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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김 마리아
제1부: 근세의 표정
김 마리아
1968.11.10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 찬가. 수도피아노 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 찬가.

오늘은 김마리아 선생편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제 1회 공판 개정. 착일 대구지방법원에서..』

1920년 6월 8일 동아일보에 신문 3면 기사.


『대한애국부인회의 관계자의 제 1회 공판은 7일 오전 9시부터 대구 지방법원 제 1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오미 재판장과 전중, 산국, 양 배석 판사가 열석하고 화천 검사가 임석한 후 격식대로 피고의 성명, 본적, 연령을 조사한 후 사실 신문을 개시하였는데 특별히 김마리아는 병중임을 참작하여 법정에서 퇴출함을 허락하고 오전에는..』

대한 애국 부인의 사건. 1920년 삼일 운동 다음해에 일어났던 사건. 그리고 비밀결사인 이 대한애국부인에 회장이요, 그 사건에 주모자인 김 마리아. 김 마리아. 들것에 실려 공판장으로 끌려온 이 여인 김 마리아. 그 약 한달전인 4월 24일 신문 기사를 봅시다.


『 애국 부인회에 사건.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부쳐 작년 9월에 김 마리아가 수령이 되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가지고 대대적으로 조선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애국부인회는 당국에 체포되어 댁으로 압송 됨은 세인은 기억하는 바다. 그 후에는 대부분이 20이상 30 이하에 꽃같은 여자로 그와같이 대담하고 위대한 일을 계획하였슴으로 온 세상에 이목을 놀라게 했던 문제라. 아내의 그 사실에 대강을 보도하노라.경성부 정신대학교내 김 마리아, 신의경, 장선희, 원산부, 교사 이혜경. 』

대한 애국 부인의 사건은 기억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1920년대에 여성들. 삼일운동으로 일제 감시가 가장 심할때에 일어난 비밀 결사. 그것도 20대 꽃다운 처녀들의 조직적인 운동은 당시에 신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음악)

그 주모자가 김 마리아. 1891년 황해도 장현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출생. 서울 정신 여학교를 졸업. 일본에 가서 히로시마 고등여학교 졸업, 도쿄 목백여자학원 전문부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 27살의 처녀였습니다.1920년대의 한국 여성. 그 여성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고 조직적인 행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공판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음성 녹음)

언론계의 원로 이광열씨의 회고담입니다.

(음성 녹음)

(음악)

당시에 일본인 형사들은 정신병자에 가까운 세디스트들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인을 어떻게 고문했길래 얼굴이 뭉개지고 고름이 흘렀겠습니까?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어놓고 법정에 세워놓은거입니다.

(음악)

『 재중원 간호부대로 되는 서양부인과 또 한사람의 조선 청년이 김 마리아를 떠밀어 내어가는데, 김 마리아는 전신에다 담요를 두르고 얼굴에는 보기도 흉한 흰 손수건으로 가렸는데, 하얗게 세인 마리아 턱이 겨우 보이는 것이 마치 죽은 사람 같이 참혹하였고, 겨우 내놓은 두 손은 뼈만 남아서 차마 볼 수 없더라.

죽은 사람같이 축 늘어진 피고 김 마리아를 떠밀어 내어갈 때에 방청석에 부인네들은 모두 훌쩍훌쩍 우는 소리로 한참동안 그 음산한 법정은 눈물세상이 되고 말았다.

어떠한 부인은 차마 보기 싫은듯이 고개를 돌리며 아이고 아이고 애처로워라 하고, 그만 쏟아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여 검사가 일어서서..』

당시에 신문은 공판장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찰에서의 고문은 그토록 참혹했습니다. 훗날 김 마리아 자신이 경찰에 고문광경을 회상한 일이 있습니다.

(음악)

『 경찰관들은 포악한 태도로 나를 의자로부터 넘어뜨리고 얼굴, 손, 발이, 몸 할것없이 구타했다. 더욱 악이 바쳐서 격분이 고도에 격해 내 옷을 벗기고 억쌘 밧줄로 천장에 달아매고 참대채로 구타한것이다. 결국에 의식을 잃는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 고통이 오래가도록 간격을 두고 나서 태형을 가한다. 』

일찍이 동경 유학을 해서 최고 학교까지 나온 지성인인 김 마리아 양입니다. 양반집에 태어나서 하찮은 고생도 안하고 자라난 규수입니다. 이 아가씨를 일본에 경관들은 그토록 가혹하게 학대한거입니다. 물론 김 마리아의 태도가 너무 꿋꿋했던게 죄인지도 모릅니다. 일본인 검사 가와무라는 김 마리아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삼일운동 직전에 김 마리아가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했다가 붙잡혔을때 담당했던 검사입니다. 그리고 일년쯤 뒤에 애국부인회의 사건이 터졌을때에 가와무라는 자진해서 또 김 마리아의 담당 검사가 된거입니다.


“김 마리아는 매우 흥미있는 여자다. 그래서 이번 사건도 내가 자진해서 맡았다.”


일본에 젊은 지성인 검사는 한국의 처녀 운동가 김 마리아에게 미묘한 대결 의식을 품었던 겁니다. 일본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대결. 법정에서의 가와무라는 직업정신에서의 충실한 검사.


“ 비록 조선인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식민지 대상인 이상 기반을 벗어나고자 하는것은 국적이다. 김 마리아는 여자로서 대학까지 졸업하였고, 비범한 재질을 가지고 있는만큼 그 대담하고 오만한 태도는 이루 말할수 없었는데 더욱 가증한 것은 본직에게 심문을 당할때, 오만한 태도로 나는 일본의 연호은 모르는 사람이니 서양 기호로 말하였다.

내 생일은 1891년 6월 8일이다. 이렇게 진술하는것을 보면은 대 일본제국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신민이 아닌 비 국민적 태도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대역무도한 자에게는 특별히 추상같은 형벌로 박멸하지 안되면 도저히 황국에 안녕과 치안을 안길 수 없을 것이다. 피고 김 마리아는 인격수양과 여자교육을 보급하는 것이 부인의 취지라 하더라도 다른 피고들도 오늘은 그렇게 말하지만 경찰관이나 본직에게 종일 공술한바 에는 조선 사람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남자들이 활동하는데 여자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여자도 활동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범죄에 증거는 확실하다.

만일 피고가 오늘 주장한데로 여자교육이 목적이었다면 무슨 연고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그 회칙 제 1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라는 말이 있으며, 그 회에 사무를 일체 비밀에 붙였는가. 결사대장 적십자부장이라는 직책을 애국 부인회에 두었으니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이상 결사대와 적십자부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묻지 않아도 독립운동이라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비밀 단체인 것이다.

그 소행을 보면 얼마나 독립사상이 격렬하고 대일 사상이 농후한 것임을 알수 있으니, 이러한 자에게 일한합병의 취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베풀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대역무도한 역적들은 박멸치 않으면 안되겠으므로 피고 김 마리아에게는 5년을 구형한다.”

(음악)

김 마리아는 그렇게 용기있고 꿋꿋한 여성이었습니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감히 추측도 할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음성녹음)

김 마리아와 친척이고 동갑나이인 현재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이사장 김필례 여사의 회고담입니다.

(음성녹음)

(음악)

김 마리아. 학식과 지성이 있고 용기를 겸비했던 1920년대의 젊은 여성.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사업목적은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대주는 일. 여성들도 여성들대로 독립운동을 하되, 냉정하고 여성답게 행동한 김 마리아.

- “생년월일은?”

- “1891년.”

- “뭐? 천팔백몇년?”

- “91년 6월 8일.”

- “뭐야? (책상 내려 놓는 소리) 피고는 어찌하여 대 일본제국에 연호를 쓰지않고 서역기호를 쓰는가?”

- “일본의 연호를 몰라서요.”

- “뭐야? 그런 대답을 하니까 경찰관들에게 매를 맞지 않았나. 그 꼴이 뭔가?”

- “심문 계속하십시오.”

- “애국 부인회란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

- “인격 수양과 여자의 교육을 보급하자는 것이 주요 취지일 뿐이요.”

- “인격 수양과 교육 보급. 흠, 소위 상해 임시정부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단체이지?”

-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그래?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 이게 뭔가 봐. 이걸.”

- “아니...”

- “이게 너희 애국 부인회의 회칙아닌가? 놀랐나?”

- “흠.”

- “이 비밀문서가 내 손에 들어온 거를 보고.”

- “흠.”

- “일목 열연하지 않은가. 취지문. 회원명단, 회원조직 분포도, 사업계획서,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락망 사본, 회의록. 흠, 이건 작년 9월 8일에 안창호한테서 온 편지로이군.”

- “흠.”

- “하하하. 이래도 부인할텐가?”

- “흠.”

- “이봐 이 서류 제공자은 바로 조선인이다.”

- “흠.”

- “누구인지 알아? 너희 간부 회원이다. 누구 같은가? 너희 애국 부인회의 교제부장 오현주다.”

- “흠.”

- “하하하.”

- “거짓말.”

- “하하하. 오현주가 지금 석방된걸 모르나? 피고가 아니라 증인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 “사람도 아닌 나쁜 년.”

(음악)

『 대한 애국 부인회 수령 김 마리아는 대구 감옥에서 예심중 둔병이 생겨 음식을 전폐하고, 자뭇 위독상태에 있다하는 이미 보도한 바 있다. 예심중에 머리를 몹시 맞아 정신이 혼미하게 되었던 중 암흑하고 갑갑하고 음슥한 방안에서 병은 점점 심하여 가고 있다.』 동아일보는 김 마리아에 관한 용태를 계속 싣고 있습니다. 그 해 6월 30일자.


『 대한 애국 부인회 판결 공판. 김 마리아 3년 징역 대구 지방법원에서.』

(음악)

결국, 김 마리아는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했습니다. 애국 부인회 수령 김 마리아 보석. 병세가 워낙 위독해지자 일본인들도 김 마리아를 보석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성 복심법원에서 공소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 마리아. 그 여인은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고 앉아있지는 않았습니다. 그해 8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들어보십시오.


『 김 마리아에게 돌연 위복 명령. 그러나 김 마리아는 종적이 묘연, 경찰 당국은 크게 놀라 수색 개시.』

(음악)

김 마리아는 탈출한것입니다. 집요한 여성.


『 김 마리아는 상해에 한달전에 경성을 따라서 북경을 거쳐서 상해로 가. 위복 명령이 내리자 위복을 하여야만 될 김 마리아는 간 곳이 없다. 이 일로 인하여 당국에서는 소위 믿는 나무에 곰이 피었다는 셈으로 병에 울고 있는 김 마리아가 어디를 가랴. 멀리 간다하여도 시내에서 뺑뺑 돌겠지 하고 태연히 믿고 있던 중 김 마리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묻는 사람마다 알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음악)

김 마리아. 상해로 탈출해버린 젊은 여성은 다시한번 이 나라 국민들에게 환상을 울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치욕적은 타격을 주었고, 상해에서의 김 마리아. 혁명투사적인 기질이 강한 이 여성은 또 학구열이 대단했습니다. 남경 금능대학에 입학해서 지식을 연마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7월에는 미국으로 갔습니다. 파크빌시에 있는 파크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서 졸업. 시카고로 가서 시카고 대학 대학원에서는 문학 석사학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열렬한 행동만이 전부인 듯한 애국투사가 학원에서 지식을 연마한듯 김 마리아 양의 다른 일면이 보입니다.

1926년 초 김 마리아가 시카고 대학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법정에서 인연이 있는 가와무라 검사가 미국 시찰차 시카고에 들렸습니다. 가와무라 검사. 법정에서 대결을 원하던 일본인 검사. 김 마리아에게 5년을 구형했던 그 가와무라가. 두 사람의 재회는 극적이었습니다.

(음악)

- “벌써 십년이 되어가는군요?”

- “십년.”

- “십년이 시효라는거 아십니까?”

- “허, 십년.”

- “귀국하고 싶지 않으세요?”

- “형을 받고 도망쳐 온 범인이 아닙니까? 전.”

- “십년이 지나면 법적인 시효가 지납니다. 귀국하십시요.”

- “귀국 해야지요.”

- “조선 형편도 이제 많이 달라졌습니다. 안정이 되었습니다.”

- “독립이 가까워오겠지요.”

- “독립?”

- “조선이 영원히 독립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 “글쎄요.”

- “독립합니다 조선은. 우리 손으로 독립합니다. 조선은.”

(음성녹음)

(음악)

“내가 죽으면 사탱으로 수의를 지어서 입혀줘. 내 시체는 화장을 해서 강에다 띄워줘.”

김 마리아의 생애는 1944년 3월 13일에 끝났습니다. 뭔가 꼭 해야할 얘기 끝내 못한 채. 1년만 더 살았어도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향년 53세. 영구는 화장해서 대동강 물에 띄워졌습니다.

(음성녹음)

(음악)

나오신 분 고은정, 조명남, 해설 김영배, 그리고 음악에 김종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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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 찬가 제 1부 근세의 표정에서 김 마리아 선생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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