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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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태평양 전쟁
제125회 - 연합군 공세
제125회
연합군 공세
1968.03.29 방송
‘여명 80년’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동아방송은 민족사와 세계사의 재조명이라는 사명감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속 정진해 명실공히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풍요한 산실로서의 명망과 평판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동아방송의 다섯번째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67년 11월 6일부터 69년 4월 27일까지 매일 밤 10시 10분부터 20분간 방송된 ‘태평양전쟁’은 모두 457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때까지 전방송의 프로그램 가운데 청취율 1위를 계속 유지해 다큐멘터리의 강세를 확인해준 작품이다.
1943년 9월 12일. 오후.

이태리 중부지방 산악지대 상공. 독일 특수 연락기 슈트리히 1대가 서서히 남하했다.

정각 2시. 슈트리히는 높이 9560피트나 되는 크란사소스 산적에 감쪽같이 상륙했다.

이윽고, 여러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뛰어 내렸다. 그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숲속을 전진했다.

(총소리)

잠시후 크란산 계곡의 수사에는 낡아빠진 옛성에서 총성이 울려왔다.

(사람들의 발 소리)

"어? 누구냐. 너희들은."

"쉿. 나오십시오. 각하. "

"누군데 그래. "

"히틀러 총통이 보내서 왔습니다."

"총통? 오오. 총통께서.."

"빨리 나오시죠."

"으응.."

초췌하지만 아직도 눈망울이 부리부리하고 몸집이 큰 사나이가 감방을 기어나왔다.

2시 10분. 슈트리히는 감쪽같이 이륙해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착륙부터 이륙까지 겨우 10분밖에 안걸린 것이다.

(음악)

사흘 뒤. 9월 15일 도쿄. 도조 히데키의 총리실.

"총리. 무솔리니를 구출했답니다."

"뭐? 무솔리니를? 어떻게?"

"베를린 오모시마데스가 기밀 무전으로 알려온 것입니다만 히틀러 친위대가 감금된 무솔리니를

빼내온 모양입니다."

"오~ 히틀러가?"

"지난 12일이라는데, 무솔리니는 깊은 산속 옛날 요새로 쓰던 감방에 감금돼있었답니다."

"응."

"그걸 히틀러 친위대들이 슈트리히 기를 타고 가서 백주에 감쪽같이 빼돌렸답니다."

"오호~ 그야말로 귀신같군. "

"당장, 이튿날 무솔리니는 히틀러하고 장시간 회담을 했다던데."

"무슨 회담이야?"

"아직 독일측으로 부터는 아무얘기도 없는 모양입니다만은 오시마대사 얘기로는 무솔리니가

다시 이태리 패시스트 정권을 제건하지 않을까."

"쫓겨난 무솔리니가 이제 무슨 힘이 있어서 재건한단 말인가?"

"그런 움직임이 농후하답니다."

"음.."

"그래서 총리께 상의 말씀인데, 만약 무솔리니가 내각조직이라도 발표하는 경우 우리 일본이

취할 태도 말씀입니다. "

"외상 생각은 어떻소."

"역시, 또 승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도대체 이따위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쫓겨난 놈을 다시 승인한다면 우리 일본꼴이

뭐가 돼!"

"그렇지만, 독일하고 관계돼 있으니까 안할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그럼. 여태까지 우리가 국내에서나 남방, 중국 등지에서 감금해 둔 이태리 놈들은 어떻게 하고,

빼었던 무기도 있지? "

"돌려주는 도리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이이이..그 이 뱃놈, 이태리 놈들이 말썽이란 말이야!"

(음악)

일주일 뒤, 9월 23일. 외상 시게미츠가 예상했던 대로 무솔리니는 새 페시스트 정부 조각을 발

표했다. 그리고 수도는 로마에서 북 이태리 변방으로 옮겼다. 이태리에 바트리오와 무솔리니의

두개의 정부가 선 것이다. 일본은 또 무솔리니의 새 페시스트 정부를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

하고 그때까지 감금했던 이태리군을 일단 모조리 석방했다. 그리고 일본이 나포했던 이태리 함정과

무기들은 히틀러의 요청으로 독일에 양도했다.

(음악)

이태리가 패망한 뒤, 연합국측에서는 전쟁 종결후의 대두될 여러가지 문제의 처리방안이 평

화재건문제와 더불어 진지하게 논의됐다. 전쟁의 전반적인 추세로 봐서 그 무렵엔 이미 그럴

시기가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선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당시 미국에 가있던 중국 송미령 여사가 자주 만났다.

드디어 1943년 11월 20일. 연합국 수뇌들.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장개석 총통이 속속

아프리카의 카이로에 도착했다.

장개석 총통은 송미령 여사를 동반했다. 이틀 뒤 23일 저녁 8시.

처칠 수상을 제외하고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만이 단독 회의를 열었다.

먼저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총통 각하. 먼저 총통 각하께 말씀드릴것은 이 회의의 성격을 허심탄회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양국 정부와 양국 국민을 위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찬성합니다. 대통령 각하. "

"먼저, 귀국 중국의 국제적 지위문제인데, 본인으로서는 귀국이 연합국 3대국. 즉, 우리 미국, 영국,

소련 3대국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기 바랍니다. 3대국 그룹에 귀국, 또는 그 결정에 평등한

지위로서 참가하기를 본인은 희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3대국 결정에 기쁘게 참가하는 영광을 가지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은 근본적인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고 싶은데, 이번 전쟁이 끝난 후, 일본

황실의 지위문제입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키느냐. 또는 폐지 시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총통 각하의 의지는 어떠신지."

"일본에 관한 한 천황제 존폐문제는 곧 일본의 정치 형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다음 일본인 자신의 결정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서둘러서 결정을 했다가 우리 연합

국이 국제적으로 영구히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결과가 생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다음은 일본의 군사 점령 문제인데, 귀국은 이미 5년 이상이나 전쟁을 해 왔으니까

점령문제도 귀국이 주도적,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대통령 각하의 배려는 감사해 마지 않습니다만 우리 중국은 그런 중대한 책임을 맡을 준비가

아직 돼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귀국 아메리카의 지도 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중국은 그

때가서 필요에 따라 보조적 자격으로서 그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 문제는 현실적 사태가

그 후 어떻게 발전할 지 그 때가서 최종적 결정을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럼. 이 문제만은 아직 보류해 두겠습니다. 총통 각하."

"좋습니다."

"다음. 전 후의 배상문제에 대한 각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어. 아시다시피. 우리 중국은 공업이 그 발전도상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 중국에

지불할 배상의 일부는 현실적인 재산의 형태로 행해지기를 원합니다."

"현실적인 재산의 형태라면..."

"일본의 공업상의 기계설비, 군함, 상선, 차량등을 중국에 주기를 바랍니다."

"좋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음. 영토 반환의 문제는 어느 한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본이 무력으로 빼앗은 동북 4성, 소위 만슈리아 얘깁니다만 봉천, 길림, 흑룡강, 열하의

4성과 대만, 뱅어도를 우리 중국에 반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순과 대련, 2대항은 응당

이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럼, 류쿄는 어떻습니까? 류쿄와 홍콩 문제가 있는데, 귀국은 류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류쿄에 대해서는 귀국과 우리 중국의 공동 점령, 최종적으로는 국제기구의 신탁통치를 원합

니다. 그리고 홍콩 문제는 본 건을 심의하기에 앞서 대통령 각하께서 처칠 경과 한번 토의해 주

시기 바랍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홍콩 문제는 지금 이자리에서는 보류하겠습니다. 다음은 점령한 식민지 문

지인데, 조선을 비롯해서 불,영,인도, 태국등의 장래의 지위에 관해서 상호간 충분한 양해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만.."

"물론입니다. 특히, 조선의 경우는 절대 독립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여러 식민지 중에서도

조선은 가장 그 피해를 크게 입은 나라입니다."

"좋습니다. 조선, 태국 등 식민지 등은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음

연합국 통합 사령부에 대한 귀하의 의견은 어떠신지 말씀을 해주실까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국과 우리 중국의 통합 참모 본부를

창설하는 안 하고, 또 하나는 현존하는 미,영 통합 참모 회의에 우리 중국을 참가 시키는 안

말씀입니다."

"알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으니까 우리 육,해,공 참모총장

과 협의해 보겠습니다. 총통 각하의 뜻이 충분히 반영 될 것으로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통령 각하. "

이튿날 다시 처칠 경까지 합친 콩코드 회의를 열고 마침내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게 됐다.

여담입니다만은 이 카이로 회의의 기록은 어찌된 영문인지 당시 미국 국방성 외교문서 기록

집에서 발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방성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지 10년이나 뒤인

1956년에 이르러 중국정부로 부터 한문과 영문으로 기록된 회의록 사본을 얻어서 국방성 외교

문서에 수록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도 있고, 또 이것이 우리 한국의 운명을 직접 결정한

중요한 회의록인 만큼 정황한 것을 무릅쓰고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카이로 회의는 1943년 11울 23일 부터 26일까지, 나흘 동안 열렸고. 12월 1일.

미국 백악관에서 정식으로 처음 카이로 선언이 발표 되었던 것입니다. 카이로 선언 역시

우리 한국과는 중대한 관계가 있고, 또 태평양 전쟁 중 외교문서로도 귀중한 문서니까 원문

그대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카이로 선언-

루즈벨트 대통령, 장개석 총통, 처칠 수상은 각자 군사 및 외교 고문과 더불어 북 아프리카

카이로 회의를 종료하고 이에 일반적 성명을 발표한다.

각 군사 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작전에 합의를 보았다. 3대 동맹국은 그 야만스러

운 적국에 대해 육.해.공 삼군에 의한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했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억제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 지금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3대 동맹국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어떤 이득의 욕구는 물론 어떤 영토적 팽창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3대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에서 탈취. 또는

점령한 도서 및 만주, 대만, 뱅어도 등을 중국에 반환하는데 있다.

일본은 폭력으로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3대 동맹국은 또 조선 인민의 노예적

상태에 유의해서 앞으로 조선이 자유로워야 하고, 또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 다는 것을 결의

했다. 3대 동맹국은 위에 열거한 목적을 위해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는 모든 연합국과 협조할 것이며,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필요한 단호하고 지구력있는 작전을 참을성 있고, 강하게 속행할 것을

결의한다. 이상.

(음악)

(입력일 : 200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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