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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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편 근세의 표정. 오늘은 신여성 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신진 여류의 기염. 일천만의 여자에게 새생명을 주고자 하노라. 조선여자 교육 회장 김미리사 여사.』
1921년 2월 21일자 부터 동아일보는 신진 여류의 기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신여성들의 주장을 싣고 있습니다.
쟁쟁한 여류명사 14명을 뽑아 각각 그 주장을 쓰게 한 겁니다.
「 조선 여자의 교육.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옳시다. 그 교육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급한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여자인거로 제 논으로만 물을 대려는 수작인게 아니라, 과연 여자 교육이 급한 것은 여러분 남자편에서도 간절한 느낌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봅시오, 요사이 걸핏하면 이혼이니, 무엇이니 하여 우리네 가정에 풍파가 끊길 날이 없는 것은 모두다 여자 교육을 진심으로 요구하는 현상이 옳시다.」
(음성 녹음)
「 문화운동에 대하여, 먼저 개인지식 향상이 필요하다. 모든 운동도 이 주의로 할것.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양 담. 문화운동이라 함은 문제가 너무 크고 넓으므로 간단히 말할 수 없으나, 문화라 함은 문명과 교화를 의미한 것이다.
대개 개인이 몰려 사회가 되고, 사회가 모여 국가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사람마다 문명함은 그 사회가 문명하고 그 사회가 문명하면 그 나라가 문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문화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개인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일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면 개인의 지식향상은 뭐로 표준을 잡을까. 대략 세가지 방면으로 나눌 수 있으니,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라. 먼저 육체의 방면으로 말하건데...」
(음악)
1920년대 초기에 새로운 여성들. 소위 신여성들. 나라는 일본의 압제에 있었으나, 여성들도 나라를 찾는게 우선이었다고 생각한 일부의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었습니다. 먼저번에 소개한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은 김마리아 같은 신여성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진여류의 기염이라는 연재기사가 나가고 있는 동안에도 김마리아 양은 일본인 법관의 취조를 받고 있는 영어의 몸이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정치적인 정면투쟁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것과 비슷한 무모한 충돌임을 인식했을까. 김미리사, 김활란, 나혜석, 이경화 등등.
일파의 신여성들은 정치적인 정면투쟁보다는 여성교육과 문화운동으로 항의를 대신하는 현명함을 보여줬던것입니다.
여성교육과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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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 합니다.
(음성 녹음)
1920년대라면 신문화가 들어오고 있어서 개화기가 지났지만, 이조말기의 퇴폐적인 유교사상은 이 사회에 그대로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유교적 가족주의 아래서의 여성의 위치는 어떠했는가. 남자와 여자의 동등이란 꿈에서는 그릴수가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이 뿌리깊은 가족주의 인습을 신여성들이 감히 타파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모든 신여성들이 그렇게 건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언니?”
“응?”
“참, 옛날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겠수?”
“왜?”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후훗. 연애? 저리뜨냐, 저리뜨냐?”
“후후후. 아찔아찔 합디다.”
“그것만?”
“오금이 녹아옵디다. 호호.”
“호호호.”
소설가 김동인씨가 통렬하게 신여성을 야유한, 김연실 전의 한 장면입니다. 소위 자유연애 사상을 배우고, 몸소 실천한 신여성들. 남의 남편을 쉽게 빼앗아서 유교적 조강지처를 울려주던 신여성들. 소설 김연실 전도 모델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실제 있었던 당시 인물중에 윤 모라는 신여성은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기염을 토합니다.
“아마, 조선은 내 배필될 남성이 없을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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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신여성의 사상은 자유연애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행동이 건실했던 신여성은 있었고, 더욱이 자기의 학문과 지혜를 나라의 발전에 써보려는 봉사적 신여성이 많았습니다. 그 확실한 예가 14명의 신여성이 참가한 이 연재기사 입니다. 신진 여류의 기염.
14명의 신여성들은 한국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큰 원칙을 주장하는데 일치하고 있습니다. 여성교육은 1920년에 가장 절실한 사회적 요구였습니다. 여성교육. 요새는 여자대학이라고 해서 서울 시내에 널려있고, 그것도 정원 초과 모집을 해서 항상 말썽이 날 정도로 여자 대학생들이 많아서 1920년대의 여자 소학생 보다도 가장 많은 실정입니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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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과 인생의 관계. 음악은 사람의 생활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이화학당 교사 임배세 양 담.
음악은 사람에게 어떠한 위로를 주는가. 음악은 실로 상한 마음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오, 흐리터분한 정신을 씻어주는 생명의 샘물이다. 음악과 조선사회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우리 음악은 아무 보잘것 없이 되야, 화류계, 화등대의 오락물이 되고 말았다..
회화와 조선여자. 조선여자 그림그릴 만한 천재를 가진자가 많이 있다. 여류화가 나혜석 여사담.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면 구언이 그림그리는 사람은 환장이니 하여, 너무 학대와 천시를 하여 왔으므로 자연 여자는 커녕 남자들도 이것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미감을 가장 보편적으로 주며 무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그림이옳시다. 조선 여자는 결코 그림을 배우려하지 않으려니까 그렇지 만일 배우고 하는데, 반드시 외국여자의 능히 따르지 못한 특견이 있는 실례를 나는 어느 고등여학교에서 도화를 교수하는 동안에 발견하였습니다. 일반여자계의 그림에 대한 취미를 고취할만한 운동이 일어나기만 하면 반드시 여류화가가 배출할 줄로 믿습니다.
신여자와 결혼생활. 화려한 새살림에 경륜도 혼인만 하면 수포가 된다. 이원익 여사 담.
만일 우리들 신여성의 뜻과 같고, 시대에 적합한 새살림을 하려고 할진데, 먼저 시부모와 딴살림을 하고, 다만 조석으로 문안을 다니는 것이 상책일것이 옳시다. 둘째로 남편된 이에게 가정의 당일에는 자에게 쓸어 맡기고, 다시 간섭치 않겠다는 승낙을 맡아 그 가정에서 수입되는 금액을 상당히 열 두달에 분배하여 놓고, 일일이 과목을 정하여 살림살이의 예산을 만들어 놓고 지나간 일을 보살펴 앞 일에 경영하는데 대한 탐구를 삼을 것이옳시다.
셋째 순서로는 위생에 주의를 할 것이니, 조선 여자는 너무 위생사상이 유창합니다. 넷째 살림을 간편히 하여, 조선여자도 취미생활과 인격수양을 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는데는 먼저 일본과 같이 김치 회사와 장 회사가 있어서 조선가정에서 제일 큰일로 하는 김장과 장 담드는 수고를 덜며, 겸하여 좁은 집안에 장독대와 김치 광을 두는 폐를 덜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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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개한 외에도 유현숙 여사는 사회사업을 제창했고, 박경희 양은 여학생에게는 기숙사 생활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으며, 김 영 여사는 여성에게 경제 관념을, 안수경 여사는 미신을 버리라고, 박순실 양은 어린이 양육에 관하여, 이경화 양은 여자아이 교육방법을, 최설경 여사는 여권의 신장을, 김 선 양은 여성의 교육과 종교심 방향을 각각 부르짖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절실했고, 또 가장 첨단적인 주장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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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제,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는 곧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은밀한 생활, 또 다른 측면에서는 퇴폐적인 생활이 있었고, 또 이렇게 건실한 부르짖음도 있었던 한국 여성의 표정이었습니다.
1920년대의 신여성. 오늘에 사는 여성들. 주로 젊은 여성들을 한자리에 모셔봤습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서 기획했던 신진 여류의 기염의 멤버와 유사한게 오늘의 각개 젊은 여성들 입니다.
(음성 녹음)
대학교수 김만조 씨, 고려대학교 교수 이태현 씨, 서울신문사 기자 김재희 씨, 금란여중 교사 윤영미 씨, 소설가 정연현 씨, 이화대학 재학생 정숙희 양 이상 여러분 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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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 여류의 기염. 일천만의 여자에게 새생명을 주고자 하노라.』
「 조선 여자의 교육.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옳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음성 녹음)
(음악)
출연 안정국, 이영민, 이민숙, 김을동, 명승희, 최희정, 노명순, 나병옥, 강숙경.
해설 김영배, 그리고 음악에 김종삼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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