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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1부: 근세의 표정 - 영친왕의 결혼
제1부: 근세의 표정
영친왕의 결혼
1968.11.03 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는 68년 10월 20일 일요일아침 8시 30분부터 30분간 첫방송을 시작했으며, 증인들의 말과 전문가들의 분석 평가를 곁들여 녹음구성 스타일을 살린 본격적인 교양물로 우리 근세사를 사건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하는 계몽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찬가’는 당초 제1부 근세의 표정, 제2부 외국인이 본 한구, 제3부 미래의 한국으로 구상되었으나 제1부가 70년 4월 5일까지, 제2부가 73년 9월까지 방송되었을 뿐 제3부는 불발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수도 피아노社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제 1부 근세의 표정. 오늘은 영친왕의 결혼을 김기팔 구성, 윤화식 제작으로 보내드립니다.


『대정 9년 4월 28일. 세자 가례. 금일 가례를 시행하옵시고, 왕세자 전하의 갸륵하신 일은 금일 일본국방자 여왕 전하와 가례를 거행하시는 왕세자 전하는 경유년에 탄생하셨으니, 금년 24세 이시라. 어려서는 덕수궁 안에서 영친왕으로 학문을 닦으시다가 11세 되시던 해에 황태자로..』

192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8년전.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경찰 서장의 비밀 회의. 가례날 시위운동이 생길까 경계할 차로 작 27일에 경기도 제 3부에서는 경성내각, 경찰 서장을 소집하여가지고 시급히 비밀회의를 열었다는데, 그 회의의 내용은 절대로 비밀에 부치었으므로 자세히 알수 없으나, 모방면으로 들은 즉, 금 28일은 왕세자 가례일이라 이를 불편히 아는 일부의 조선 청년이 이를 기회로 시위운동을 행하자는 계획이 있어, 불온문서를 배겨 돌리었음으로 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하여..』

같은 면에 실려 있는 기사 입니다. 총독부의 보도 관저가 매우 심하던 때의 일입니다. 왕세자 이은 공의 결혼식.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이고, 순종황제의 아우님 되시는 그는. 한일 합방이 되기전에는 황태자로 책봉까지 되었던 인물입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이조 28대 임금이 되셨을 분입니다. 그 분이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그 배필은 일본의 황족인 나시도모니야 마사꼬여왕. 극작가 이석우씨의 말씀입니다.

(음성 녹음)

(음악)

결혼은 인간의 경사. 하물며 나라에 한 분밖에 없는 왕세자님의 결혼식은 얼마나 국민의 축복을 받을 값어치가 있는 경사인가.

(음악)

그러나 이천만이 넘는 그 당시의 이나라 국민들은 통곡으로 그 결혼식을 애도했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축복 대신에 애도의 정이 쏠린 이 기구한 왕세자의 결혼식.

(음악)

사학자 신성호 교수는 말합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일본인들. 적어도 1920년대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악랄했었습니다. 12살난 황태자를 볼모처럼 잡아다가 일본에 교육시키고, 일본 군인을 만들고. 급기야는 일본 여인과 결혼을 시키는 그 옹졸하면서도 치밀한 수법을 당시의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민들은 어떻게 그 분노를 터트렸는가. 적어도 표면적으로 그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한국인이 한숨만 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해 6월 10일. 그러니까 왕세자의 결혼식이 끝난지 두 달 가까이 지날 때, 동아일보 3면에 희귀한 기사 하나가 실려있습니다.


『동경에 조선인 폭탄 사건. 범인은 인삼장사 서상한. 예심이 종결되어 기사 금지 해지. 왕세자 전하의 가례는 조선 독립의 방해라 하여, 20세 된 인삼장사가 폭발탄을 비밀 제조하여 가례당일에 양 전하의 마차에 폭탄을 던지고 재등 총독과 세 관청도 습격하려하던 폭발단 사건의 예심을 비밀리 마치고, 세 명을 공판에 부치었다. 조선 인삼장사 서상한. 20세 된 이 자가 왕세자 전하가..』


일본 검찰 당국을 인용한 이 기사에는 서상한이라는 20살 난 인삼장사하는 청년이 왕세자와 신부를 죽일 계획으로 폭탄을 제조하다가 사전에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범인인 서상한 군을 굳이 인삼장사라고 헐뜯었고, 만들려던 폭탄도 유치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 발표문과는 달리 그 다음, 다음날의 신문에는 기자가 직접 서상한 군을 취재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서상한은 어떤 인물인가. 서상한은 대구부 서성정이 본적이오, 재작년에 동경으로 공부하러 와서 명치대학 전문부에서 경제학을 배우고, 정측 영어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 인삼 행상을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하느라고 비용을 얻기 위하여 여러 직업에 종사한 일이 있었다 하며, 수재요 미남자라. 변호를 맡은 스카자키씨는 서상한 군의 얘기를 전하는 바. “나는 결코 왕세자 궁의 양 전하에게 대하여 위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며, 다만 한가지. 내 뜻하는 일을 위하여 세상의 주목을 일으키고자 한 일입니다.”』

(음악)

표면적으로 무사히 끝난 결혼식이었지만, 이면에는 이런 사건들이 도사리고 있던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러면 결혼한 당사자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우리의 이은 공은 끝내 자기 결혼에 대해 진심으로 감상을 털어놓은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 일흔 두살의 연로한 육신. 게다가 의식불명 상태에서 성모병원 613호실에 누워계십니다. 그러나 그 부인 방자 여사. 옛날에는 마시도모미야 마사꼬 여왕전하로 불리웠고, 현재는 흔히 방자 여사라고 통칭되는 이분은. 1960년에 자서전 형식의 수기를 발표했습니다. 방자 여사는 일본의 황족으로 일찍부터 미모를 자랑해서 한때는 일본 천황의 황비로 간택된다는 설까지 있던 분입니다.

『다이쇼 6년. 1917년 가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난 어머니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놀랐습니다.

“마사꼬.”

“네?”

“이리 들어와라.”

“네.”

어머니는 한참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마사꼬.”

“네.”

“마사꼬, 조선의 왕세자님과 너와 혼인을 맺으려는 얘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

“엊그제, 하다노 국내 대신께서 우리집을 방문해 오셨다. 폐하의 어명을 받잡고 오신거야. 폐하께서는 이 왕세자님께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다는 거야. 그래서 일본의 황족중에서 비를 택한다면, 일본과 조선의 사이가 더욱더 굳게 맺어지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본보기가 된다, 이런 뜻으로 폐하께서 말씀하셨다는 구나. 마사꼬. 폐하의 분부이시니 거절할 수가 있는 일이냐. 흑흑. 마사꼬.”

“어머니.”』

(음악)

방자 여사와 그 어머니는 붙들고 통곡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쪽 가문에서도 바라고 싶지는 결혼은 아니었던게 명백 합니다. 슬픈 결혼. 눈물의 결혼.

(음성 녹음)

한국인 철학교수 신언철씨는 슬픔 이상의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음성 녹음)

1920년대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양식있는 한국인은 그 정책 결혼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남녀 대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그 결혼식이 있던 1920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늘의 젊은이들. 만일 여러분들이 그 때에 살고 있었다면 그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음성 녹음)

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왕실내지, 왕족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음성 녹음)

(음악)

1920년 4월 28일에 문제의 결혼식이 있었고, 이제 48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일본 군국주의는 패망했고, 이 나라는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해방되어도 일찍이 황태자였던 이은씨는 귀국도 못하고 일본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독재성향이 강한 이승만씨가 물러나면서야 이은씨의 귀국설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년전, 1963년에야 이은씨와 일본부인은 귀국했습니다. 열두살 어린나이에 볼모로 끌려갔던 비운의 황태자는 이미 기동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못하는 폐인이 되서야 고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귀국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일본인 부인 방자 여사는..

(음성 녹음)

YWCA 한국지부 창설 65주년 기념 바자회가 열린 곳. 단아한 모습의 방자 여사는 한국인 틈에 끼어서 자선 바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음성 녹음)

서툴지만 한국어로 쉬운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나라를 고국으로 알고, 사랑하고,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려는 현명한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 저희들의 국제결혼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이 이상 더 없는 다행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제가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 그럭저럭 자기 구실을 다 해온 만큼, 그 분의 자상한 인품에서 오는 따뜻한 애정과 포용력의 덕입니다. 난 지금도 그 분께 깊은 감사를 느끼며 그 분을 모시고, 그 분의 고국을 위해서 미력하나마 봉사하고 싶은 따름입니다.』

(음성 녹음)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방자 여사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보람을 느끼고, 남편에 대한 애정을 뜨겁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 이 왕세자 전하와 일본궁 제 1황녀 방자 전하 양위의 가례식은 작 28일에 동경 조갑한 세자 저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방자 여왕 전하..』

1920년 4월. 군국주의 일본인들에 의해 간질되었던 꼭두각시 연극은 한 민족의 통곡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국 황태자와 일본 황족의 결혼. 그러나 그 결혼은 별 파탄없이 48년간을 유지해왔고, 당사자들은 의 있었다고 회고하고 현재도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48년전. 이 나라 2천만 민중이 분노하고 서러워하던 기억은 역시 남아 있습니다. 왕가며 왕족이며 아직도 옛날의 추억으로는 남아 있듯이.

(음악)

(입력일 : 200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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