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 피아노 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 1부 근세의 표정. 물산장려회운동 오늘은 그 상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물산장려. 금일 부터 실행. 2000만 민중의 일치단결로 성취할 자활운동.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1923년 2월 16일. 구정으로 정월 초하루가 되는 날에 동아일보 3면에는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글자로 물산장려 운동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산장려운동. 3.1 운동이 일본인에 대한 전 국민적인 운동이었고, 그밖에도 조직적이거나 산발적이거나 일본에 대한 항쟁은 끝임없었으나, 1923년에 나타난 이 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 못지않은 범 국민적 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이 정치적인 항쟁이었다면은 3.1운동 3년 뒤에 일어난 이 물산장려운동은 경제적인 항쟁이었습니다.
경제적인 항일운동 단도직입적으로 정권을 달라고 외친 정치운동에 비해 이 경제적인 운동이야말로 항일운동이 근대화한 형태입니다. 물산장려운동.
『 물산장려 취지, 우리에겐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의지하여 살 곳이 없으면 우리의 생활은 파괴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기대할 수가 있으며, 또 참으로 사람다운 발전을 향할 수가 있으리오. 우리 생활의 제일 조건은 곧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적 기초이다. 이 산업적 기초가 파멸을 당하여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으면, 그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사람으로 사람다운 생활을 못하고 사람다운 발전을 하지 못할 것을 당연하지 아니한가. 여러가지로 통계를 들지 아니하니거와 우리의 입은 옷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먹는 음식을 스스로 살펴보고, 또 우리의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돌아보라. 기중에 어느 것이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산출한 것인가. 그 모든 것은 전부 남이 지어놓은 것을 우리의 집을 팔고, 땅을 팔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의 몸뚱이를 팔아서 사다놓은 것이 아니며, 사다 쓰는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우리가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을 집과 땅과 또 몸뚱이까지 팔아서 남의 손에 공급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강산에 집을 짓고 몸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산업적 기초가 파괴를 당하면 그 생활, 그 생명, 그 인격이 따라 파괴를 당하는 것이 필연한 사실이라 하면, 우리는 이와같은 조선사람의 경제적 상태는 곧 우리 모든 조선사람을 몰아 멸망의 구덩이로 넣는 것이라 하노라.』
1923년이라면 물론 일본의 통치아래 이 나라가 놓여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물밀듯 들어오는 외래문명이 이 나라를 휩쓸기 시작하던 때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뼈아픈 병폐인 사대주의 사상은 외래물품 숭배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신기하고, 편리하고, 품질좋은 외래물품은 또한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래품 숭배사상.
약삭빠른 일본 상인들은 한국인들의 이 헛점을 교묘하게 찔렀습니다.
방래품. 소위 하꾸라이라고 해서 배타고 건너온 서양물품은 곧 우수한 상품을 의미하도록 만들어놨습니다. 처음에는 서양물품을 수입해서 이 나라에 팔아 폭리를 남겼고, 나중에는 그 서양물품을 모방한 제품을 직접 만들어서 한국인의 눈앞에 갔다 쌓았습니다. 외래품 좋아하는 한국인들. 일본인들은 정치적으로 이 나라를 식민지화 했고, 경제적으로도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식민지. 이 서글프고 안타까운 현실에서 그러나 뜻있는 한국 지성인들은 자각의 눈을 뜬 것입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언론인 유광열 선생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 물산장려회 회원을 모집. 이 회로 말하면 실로 전 조선형제가 다같이 회원될 만한 의무를 절실히 깨닫고 찬동하여야 할 것이므로 멀지않아서 많은 회원이 있을 것이나, 그 회 생명의 강하고 약함은 금전보다도 회원의 많고 적음에 있으며, 그 회 목적의 완성은 외부의 도움보다도 회원들의 뜨거운 열성에 있으므로 그 회의 간부에서는 앉아서 입회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몸소 나아가 건실한 회원을 모집할 터인데, 더구나 음력 정초에 대대적으로 선전운동을 일으킬 터이므로 음력 설 안으로 많은 회원을 모집할 작정으로 그 회 발기인 중에서 회원모집 위원 30명을 선거하여 대대적으로 모집한다는 데에 회원될 자격으로 말하면 그 회의 목적을 달성할 만한 성의있는 사람으로 회비 50전 이상을 내면...』
유성준, 나경석, 김윤수, 백관수, 김덕창, 이종민, 이갑성 등등. 몇몇 당시의 지성인들이 앞장섰던 이 운동. 이 물산장려운동.
『 우리는 이와같은 견지에 서서 우리 조선사람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첫째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 사서 쓰고, 둘째 조선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하노라. 이와같은 각오와 이와같은 노력이 없이 어찌 조선사람이 그 생활을 유지하고 그 사회를 발전할 수 있으리오.』
(음악)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지성인들이 발기하였고, 동아일보사가 앞장서서 보도한 이 물산장려회는 삽시간에 전국민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 동래에서 물산장려. 물산장려와 마산 기생. 대전에도 물산장려회. 부산에도 물산장려회. 영동의 물산장려회. 노동동맹도 참가. 도천교도도 참가. 밀양의 물산장려회. 간도에도 물산장려회. 토산애용부인회 결성.』
(음악)
전국 방방곡곡에 물산장려운동은 파급됐습니다. 미천한 계급이었던 기생들까지 일어났습니다.
『 물산장려와 마산 기생의 동맹. 음력 정월 1일로 부터 조선 것만 쓰기로 동맹. 마산부 남산권번에서는 거월 31일 하오 2시에 권번 총회를 열고, 40여명의 기생이 동맹 결의하기를.
(박수소리)
“우리도 조선사람의 일분자가 됐으니, 조선물산을 쓰고 먹고, 입어야 될 터이며 우리는 돈 없는 사람이라, 천한 기생의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장래를 위하여 검소하여야 하겠습니다.”
(박수소리)
“지금부터는 조선물산으로만 검소하게 의복을 해 입읍시다. 이후로 조선물산 이외에 다른 것으로 의복을 지어 입는 자가 있을시에는 벌금 1원씩 징수하여 저축하였다가 빈한한 사람 구제하는 사업에 쓰게 하기로 결의합시다.”
(박수소리)
“음력 정월 1일 부터는 우리 기생들은 권목치마와 명주저고리를 입고, 조선토산인 자주댕기를 들이기로 결의합니다.”
(박수소리)
(음악)
기생뿐만이 아니라 일반 가정 부인들도 이 운동에 호응하고 나섰습니다.
『 토산애용부인회. 경성 부인의 새로운 부르짖음. 토산물을 숭상하자는 새모임. 죽어가는 우리 목숨을 살리는 길이 무엇보다도 남의 나라의 빚꾼이 되지 말고 스스로 살림을 충실하게 하는데 있다하여 최근에 이르러, 물산장려의 운동이 일어나 캄캄한 우리의 앞길도 다수의 밝은 빛이 보이는 가운데, 이 운동으로 말하면 각기 스스로 또는 제각기 가정으로부터 실행해야 할 것이므로 가정의 주부가 충실이 이에 깨달음이 있어야 하며, 더욱 사치하는 악습으로 말하면 실로 부인계급이 심하므로 부인들의 철저한 깨달음이 없고는 이 운동도 완전하게 이룰 수 없는 터인바. 전행으로 아낙네들의 깨달음이 깊어 이 도, 박영자, 최영아, 이 숙 씨등 여러 부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우선 중류이상의 부인으로 동지자 50여명을 모아서 토산애용부인회를 발기하고 제작 5일 오후 2시부터 서대문 정빈우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홍옥경 씨의 사회로 개회하였는데, 그 회의 창립에 대하여 많이 노력하여 준 민우회 간부의 취지 설명을 듣기를 바란다는 의견이 있어 설태희 씨의 설명이 있은 뒤에 규칙을 통과하여 원안대로 가결하고 순서를 따라 임원을 선거하고 몇 가지 사항을 결의한 뒤에 최영아 씨가 등단하여.
“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지는 것만 보고 세월이 가는 줄 알던 우리 부인들도 이제부터는 세상일을 좀 합시다. 우리의 긴 역사 가운데에 잘난 할아버지는 있으나, 잘난 할머니는 없습니다.”
(박수소리)
다음은 문세환, 박영자 씨 등이 잇따라 등단하여.
“ 젊은이들 보다도 늙은이들이 더욱 본 회의 뜻을 찬동하여야 하겠습니다.”
(박수소리)
늙은이들에게 많은 감상을 주고. 오후 4시 반에 폐회하였다더라.』
(음악)
저멀리 간도에서도 우리동포들은 일어나 물산장려회를 조직했고, 본 국에 감동어린 전보문을 보내왔습니다.
‘ 보시오. 보시오. 보시오. 우리의 급히 힘써 가야할 길을 합갑시다. 합시다. 우리의 살 길을 찾아보려 합시다.
지킵시다. 지킵시다. 지킵시다. 우리의 살아갈 큰 깨달음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만들 것을 사랑하여 이룹시다.
그리고 우리는 농사를 힘써 착실히 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재주대로 무엇이나 만듭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나쁘다, 비싸다, 하지 맙시다. 이리하여야 우리의 장래가 잘 살게 되고, 이리하여야 우리의 자손이 잘 살게 됩니다. 우리 것을 삼으로 우리 돈이 우리에게 떨어집니다. 우리 것을 씀으로 우리 것이 차차 좋아지게 됩니다.
남의 것이 보기 좋고, 맛이 좋아도 장래에는 우리에게 떨어지는 큰 손실이오. 우리 것이 보기 싫고, 비싸더라도 장래에는 우리에게 떨어지는 큰 이익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깨달음이 많습니다. 깨달으면 실행합시다. 간도 용정시 물산장려회.’
(음악)
이 한국 전민족의 호응. 정치적인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에 못지않게 이 경제적인 독립운동은 그만큼 온 국민이 열망했다는 증거입니다. 경제적 독립.
(음악)
(음성 녹음)
이 나라의 주권을 빼아서 쥐고 통치하던 일본인들은 이 운동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정치적 운동이라면 총검으로 탄압해서 간단했지만, 이 어리석어 보이던 한국인들이 어느새 이토록 발전해서 합리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했을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 행렬은 경찰이 금지. 정월 초하루날에 물산장려운동 행렬은 불온하다고 경찰이 금지. 조선물산장려회에서 명일 음력 정월 초하루날을 이용하여 조선물산장려 대 행렬을 하려고 그 회에서는 여러가지로 준비에 골몰하던 터인데, 재작일 오후 1시경에 종로경찰서에서 그 회의 간부를 호출하여 선전행렬을 금지하는 뜻을 말하고.
“만일, 구태여 하려거든 경찰과 충돌이 생길 것을 미리들 각오하시오.” 라고 위협까지 하여, 그 회에서는 경찰부에까지 가서 여러가지고 교섭하였으나, 옥외집회는 법령위반이오. 불온한 일이 생긴다는 이유로서 드디어 금지를 당하였는데, 이에 실패한 그 회에서는 “우리의 뜻만 거두면은 그만입니다.”하고, 행렬은 못하더라도 간증회만은 예정과 같이 음력 초하루 오후 1시. 경운동 천도교 당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강연도 두 군데서 대대적으로 하리라더라. 평양에는 제한행렬. 50명씩 두대만 행렬하라는 경찰당국의 주의와 단속으로..』
일본 경찰은 눈을 곤두세우고 이 운동을 감시했습니다. 전통적인 설날인 구정에 한국의 옷을 입고, 물산장려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하겠다는 한국인들을 그냥 내버려둘만큼 일본 경찰은 아량이 있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그 사설에서 경찰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난했습니다.
『 옥외 집회도 색색인가. 불통이래 경찰 취채. 우리는 우리의 것을 먹고, 입고, 쓰고, 살림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물건을 많이 만들기에 힘씁시다. 우리는 말로만 하지 말고, 끝까지 실행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남들과 같이 제법 살아봅시다.
사랑하는 동포들아, 이것은 오는 음력 정초를 이용하여 대를 지어 시가를 행렬하면서 일반 시민에게 널리 선전할 자작·작업의 취지인데, 이것이 일본인의 상점을 파괴하라, 조선인의 상점이라도 외국물화를 매매하는 자를 타살하라, 또는 비단옷을 입고 시가에 동행하는 자는 절권의 제제를 가하라. 혹은 우리 조선은 독립을 하여야 한다는 등. 소위 불온한 계획과 기도가 아니다. 실로 경제 발달. 생활의 확보. 오로지 그 소용하는 물화를 그 스스로 생산하기 위하여 단결 의식의 힘으로서 한번 분발하자 하는 온건한 운동인 것을 누구나 다같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온건한 취지를 선전하기 위하여 절호한 시기를 당한 금일에 거행코자 하던 물산장려회의 행렬을 경성 경찰 당국은 절대로 허치 아니하고, 그 이유로 하는 바는 행렬은 옥외집회라 허 하기 어렵다 하니, 이 이유의 부도리,무조리한 것은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바라.』
철학교수 신일철 씨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만일, 구태여 하려거든 경찰과 충돌이 생길 것을 미리들 각오하시오.”』
이 팽팽한 대립. 한국인의 정열과 일본인의 긴장이 대립했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정월 초하루. 3월 1일과 마찬가지의 D-Day. 양력으로는 2월 16일을 맞이 했습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다음주 이 시간까지 계속해서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다음주 이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악)
나오신 분들. 장건일, 이광세, 김을동, 이소연, 나병옥, 장석천.
기사 낭독 조명남. 해설 김영배. 그리고 음악에 김종삼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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