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네 번째. 오늘은 관동진재와 한국인 학살 첫 번째 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립니다.
(음악)
(폭발 소리)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지옥 같은 아비규환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관동대진재’. 땅이 흔들리고 집이 무너지고 건물마다 불이 번져 불바다를 이루고 9월 1일은 일본에서 보통 니야꾸도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입추날로부터 이백 열흘째 되는 날로서 이날은 매우 불길한 날이라는 미신이 있습니다. 니야꾸도카의 미신이 진실로 증명되는 것인가.
이날, 오전 11시 58분. 정오 사이렌이 불기 꼭 2분 전에 도쿄 일대에는 진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동은 급격히 높아져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폭발 소리 및 비행기 소리)
지진이 흔한 일본에서도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었고 그만큼 피해가 컸습니다.
『이번 동경진재로 인하야 소실된 피해 가옥과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 기타는 다음과 같이 판명되얐다.
소실 가옥, 이십구만 사백십 오 호. 도게 가옥, 삼만 육천 백오십 팔 호. 사망자, 이십 이만 천 이 백팔 명.
행방불명, 칠만 이천 육백 일 명. 중상자, 천 백이십 오 명. 경상자, 이만 팔천 사백 팔십 명. 』
발표된 숫자만 보아도 그 피해규모는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타격은 이토록 거창할 수 있다는 증겁니다. 장마나 폭설, 해일 등과 마찬가지로 지진은 거대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피햅니다. 명치유신 이래 번영을 누려온 일본의 운명이 지진이라는 자연현상에 의해 한때 고스란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자연의 힘, 그것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일 수가 있습니다.
사망자만 이십 이만여 명. 도쿄 시내의 4분의 3, 요코하마의 5분의 4가 잿더미로 변한 이 천재지변.
관동대지진은 일본이 겪은 가장 큰 천재지변으로 역사에 기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은 한국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차지합니다. 한국인이 겪은 가장 비극적인 기록의 하나로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및 고함)
- 조센진이 폭동을 일으킨다!
- 조센진이 약탈 파괴한다!
- 조센진 잡아라!!
(음악)
지진으로 아비규환을 이룬 도쿄와 요코하마 거리. 일본인 재항군인과 청년들로 조직된 소위 자경단원이라는 무리가 거리거리에 떼를 지어 조센진, 즉 한국인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약 십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무지한 노동자들,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농토를 잃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건너가 살던 사람들, 그 한국인들이 일본인 자경단원에 의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음악)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겪고 또 목격한 최승만 옹의 회고담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당시에 확인된 숫자만 이천 육백 십삽 명. 줄잡아서 추산해도 오천 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오천 명의 동포가 일본인들에 의해 길거리에서 목을 잘렸고 대나무 창으로 찔려 죽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지진이 난 다음날부터 호외를 발행하고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관동대지진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사건이었습니다.
『동경시가 거의 전소. 화염 궁성에 연소되야 위험중. 텅빈 시가 화염충천. 사망자는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다고.
사상 최유의 세계적 천변지요. 삽시간에 소진된 동경 전 시. 제13, 14, 15사단 동원령.』
기사 제목만 훑어봐도 알 수 있듯이 동아일보는 지진의 피해상황만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혼란된 그 일대에서 자행되고 있는 학살. 자연의 힘이 아닌, 일본인들의 손에 죽어가는 동포들의 참상을 전혀 보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취재기자였던 유광렬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의 활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음성 녹음)
일본정부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체의 신문보도를 관제했습니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퍼트린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일반에게 공고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안창남 씨의 귀국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지난주 이 시간에 취급한 비행사 안창남은 관동지진을 몸소 겪었고 한때는 죽었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귀국한 경험담을 기자에게 얘기했고 기자는 조심스러운 문투로 내용을 썼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안등창남이라고 행세를 했지만은 위험은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어느 젊은 일본 여자올시다. 그는 나와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곳까지 같이 온 ‘죽전’이라는 일본인의 아내인데 내가 조선 사람인 것도 알고 살아날 도리가 없는 것을 동정을 해줬습니다. 』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 조센진이 이 중에 있거든 고발하시오! 조센진은 있냐!
- 안 선생님, 저와 같이 가십시다. 제 남편은 일본인이니까 상관없잖아요.
안 선생님, 저와 같이 부부처럼 차리고 가십시다.
-『나는 고맙다고 할 정신도 없이 일본 상인처럼 변장을 한 후 그 부인과 가방을 같이 들고 정거장까지 무사히 걸어가서 풍천에서 기차를 타고 군민현 전교시에 사는 죽전 씨의 형님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거의 3주일 동안 있으면서도 그 주인에게까지 내가 조선 사람인 것을 알리지 않고 지냈습니다.』
비행사 안창남까지도 이런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면 일본말이 서툰 한국인 노동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당장에 한국인임이 드러나고 그러면 미치광이 같은 자경단원들에게 살해됐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그러면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을 만난 곳에서 애매한 한국인들은 그토록 잔혹하게 죽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유언비어에 흥분됐기 때문이라고 우선 생각됩니다.
10월 17일자 동아일보.
『경시청의 간부들은 여출일구로 조선인 폭동설은 신내촌년에서 굴러온 말이라고만 하고 일체를 비밀에 붙이나 유력한 방면으로 탐지한 바에 의하면 그 풍설의 근원은 신내촌년 고진 서장이 진재 위문을 겸하야 자기 관내의 피해상황도 보고할 차로 경찰부에 출두하야 볼일을 마치고
오후에 돌아가는 길에 학견 부근에서 몇 사람의 조선인이 굶주림에 몰려 먹을 것을 절취하다가 그곳 청년 단원에게 들켜 묶여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와 거의 동시에 동경 어떤 신문사의 자동차가 횡빈으로부터 동경으로 들어가는 길에 역시 학견 부근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어린 아이를 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달려와서 ‘지금 학견 방면에서 조선인의 폭동이 일어나서 죽을 지경이니 나 좀 살려주오.’하며 자동차에 매달렸다는 소문을 견기고진 서장이 들은지라 그러면 조선인 폭동이 사실이라고 믿은 동 서장은 경찰서에 들어가는 즉시로 서원을 소집하야 무슨 훈시를 하얐다. 서원들은 비상히 놀라서 모다 자기집에서 창과 죽창, 일봉, 칼들을 경찰서에 모아놓고 방어준비에 착수한 것을 부근의 인민들이 보고 경찰서에서 저러할 때에는 정말 조선인들이 쳐들온다고 떠들기
시작한 것이 도화선이 되야서 돌연히 근본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이 틀림없는 모양 같다.』
조선인들이 먼저 폭동을 일으키고 약탈, 방화한다는 유언비어가 일본인들을 흥분시켰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당시 일본에 통틀어 십만 밖에 안 되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일본땅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인가. 그것도 대부분이 호구지책에 급급한 노동자들입니다.
지진이라는 급격한 사태 때문에 모든 일본인들이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공포증입니다.
일본인 국회의원 영정유태랑이 국회에서 내각에 대해 질문한 기록이 있습니다.
- (마이크 음성 소리) 일본인은 까닭 없이 조선인을 죽일 잔인무도한 국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상사를 일으킨 것은 정부 내의 일부 관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인은 단정합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여태까지 해오던 그릇된 정책의 반동이 언젠가 나타날까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과장된 허위사실을 정부 스스로가 만들어내서 발표한 것이 이번 불상사의 근본원인이 아닙니까!
- 옳소!! 옳소! 옳소!
(사람들의 박수 소리 및 함성)
일본 정부 내에 일부 관리가 조작했고 조정했다는 영정유태랑 의원의 연설에 의원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9월에 새 내각이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진으로 인하여 새 내각의 취임식이 늦어졌으므로 구 내각에서 계속 정권을 맡고 있었습니다. 구 내각의 내무대신은 미즈노 멘따로. 관동진재 직후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바로 미즈노 내무대신이었습니다. 미즈노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인물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악명이 높은 정무총감이었고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의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미즈노는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인 9월 2일은 바로 4년 전, 남대문 역대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을 맞은 그날입니다.
이 미즈노가 내무대신으로서 마지막 정책을 편 것이 관동대진재 수습이었던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흥분한 대중을 진압하기보다 오히려 선동했다는 증거는 앞서 소개한 영정 의원이 그 국회 질의에서 제시했습니다.
- (마이크 음성 소리)나는 대진재 직후 내무성이 각 처 지방장관에게 보낸 전보문을 여기 복사해 가지고 왔습니다.
9월 3일 오전 5시 30분 발신자, 내무성 경고 국장. 수신자, 조선총독부. 전문,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재일조선인들은 방화, 폭탄 투척 기타 불온성을 행코도 하고 있음. 에, 내무성 경고 국장은 명백하게 조선인들의 방화, 폭탄 투척 등 불온성을 행하려 한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악)
철학교수 신일철 씨.
(음성 녹음)
(음악)
지진이 일어난 원인까지는 한국인에게 못 돌렸지만은 지진 뒤에 일어난 여러 화재나 폭발의 원인을
한국인에게 돌려서 피의 복수를 감행한 대학살사건. 그것이 일본 민중 자체 내의 흥분에서 야기됐던
정부 내의 간교한 관리들이 조종했던 간에 오천여 명의 무고한 한국인들은 칼에 찔리고 혹은
대나무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음악)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가장 처절한 사건 중의 하납니다. 관동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사건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도 계속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체험자들의 보다 생생한 기록을 엮어서 방송해드리겠습니다.
(음악)
자료를 주신 분 최승만. 나오신 분 유광렬, 신일철. 기사 낭독 주상현.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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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오늘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관동진재와 한국인 학살 편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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