 수 있는 힘. 그 힘 하나만도 한국 신문이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전통인 것입니다.

독립이 되고 소위 근대화를 당면과제로 삼는 풍조 속에서 신문도 근대화를 하는 것일까. 오늘날 신문은 기업화하기 시작했고 신문기자는 하나의 샐러리맨으로 돼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숙명적인 적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 정책 속에서도 신문은 기업화하지 않았고 온갖 출혈을 하면서도 신문을 발행했고 그것을 자랑으로 알았으며 민중도 그 갸륵한 뜻에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었습니다.

그 당시의 신문을 가리켜, 그리고 신문기자를 가리켜 타락을 운운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대화 과정에 수반되는 도의적 타락이 아무리 필연적이라고 하겠지마는 온갖 탄압 아래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한국 신문의 전통만은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한두 사람의 염원만은 아닐 것입니다. 일찍이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창간하면서 실천했던 신문의 공정성. 그리고 신문은 민리민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음미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음악)

말씀해주신 분 김동성, 유광렬, 최은희, 신일철. 기사낭독 주상현.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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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오늘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신문의 전통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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