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안창남-모국방문 비행
제1부: 근세의 표정
안창남-모국방문 비행
1969.03.23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스물세 번째. 오늘은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립니다.

(음악)

『금일, 안창남 군 고국방문 대비행. 삼회에 분한 금강호에 장기. 환하라. 이 역사적 초유의 광경을.』

1922년 12월 10일은 이 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방문기념 비행을 한 날입니다.

한국의 창공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비행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오늘은 10일이다. 삼십만 경성 시민이 손을 꼽아 기다리던 조선 비행가 안창남 군이 경성의 하늘에서 나를 날이다. 미국 비행가 스미스와 이태리 비행가 말셀로와 여러 일본 비행가들을 맞을 때마다 우리 조선 사람도 언제나 한번 저렇게 날라 보나 하던 가슴에 사무치는 섭섭함을 마음껏 풀어보는 날이 오늘이오. 조선 사람도 하면 된다는 굳세인 믿음과 넘치는 기쁨으로 우리의 앞길을 축복하는 만세를 불러볼 날도 오늘이다. 우리는 과연 이날을 기다리기가 일각이 삼추같이 급하여서 기다리던 날이 이제야 왔다. 안 군의 비행하는 재주는 이미 외국에 정평이 있는 터이라 그의 하늘을 놀래고 귀신을 울리는 재주는 응당 수십만 관중의 피를 뛰게 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할 터이다.』

(음악)

비행사 안창남. 당시 스물세 살밖에 안 난 이 청년에게 보내는 전 한국인의 성원은 그렇게 대단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의 상공을 나른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22년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후진성을 너무나 통탄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라는 하늘을 날으는 기계가 있으되, 모두가 외국인들만이 나르는 것.

그런데 안창남이라는 스물세 살 난 한국청년이 한국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속 시원히 풀어주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사사건건이 눌려 지내던 당시의 이천 만 동포의 감격은 어떠했겠습니까?

(음악)

비행에 앞서 귀국한 안창남은 동아일보에 동포들에게 보내는 인사를 썼습니다.

- 『정 깊은 고국에서 형제와 함께 지내지 못하고 이억 타관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애달픈 심정이야 누구나 더하고 덜함이 있겠습니까마는 그중에도 남달리 고독히 지내는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본의 공중을 날라 다닐 때마다 멀리 서편 하늘을 바라보고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하늘을 날라 볼까 하야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으며 지샜습니다. 내 고국, 이렇게 생각할 뿐만으로 벌써 가슴을 뛰놀리던 내 고국에 돌아오게 된 기쁨은 참으로 어떻게 말할 수 없이 어떻게 자랑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더구나 부산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남대문에 도착하기까지 정과 뜻을 다하여 맞아주시는 여러분을 봬올 때, 또 여러분이 불러주시는 만세소리를 들을 때 내 몸에는 소름이 쪽쪽 끼치고 아지 못할 눈물까지 핑 돌았습니다. 형제의 정리, 동포의 정리.

무엇보다도 강하고 뜨거운 그것이 내 몸을 못 견디게까지, 소름이 끼치게까지 내 몸과 내 혼을 에워쌀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먼, 먼 곳에 외롭게 방황하던 어린 고아가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다시 안기는 것과 같은 생각과 느낌밖에 아무것도, 전부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음악)

안창남은 당시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모국방문 비행을 하러 귀국했을 때 우리의 전 민족은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습니다. 20대 초기의 한 청년이 이토록 전 민족의 열광을 불러일으킨 예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안창남은 어떠한 청년이었을까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음력 정월 스무 아흐렛날, 서울 서북촌 평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안상준 씨. 구한국시대에 의관을 다녔으므로 근처에서는 안 의관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40이 넘을 때까지 아들이 없던 집안에 외아들로서 창남은 태어났습니다.

(비오는 소리)

- 『제가 네 살 나던 해 여름입니다. 장마철이라 비가 계속 내리던 기억이 납니다. 병환으로 내내 누워계시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비오는 소리)

- 아아, 창남아. 어린 널 두고 이 애미가 어떻게-- 창남아. 아아... 창남아.

- 어, 엄니!!! 이힝!

(비오는 소리 및 천둥소리)

- 『빗소리,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부르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기억납니다.』

(음악)

일찍이 어머니를 여윈 창남은 네 살 위인 누나와 함께 계모 밑에서 고생을 하며 자라났습니다.

그때 스물다섯 살 난 계모 최씨는 전처소생인 창남의 남매를 몹시 학대했습니다.

- 『여덟 살 때 저는 미동국립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집안의 재산이 아직 많고 해서 가난은 몰랐는데도 저는 제때 밥을 못 얻어먹었습니다. 새 어머님께선 성질이 괴팍하신 분이었습니다. 제때 밥도 안 주셨고 겨울에도 솜옷 하나 변변히 지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누나와 저는 둘이 붙들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학교는 열심히 나갔습니다.

전 어려서부터 장난이 심했고 남보다 뜀박질도 잘했습니다. 제가 열한 살 나던 햅니다.』

(비행기 소리)

- 『모 외국인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서울 하늘을 돌아다니니 온 장안 사람들이 꿈인지 생신지 모르고 외국 사람들의 기술에 탄복을 하더군요.』

- 야, 외국인들은 귀신이로구나. 귀신!

- 하늘이 다 놀라겠어.

- 『어린 저는 괜한 오기가 생겼습니다.』

- 저 까짓 거 우리 조선 사람도 배우면 비행기 탈 수 있어.

- 어?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큰 소리냐?!

- 배우면 되는 거야.

-어, 헤헤, 창남이 자식.

(웃는 소리)

- 『친구들은 비웃었지만 저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우리라고 배워서 안 될 게 있습니까?』

(음악)

열한 살 난 소년이 외친 말. ‘배우면 우리도 날을 수 있다.’ 안창남은 미동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서로 의지하던 누님이 그해 천안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그 이듬해 부친 안 의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새어머니 최씨에게도 그때 아들이 있었으므로 재산을 움켜쥐고 안창남에겐 한 푼도 줄려들지 않았습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도 학비 때문에

그만둬야 했습니다.

- 『제가 열아홉 살 나던 해, 기미년에 만세가 일어났습니다.』

(음악)

- 『저는 우렁찬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못 이뤘습니다. 나도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적수공권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그때 마침 집을 판 돈 3000원을 계모가 손그릇에 넣어둔 것을 알았습니다. 전 그 돈 3000원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륙 수천 리 길을 떠나 일본 대판으로 갔습니다. 』

(음악)

당시 집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청소년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대개가 방탕에 흐르거나 남에게 속아서 그 돈을 탕진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달랐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자동차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자동차운전수도 굉장히 화려하고 인기 있던 시절입니다. 안창남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동경으로 가서 비행기제작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율비행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의 재능은 비행기학교에서 발휘됐습니다. 3개월 만에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곧 그 학교 교수로 임명됐습니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동경 대판 간의 우편비행을 탁월한 기술로 성공시켜서 일본에서도 일류비행사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그리하여 동아일보사 주최로 안창남 고국방문기념 비행대회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1922년 12월, 고국에서는 일류명사들이 총동원된 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남을 맞이했습니다. 스물세 살의 청년. 그러나 당시 전 한국인의 긍지를 높여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 안창남. 자기소유의 비행기가 없는 안창남은 소율비행학교 소유 비행기 한 대를 빌려가지고

귀국한 것입니다.

- 『이 비행기는 뉴폴식인데 보시다시피 다른 비행기의 크기의 반밖에 안 되는 작은 비행기입니다.

팔십 마력에 한 시간 일백 팔십 비행 마일의 속력을 가진 것이라 너무 기계가 경쾌해서 조종하기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이라 다른 이는 별로 타지 않던 것이므로 비교적 쉽게 빌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원래 헌 비행기라 발동기는 또 다른 헌 비행기의 것을 떼내서 여기다 뜯어 맞춘 것이어서 다소 불안은 떠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안창남은 이천만 동포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낡은 비행기로서도 비행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12월 10일.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오만여 명의 관중이 여의도를 중심으로 안창남의 비행을 구경하려 모여들었습니다. 이 많은 관중을 위해 특별열차까지 동원했고 서울과 그 근교는 하나의 큰 행사 날처럼 붐볐습니다. 당시 취재기자였던 유광렬 씨가 회고하십니다.

(음성 녹음)

『기다리던 날이 왔다. 여의도 넓으나 넓은 마당은 만여 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불행히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어 공중은 고사하고 평지에서도 넓은 벌판에서 몰아오는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 이로 정신을 차릴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안창남 군을 만류하야 바람이 적이 자기를 기다렸으나 바람은 용히 그치지 아니하고 수만 군중을 찬바람을 쏘이며 기다리었다. 12시가 되메--』

(바람 소리)

-『이와 같이 추운 날, 수만의 동포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순 없어. 비행기를 꺼내시오.』

『그러나 날이 너무 춥기 때문에 기계운전에 사용하는 까스톨이라는 기름이 얼어서 프로펠러가 돌지 아니하야 여러 기사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힘을 들인 결과, 12시 22분경부터 기계가 돌기 시작하야--』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웅장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이며 비행기는 서서히 뜨기 시작하야 12시 25분경에 누르고 푸른 점이 섞여 박히고 양편으로 거룩한 조선 지도를 그린 금강호는 드높은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비행기 소리)

(사람들의 환호성)

『안창남 군은 차차 높이 떠서 일천 미터 이상의 높이로 뜨니 하늘에는 상쾌한 소리만 은은히 비행기는 아물아물하게 떠서 한강을 지나 남산 가오로 동대문 편으로 돌아 창덕궁에 예를 하고 경성 시내를 한 번 돈 후 비행기는 공중에서 기울어 떨어지는 나무 잎새같이 세로 팽팽 돌아 안 군의 독특한 재주를 보이니 관중은 꿈인 듯 취한 듯 박수갈채가 천지를 진동하얐다.

이어서 비행기가 거꾸로 내려박히다가 다시 두어 번 가로 재주를 넘으메 관중은 그의 신묘한 재주에 너무 감격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환호하얐다. 비행기는 다시 가던 길을 고치어 동편으로부터 서편으로 손에 잡힐 듯이 낮게 떠서 부인석 있는 편으로 내려닥치니 일반관중이 비행기에 치이지 아니할까 의심할 만 하얐다. 비행기는 일반 내빈과 부인석에 머리를 스치며 남쪽으로 서있는 학생들의 머리를 가볍게 지나서 12시 40분에 비행을 마치고 서서히 내리니 학생의 환영깃발이 수없이 번뜩이며 갈채가 성대하얐더라.』

(음악)

우리 동포 안창남 군의 손으로 조종되는 비행기가 우리의 하늘을 날랐을 때 당시의 민중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동아일보는 사설로서 그 감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높은 벽공에 은은히 폭성을 발하면서 바람을 뚫고 혹은 좌로 혹은 우로 혹은 낮게 혹은 높이 떠도는 흑점이 우리형제 안창남 군이 조종하는 비행기의 모습임을 보며 혹은 만세를 외치고 혹은 안 군을 부르고 각종의 감탄사를 발하며 길가를 뛰는 자도 있으며 혹은 하늘을 가르치며 목 메이는 자가 있어 경성 시내와 여의도 일원은 물론하고 수만 관중이 취한 듯 미친 듯 환호성을 지르는 중에 일말의 감개와 감격의 눈물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름을 금치 못하겠으니. 보라, 그 묘기는 참으로 묘기로다. 아, 오만의 관중은 형제의 비행 성공을 보고 기뻐 눈물을 흘리는 도다.

형제가 형제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으면 누가 기뻐하리오. 조선인이 오늘날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처한 것이 형제의 성공을 축복하야 도와줄 줄 모른 까닭이며 형제의 성공을 보고 열광하는 애정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번 형제들의 열광을 보면서 바라건대 이 열광이 일시에 그치지 말고 영원히 계속하야 만사에 형제를 돕고 민족적 사업에 총력을 합할지어다.』

(음악)

철학교수 신일철 씨.

(음성녹음)

(음악)

1922년 12월 10일. 스물세 살의 청년. 그러나 이 나라 최초의 비행사로써 이 나라 창공을 나는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은 전 민족의 환호성 속에 성공했습니다. 과학기술의 후진성을 통감했던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기계인 비행기 조종을 우리 형제가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민족에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열한 살 나던 안창남이 외국인의 비행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배우면 할 수 있어.』

이렇게 외치던 당돌한 소년이 12년 만에 그토록 벅찬 감격을 전 민족에게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젊은이의 야심과 노력이 위대한 결실을 맺는 예로서 우리는 비행사 안창남을 길이 기억하고 자라나는 후세에 얘기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음악)

나오신 분 유광렬, 신일철. 기사낭독 주상현, 안창남 이완호, 해설 김영배, 음악 김종삼.

(광고)

(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오늘은 제1부 근세의 표정에서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3.04)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