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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 피아노社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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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오늘은 철인 엄복동 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장충단의 자전거 경주회. 일등은 엄복동 군. 제작 21일은 장충단에서 윤업회 주최 자전거 대 경주회가 있었는데, 마침 일요일이 되자 일기가 좋으므로 군중은 수만명에 달하는 대성황에 이르렀으며, 아침 9시부터 여러가지 재미있는 경주가 있은 후, 오후 5시 경에는 선수 총 경주회가 있었는데. 이 경주회는 운동장을 40번이나 도는 것으로 만장의 갈채리에 엄복동 군이 제 1착이 되어, 영광스러운 우승기는 엄군의 손에 떨어졌는데. 대판에서 까지 멀리 승리를 기약하고 온 일본인 선수들은 그만 낙담실망이 되었고, 이와같이 성황중에 오후 6시에 무사히 폐회하였다더라.』
1922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입니다. 엄복동 선수 1위. 일본선수를 모두 이기고 당당 1등을 차지한 자전거선수 엄복동 군. 하늘을 보아라 안창남, 땅을 보아라 엄복동. 1920년대 부터 유행하던 노래도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 비행사의 유명한 안창남 못지 않게 유명했던 자전거 경주의 영웅 엄복동이었습니다.
1922년 5월 30일자 신문을 보시겠습니다. 중국 대련에서 온 소식입니다.
『 엄복동 군 우승. 대련에서 1등 해. 자전거의 대장 노릇을 하는 엄복동 군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나간 20일 대련시 봉판전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 대 경주회에 원정차로 떠났었는데, 개최일 20일 아침부터 모여드는 관람자는 무려 5만명에 달한중에 특히 조선인 관람자가 많아서 엄군의 우승을 열광적으로 바라며 열심으로 응원하였다.
맨 나중. 일류선수의 70주 경주가 시작되어 장내는 더욱이 긴장하여지며, 엄 선수는 튼튼한 기상과 용맹한 자세로 출장하여 경기는 시작됐다.
일본서 온 자전거 대왕이라는 일류선수 일본인과 또는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쟁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
이에 엄 선수는 줄곧 다섯바퀴를 앞세워놓고 돌며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둘은 모양은 장관이었는 바. 최후 70주에 이르러, 엄 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이 이착이 되고, 중국인이 삼착으로 끝을 마치어. 만세성미에 엄 선수는 우승기와 순금시계와 만주 일일 신문사 기증의 금메달을 타가지고 대련 거주 조선동포 환호중에 다섯채 자동차에 엄 선수를 태워가지고 시내를 일주할때 마다 조선인의 만세성은 우뢰같아서 미중유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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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만주를 통틀어서 자전거 경주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던 선수가 엄복동 군이었습니다. 일본의 압제하에서 일본인에게 짓눌려 지내던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용기를 들게 해준 엄복동. 한국인도 일본인 못지 않게 우수하다는 증거를 보여준 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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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녹음)
이 훌륭한 선수 엄복동. 철인 엄복동.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엄복동 선수의 출생을 비롯한 그의 관한 모든 조사를 해봤습니다. 현재 대한체육회 산하 싸이클 연맹에서는 매해 엄복동 배 쟁탈 싸이클 경주대회까지 열고 있으나, 막상 엄복동 그 인간에 대한 자료는 전혀 정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1914년대의 20살 가량이었다니까, 1894년 생으로 추측이 될 뿐입니다. 현재 살아 있으면 일흔 네살 가량. 물론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서울 변두리 태생. 출생부터가 불우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엄 선수와 동년배 친구는 거의 없고, 그 후배들이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으로 그의 면모를 그려야할 정도 입니다. 전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인물이라고 해야할까. 불과 40여년 전에 활약한 인물하나의 자료를 정리하지 못한 한국인들. 조오티마지오나, 베이브루스의 관한 자료는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엄복동 선수에 대한 자료는 갖추지 못한 한국인들. 엄 선수가 활약했하던 시절에 경기실황을 보도한 신문기사와 연로한 분들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여기 있습니다.
(음성 녹음)
엄 선수의 후배 싸이클 선수였던 박병희씨의 회고담입니다. 당시 엄복동 하면 삼척동자도 아는 인기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불우하게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고생으로 보내고, 머슴살이, 두부공장 직공 등. 험한 직업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답니다. 학교 교육을 전혀 못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엄복동, 그는 지식이나 두뇌같은 것으로 한국에 기여한 인물은 아닙니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치고서도 남보다 뛰어난 육체.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당시 이천만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인물입니다.
『 돌연 중지. 40회 자전거 경주에 말썽이 생겨 돌연 중지..』
1920년 5월 3일자 신문 기사 입니다.
『 초 이튿날 경복궁 안의 시민 대운동회는 마침 일기가 청명하여 순서를 시작하는데, 불행히 40주 자전거 경주를 하는 중에 뜻밖의 대소동이 일어나 운동회는 하오 다섯시에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그 자세한 내용을 보도하면, 대 40회 경주 선수 여덟사람이 용기를 다하여 주위를 돌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넘어져 뒤로 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 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남아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 군은 30여 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몇 회는 뒤떨어져 영예의 1등은 의심없이 엄군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하여 엄군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다!”부르짖으며 우승기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 가짜 우승기를 두었다가 무엇하느냐”고 우승기를 잡아 꺽으며, 옆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엄군을 구타하여 엄군은 마침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리게 되어,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으로 물결같이 몰려들어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형형색색의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정으로 군중을 해치고 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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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준 반면에, 일본인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엄복동 선수 였습니다. 자전거 경주. 그것도 일류 선수들의 메인 게임마다 단연 1등을 하는 엄 선수를 일부 일본인들은 그만큼 시기했습니다.
『 엄 선수 중상. 자전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 군은 지난 2일에 경상도 상주에서 개최한 자전거 운동을 하는 중, 최종의 70회를 돌던 중, 같이 돌던 일본 선수가 두번이나 떼밀어서 중상을 당하여 방금 황금병 일미상회에서 치료중이라 하더라.』
일본인 다운 간사스러운 꾀로 엄복동 선수를 탄압한 기록은 많습니다. 후배되는 박병희 씨가 엄 선수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 왜놈들 참 간사하지. 하하하. 나를 꺾어보려고 별 짓을 안해봤는줄 아나? 그 장충단에서 나까노하고 맞붙게 되었는데, 나까노 하면 전 일본 선수권을 가지고 있던 자 아닌가? 내가 무서웠던 모양이지? 경주 사흘전에 신바찌에 날 넣더란 말이야. 예쁜 일본 여자를 넣어주는데, 이게 당췌 놔줘야지. 나도 한 남자 아닌가? 모른척 하고 그대로 견뎌냈지. 경기날 놔주더구만 그래. 운동장에 나갔더니, 나까노 패들이 싱글벙글하더구만. 70회 경주아닌가? 처음엔 힘든 척 뒷 꽁무니에 붙어서 뛰어줬지. 그래도 어림있는 소린가? 라스트 종이 땅하고, 울리더구만. 밟아댔지. 1등을 안할수 있나? 하하하. 그 신바찌, 그 집 주인이 찾아와서 두 무릎을 꿇더구만. 그래. 그런일이 다 있었어.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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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 선수는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 였습니다. 이 사회는 그에게 불우한 태생과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는 강철같은 체력으로 사회를 고무시켜준 겁니다. 엄복동 선수의 경주를 직접 구경하셨고, 안면도 있었던 문화계 인사 세분을 모셔봤습니다. 언론인 유광열씨, 극작가 이승호씨, 여배우 복기숙씨. 세분의 말씀입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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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당시에 한국을 온통 떠들썩 하게 해준 엄복동 선수. 그 강철같은 체력도 연령을 이길수는 없었습니다. 보통선수 보다는 훨씬 긴 기간. 15년 동안을 현역 선수로 뛰었고, 그것도 계속 1등만 하다가 1938년 경부터 그의 쇠퇴기가 왔습니다. 엄복동 시대가 가면서 그 화려한 시대가 지나가면서 인간 엄복동의 불우한 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역 선수시절에는 자전거 경기 대회때마다 상금이 100원 내지 200원. 그 밖에 여러 상점에서 내놓은 상품들이 한 트럭을 넘어서 보통 한 대회때 마다 5∼600원씩의 수입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5∼600원이라면은 현재의 5∼6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답니다. 경기 대회는 봄부터 가을까지. 한국은 물론 일본, 만주까지 순회하면서 계속 열렸습니다. 엄복동 선수는 악랄한 방해를 받지 않는 한 대개 1등을 해서 그 상금과 상품을 독차지 했으니까, 그의 수입이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저축이 없었습니다. 인기인들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온 국민들이 그를 영웅시 해주고, 가는 곳 마다 환대해준 것이 인간 엄복동으로 하여금 냉정을 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많은 수입을 탕진한 것입니다. 결혼한 일이 있으나, 그때는 이미 가정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엄복동이라는 이름하나를 안고 떠도는 방랑인이 된겁니다. 해방이 되고, 그때에는 이미 50대가 넘어 노년기에 접어든 엄복동. 서울운동장에서 싸이클 경기가 있었을때, 엄복동 선수가 그의 사진을 관중들에게 판 일이 있습니다. 그때 관중들은 전설적인 인물 엄복동 선수의 옛날 전성기의 사진을 저마다 사줬습니다. 그 수입이 엄 선수의 생계에 도움이 됐었겠죠. 사회란 항상 과거의 인물을 잊어먹는 버릇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복동 선수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갔고, 6.25 전 해에 엄 선수가 다시 서울에 나타난 일이 있다고 박병희 씨는 회고 합니다. 이미 노쇠해진 몸.
“지금 연천에 있어.”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과부하나 얻어서 살지.”
“허허, 식생활은 어떻게.”
“응. 두부공장 하나 차렸네.”
“공장이요?”
“저,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아 먹고 살아. 요새도 운동 열심히 하나?”
“네, 선생님 같은 선수야 안나타나지만은.”
“돈들 벌거든 저축 좀 하라고 타일러. 나처럼 되지 말라고.”
(음악)
그리고 6.25가 터졌고, 피난, 환도, 북진. 그 혼란 틈에서 엄복동 선수의 종적은 사라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 짓눌려 압사했을 겁니다.
(대포소리)
우리 민족이면 모두 겪은 전쟁. 그리고 그 잔인한 살육의 소리. 철인 엄복동 선수는 저 잔인한 소리를 들으면서 혹시는 전성기의 환호성을 회상하면서 눈을 감았을까.
(사람들의 환호소리)
불우한 초년, 꿈처럼 화려했던 청·장년, 그리고 비참했던 노년. 엄복동. 그 이름과 온 민족의 환호성이 기억으로나마 남아 있어야 합니다. 철인 엄복동. 오늘도 철학자 신익철씨가 여기 나와 계십니다.
(음성 녹음)
『 일본서 온 자전거 대왕이라는 일류선수 일본인과 또는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쟁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 이에 엄 선수는 줄곧 다섯바퀴를 앞세워놓고 돌며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둘은 모양은 장관이었는 바..』
(음악)
출연 주상현, 조명남, 양진훈. 해설 김영배. 그리고 음악에 김종삼.
(입력일 :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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