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 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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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 1부 근세의 표정.
오늘은 일본인과 조선인 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만감 호와 부와,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의 차별. 조칙을 받들고 온 제등신은 얼마나 고쳤는가? 조선 정치의 개선은 이것이 제일 근본되는 일. 』
1920년 5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만세의 부르짖음이 탑골공원에서 첫 소리를 울린지 그럭저럭 열 다섯달이 되었다. 총독 정치를 개선한다고 떠드는 소리가 일어난지도 일년이나 되고, 제등신 씨가 머리에 조서를 받들고 온 세상의 주목을 몸에 모으고, 조선 총독의 인두머리를 잡은지도 벌써 열달이나 되었다.
아, 이만큼 오래인 동안에 총독 정치는 얼마나 개선 되었으며, 조선 사람은 몇 푼어치나 새 행복을 얻었는가? 남대문 역 뒤에서 폭발탄을 받고 경성에 들어선 제등 씨의 제 1착으로 조선에 베풀은 이른바 선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대한 정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해골을 위한 묘지 규칙에 대한 개정이었다.
제등 씨가 조선에 선사한다고 천하에 떠들며 가지고 온 단자를 보면, 덕정이니, 문화 정치이니, 언론 자유니, 집회 자유니, 출판 자유니, 지방자치이니, 너무도 선물이 많으니까 그 선물을 다 풀어서 조선 사람에게 선사하려면 주린 사람이 아주 실신을 할때까지 시각이 걸릴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이 기사. 19일에 걸쳐서 3면에 연재한 기사였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을 거둬 받는 일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음성 녹음)
당시 일선 기자였던 언론인 유광열 씨의 말씀입니다.
(음성 녹음)
제등신, 3·1운동 직후인 1919년 9월에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온 사이또 마꼬도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평등을 부르짖는 천황의 조칙을 안고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했습니다.
문화정치, 더구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평등. 언뜻 듣기에는 매우 훌륭한 정책 전환이요, 한국인들에게는 고무적인듯 했습니다. 제 1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단정치를 펴면서 한국인의 차별을 시정할 수 없느냐고 하자,“조선인이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당췌 말이 안된다.”
이 무지스러운 군인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숙명적으로 차별을 받아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데라우치 개인만이 아니라 전 일본인의 신념임에 틀림없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아니, 일본인과 한국인. 식민지 국민들이 지배자들과 동등해 보겠다고 발언하는 것 부터가 당치않은 소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나라를 다시 찾자고 전 국민이 일어서자, 일본인 지배자들은 그 운동이 마치 차별대우에 대한 항의라고나 생각했는지, 새로 부임하는 사이또 총독은 평등을 선물로 안겨줄 듯, 큰 소리를 친겁니다.
완전한 평등이라면 한국을 독립시키는 길 뿐입니다. 그것을 일본인들은 몰랐을리가 없고, 또한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이또 총독이 안고온 천황의 조칙은 차별대우를 약간 완화시키겠다는 내용입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악랄할만큼 심하니까, 눈가림이나마 조금 해보도록 노력하겠다는 일본인다운 간사한 정책이었습니다. 식민지가 된 것부터가 잘못 입니다. 식민지 아래서의 차별대우란 숙명적으로 있기 마련입니다.
『 성명의 후면에는 실행이 얼마큼 따라가는가, 평등을 설명한 문서에는 먹도 마르지 않아서 경찰서 관제 개혁에 제 1착으로 대실망. 끝내 차별을 폐기 못할까. 조선 사람을 관리로 등용할 길을 크게 연다고 듣는 사람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던 제등신은 제일 먼저 경찰서의 관제를 뜯어 고칠 때에 과연 조선 사람을 위한 얼마나 관리 되는 길을 열었는가. 조선 사람을 관리로 채용하는데, 일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차별을 두던 사내 백작의 정치는 제등씨의 시대에 이르러도 말로만 그치고 사실은 여전한 것을 어찌하리오.
순사에게는 사내 백작이 주었던 순사보라는 보자를 간신히 떼어버리고, 사내 백작이 빼앗았던 소매 단추한개를 도로 붙였을 즉, 그것도 조선 총독부 당국자에게 물으면 갸륵한 개선이라고 하겠지만은 이것으로 개선이라면, 성명이 너무 과히 굉장하지 아니한가. 』
(음성 녹음)
일제 시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서 직접 관직에 있을일이 있던 변호사 이학열씨가 증언합니다.
(음성 녹음)
『 제등 씨가 일본 관리와 조선 사람 관리의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한가지 일로 문제 많던 봉급령을 개정하여, 조선 사람에게만 한하여 쓰던 봉급령을 폐지하고, 일본 사람 관리에게 쓰던 봉급령을 조선 사람에게도 적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였으므로 금일에는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같은 관리로 같은 관급에 있을 거 같으면, 똑같은 월급을 먹을거 같지만은 사실은 이와 반대임. 큰 차별이 있는 건 조금 정도가 감하였으되, 여전히 크다.
물론 본봉으로 말하면 똑같은 법령에 의거하는 것이오, 조선 사람 관리라고 월급에다가 사주잔을 섞어 주는 것은 아니니까 일본 사람과 적을 것도, 많은 것도 없는 거라. 이 점으로만 보면 제등 씨의 새 정치중에 매우 갸륵한 한가지 일이지만은 조선 사람에게는 본봉에 한하여만 일본 사람 관리와 무차별이오, 그 이외에 본봉에 장지되는 소위 가봉이라는 것은 차별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에게만 있고 조선 사람에게는 한푼도 없으며, 그 이외에도 일본 사람 관리에게는 후한 사택류나 좋은 관사를 주는 것이다.
이럭저럭 계산을 하면 지금도 일본 사람 관리는 같은 관등에 있는 조선 사람 관리보다 평균 곱절은 되는 셈이다.
그러면 이전에 3배, 4배 되던 차별이 지금은 곱절 밖에 안되었으니까, 조선 총독부 당국자는 기고만장일 것이고, 제등씨의 소위 무차별은 차별이 없다함이오, 차별이 적다함은 아니다.
비록 한푼 반절을 차별할지라도 차별은 차별이다. 하물며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 사이에 곱절이나 되는 차별을 하면서 차별 없이 하였다함은 알 수 없는 말이로다. 한 사람에게는 오원을 주고, 한 사람에게는 십원을 주며,이것과 저것과 똑같은 것이라 하면 누가 곧이 들을 사람이 있을까.』
(음악)
동아일보가 이 연재기사를 실으면서 독자의 투고를 모집해서 같이 싣고 있습니다.
『 공과 사로 압박분. sa생. 나는 학생이외다. 학기가 시작되며, 교과서를 주문하려고 진국의 책점에 가서 이책 저책을 열람하는 중, 졸지에 곁에서 소년의 울음소리와 시끄러운 소리가 남으로.
“에잇!”
(사람 때리는 소리)
“왜 때려요? 왜!”
“이 놈의 자식. 조선 놈이 까분다. 에잇!”
“내가 뭘 잘못 했어요? 내가”
“이것 봐라?”
“아앗!”
“어서 말 못해!”
“아아악! 흑흑.”
“왜 그래? 왜 울어?”
(발소리)
“아니, 무슨 일이야? 저 일본 사람들이 왜 널 때렸어?”
“흑흑. 정거장에서 책을 지고 오라고 해서 그 무거운 짐을 여기까지 지고 왔는데 짐 삯을 겨우 십전 주길래, 못 받아도 삼십전은 받아야 되는건데, 그래서 적다고 그랬더니. 여기서 십전 이상 준 일이 없다고..”
“그래서 때리더란 말이지?”
“네. 흑흑”
그 남루하게 입은 소년의 모습을 보고 전 분개 하였습니다.
“가자, 파출소에 가서 호소하자. 분명한 일본 사람법은 다 이런가?”
“흑흑..”
“가자.”
(발소리)
“뭔가?”
“네. 저 상점에서 말씀입니다. 얘가 정거장에서 여기까지 짐을 지어다 줬는데, 십전밖에 안주고 말입니다. 적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팹니다.”
“누가?”
“집단 폭행입니다. 보다 못해 고발하는 겁니다.”
“저 일심 서점 말인가?”
“네.”
“그래도 어른인데, 무턱대로 때렸을리가 있나? 말해봐? 이 자식아.”
“네?”
“네놈이 잘못했으니까 맞았지.”
“아니올시다. 전 아무 잘못도 없이 맞았어요.”
“뭣이? 잘못 안했어?”
“전후를 조사해보시면 압니다.”
“넌 뭔가?”
“전 행인입니다.”
“이런 자식!”
(뺨을 때리는 소리)
“아니!”
“고발을 했다고요?”
(사람들의 웅성거림)
“이 학생놈이 어린이를 선동해서 말이야!”
“이 자식, 넌 뭔가!”
“길가던 행인이오.”
“자식아! 선동분자 아닌가?”
(사람 때리는 소리)
“왜! 왜! 왜 때립니까? 왜!”』
(음악)
『 나는 말 몇마디 하지도 못하고 뺨을 맞으며 옷을 찢겼을 뿐입니다. 나는 핏덩이를 꿀떡꿀떡 삼키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아, 처지를 같이 한 동포여. 보안기관, 순사, 파출소도 우리 민족에게는 소용이 없는 이때, 우리는 이런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에겐 호소할 필요도 없을것 같습니다. 아, 온 세상이 뭔가.』
(음악)
『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정치를 한다고 이렇게 까지 다하려고 하고, 안타깝고, 악착한 차별을 하지 아니하고는 조선을 통치할 길이 도무지 없을까. 아, 조선에 있는 일본 사람들아! 너희가 아무리 도량이 좁더라도 한번 마음을 돌려 조선 사람의 처지가 되어서 생각해 보라. 현재 조선 사람들에게 대하여 행하는 차별이 옳은가, 그른가.』
(음성 녹음)
항일에 앞장섰던 여류 정치인 박순천 여사께서 회고하십니다.
『 인도상의 제약. 전차에 치어 죽은 사람에게도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보다 조의금이 겨우 반절. “칼찬 일본 사람들은 말머리에 의례이‘어이’이렇게 부릅니다.
조금만 무엇하면‘오마에 빠가’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에게는 아직 경어를 줄 기회가 아직 되지 않아서 그러한지.” 교육제도의 개혁은 어찌 하려는지. 당국자가 하는 일을 아직 두고 보려니와 그보다도 먼저 개정치 아니하면 안될 일은 학교 선생의 차별을 먼저 폐하라.
“감옥에서도 차별. 같은 죄수인데도 일본인에게는 옥 같은 쌀밥이. 다만 한가지라도 맛가로운 반찬을 들이면서, 조선 사람에게는 누런 좁쌀밥에 무, 김치 조각을 한데 뒤섞어서 아무렇게나 안기니..”
일본 사람만 위하면 그만. 소위 동양 척식 회사에 행사를 보아라.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을 이다지 차별하는가.
“정거장에서. 아, 사랑하는 친구여. 나막신 신은 형제여. 좁고 좁은 섬나라의 성질을 버려라. 어서 바삐.
그리고 우리와 같이 온 인류와 더불어 거룩한 인류의 양심안에서 어깨동무 하면서 살자꾸나.
구차스럽게 그렇게 다툴것 없이. 아, 사랑하는 친구여. 나막신 신은 형제여.”』
(음악)
언론의 자유가 거의 보장되지 못할때, 1920년대 신문에 조심스럽게 나타난 글들 입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생각해보면 이 뼈저린 차별대우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등을 원하는 당시의 한국인들이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식민지이면 당해야 하는 저런 차별. 더구나 잔망스러운 섬나라 사람들에게 더욱 옹졸한 차별을 해왔습니다. 차별이 발전해서 학대, 더 나아가서는 배일 사상을 가지고 독립을 원했다 해서, 무자비한 학살을 가행해온 일본인들 입니다.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
(음악)
한국의 젊은 철학자 신익철 씨의 말이 여기있습니다.
(음성 녹음)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그 특집 연재기사 마지막 19회.
(음악)
『 약자의 애송이일뿐. 학대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학대를 부르짖음보다 수양하고 노력하니, 일본 사람과 같이만 되어도 학대는 안 받는다. 잘 배우고, 잘 버티어라. 우리 동포여.』
(음악)
출연 박 옹, 조명남, 안정국, 양진웅, 이정은, 장건일, 김태연, 윤병훈, 장석천
해설 김영배, 그리고 음악에 김종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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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 1부 근세의 표정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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