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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제48회 - 미국의 B17로 일본반격준비
제48회
미국의 B17로 일본반격준비
1967.12.30 방송
‘여명 80년’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동아방송은 민족사와 세계사의 재조명이라는 사명감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속 정진해 명실공히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풍요한 산실로서의 명망과 평판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동아방송의 다섯번째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67년 11월 6일부터 69년 4월 27일까지 매일 밤 10시 10분부터 20분간 방송된 ‘태평양전쟁’은 모두 457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때까지 전방송의 프로그램 가운데 청취율 1위를 계속 유지해 다큐멘터리의 강세를 확인해준 작품이다.
- B17 또는 보잉B17 2000마력 발동기 4개, 세계 최초의 4발 초중 폭격기, 날개 길이 31미터 60센치, 장비 기관총 및 기관포 7문, 폭탄 적제량 1000킬로~3000킬로까지. 이 거대한 모습을 보고 하늘의 요새 또는 하늘의 전함 이라고 불렀음.
일본군의 첫 날 폭격에서 미국은 이 B17을 17기나 상실하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후 오랫동안 큰 논쟁의 불씨가 됐다. 논쟁은 비일빈 뿐 아니라 미국 본토에 까지 번져갔다. 기회 있을때 마다 대두됐고,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까지도 그치지를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 논쟁의 초점은 자연 맥아더 사령부 항공부대 지휘관이었던 루이스 플레이튼 장군에게로 쏠렸다. 플레이튼 장군이 맥아더 장군의 B17 대피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맥아더 장군 자신도 이 논쟁에서 제외 될 수는 없었다. 맥아더 장군이 애당초 B17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44년 맥아더 장군은 자기의 의사와는 달리 미국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른적이 있었다. 그때를 계기로 논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뉴욕 헤럴드 트리비온지의 민한기자 스펜서는 몰래 공식 기록과 관계자들을 찾아 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캐봤다. 먼저 정보부를 찾아 갔다.

- 뭐 기록이라야 별거 있나요. 간단 합니다. 주식시간 전후해서 B17 폭격기들은 착륙했다. 항공부대는 폭격기에 가솔린과 폭탄을 보급하는 동안 그 상공을 전투기로 엄호하는 일에 태만했다. 반공 경비부대는 잠시도 쉬지않고 일본기가 접근하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것 뿐입니다. 간단 하지요.


- 다음 플레이튼 장군을 찾아 갔다.

- 그 당시 장군의 직책은 뭐였습니까?

- 맥아더 사령부 항공부대 지휘관이었소.

- 아 그래 맥아더 장군에게서 B17을 대피 시키라는 명령을 틀림없이 받았습니까?

- 그러믄요. 틀림없는 일이오.

- 그런데 왜 대피를 안시켰습니까?

- 난 그때 일본군 대만기지를 폭격하고 싶었소. 그래 참모장 사드렌드 장군께 부탁을 했소. 사령관께 대만 폭격 명령을 내리도록 부탁해 달라고 말이오. 그리고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소. 허가가 안된다면 민다나호에 있는 데르몬테 비행장에 대피시킬 생각이었소.


- 다음 참모장 사드렌드 장군을 청한다.

- 사령관께 대만 폭격 명령을 받아 달라는 플레이튼 장군의 청을 틀림없이 받았습니까?

- 받았소. 틀림없이 받았소. 그렇지만 난 사령관께 얘기하지 않았소.

- 왜 안하셨습니까?

- 맥아더 사령관은 그때까지 일본에 절대 선재공격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엄한 명령을 받고 있었소. 워싱턴 고위층으로부터 말이오. 그러니까 사령관께 얘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오.


- 다음 맥아더 장군을 찾아 갔다.

- 플레이튼 장군이 퍽 난처한 입장에 있는데 각하의 견해는어떠신지 알고 싶습니다.

- 전혀 진상을 모르는 소리요. 비일빈에서 플레이튼이 지휘한 공군 병력이라는 것이 그저 이름뿐인 보잘것 없는 것이었소. 연습기 하고 아주 낡아빠진 비행기를 제외 하면은 B17이 35기, 전투기 72기에 불과했소. 그런데 또 플레이튼에게 불행한 것은 비행장이 없었소. B17중 폭격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비일빈 전역에 크라크 필드 오직 한군데 밖에 없었소. 전투기가 설수 있는 곳도 5군데 밖에 없었소. 건설적인 것은 많았지만은 전쟁이 일어난 12월 8일엔 아직 모두 미완성이었소. 그래서 연료보급 이라던가 여러가지 경비를 위해 착륙하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공격을 받았던 거요. 그러니까 관계자들의 태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요.


- 맥아더 장군은 언제나 플레이튼을 변호하는 입장에 있었다. 다음 파피건 육군대령. 그는 개전초 크라크 필드 기지에 자주 출입 했었다.

- 그당시 상황을 좀.

- 한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플레이튼 장군이요.그는 퍽 좋은 사람인데 그가 직접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른 일이 있지 않았소. 장군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지만 그때 이런 소문이 나돌았소. 맥아더 장군이 B17을 크라크 필드에서 떠나면 안된다고 명령 했다는 것이오. 이건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것을 반대하는 일부 정객들이 고위층 군인들을 조정 하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는 것이오. 그렇지만 난 그때 맥아더 장군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을 모르고 그때 B17 일부는 이미 민다나호선 테르몬테 비행장에 있었는데 크라크 필드에서 테르몬테에 가서는 안된다는 명령 따위가 있을리가 없지 않겠소.

- 나는 그때 테르몬테에 있었소. 거기서 B17을 봤소. 16대인가 17대 있었소. 그리고 크라크 필드에도 17대인가 18대 있었소. 그런데 일본군 공격에서 17대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소.


- 이 건 대령의 증언은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플레이튼 장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데르몬트와 크라크 필드 두 비행장에서 같이 봤다는 B17의 수, 그리고 그가 봤다는 시간 등 모호한 점이 많았다. 데르몬트와 크라크 필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그가 같은 시각에 봤을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펜서는 더이상 추긍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맥아더 장군.

- 플레이튼 장군이 대만 폭격을 요청 했다던데 거기에 대해서 좀.

- 난 그때 일본에 대해서 먼저 선수를 써서는 안된다는 상부의 엄명을 받고 있었소. 비일빈은 미국 송령이었지만 전쟁에 관한 한 국제적으로는 중간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비일빈 사람들은 물론 비일빈 정보당국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나 개인의 생각으론 비일빈이 일본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소. 비일빈 사람들은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워싱턴 당국의 명령은 아주 명확하고 강경한 것이었소. 일본군이 공연하게 도전해오기 전에는 절대 선수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소. 설사 그런 명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먼저 일본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실제적으로 불가능 하오. 유일한 방법은 일본에 공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우리 공군력은 일본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소. B17이 겨우 35, 36기 그리고 유일한 목표가 일본 대만기지인데 이건 거리 관계상 불가능 했소. B17이야 물론 대만 폭격이 가능하지만은 전투기가 엄호할 수 없었던 것이오. 루손도에 있는 우리 항공 전진기지는 아직 불안정 했고, 우리 전투기의 행동 반경으로써는 불충분 했소. 즉 일본의 비행장이나 전투기는 아주 우수했고 또 일본측에는 항공모함이 있었는데 우리 비일빈 공군은 항공모함이 없었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비일빈 해역 이외에서 전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소. 아니 공격보다도 난 B17의 안전을 위해서 크라크 필드에서 민다나호 데르몬트 비행장에 대피 시키도록 명령 했소. 그 대피가 끝나기 전에 공격을 받았던거였소.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은 그때 플레이튼은 내 참모장이었소. 사드렌드 장군께 대만 폭격을 요청 했다는데 설사 내가 직접 들었다 해도 난 거부했을 것이오. 틀림없이 거부했을 것이오. 워싱턴의 명령과 다르고 또 그것은 적의 우세한 공군력에 대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야.


- 다음 위로비 장군. 위로비 장군은 오랫동안 맥아더 사령부 정보부 부장을 지냈고 맥아더 전기의 작자이다.

- 저 B17의 손실에 대해서 한말씀 부탁 합니다.

- 일부 인사들 중에 크라크 필드에서 B17 16기를 상실한 것을 가지고 진주만에서 전함을 잃은 것과도 같은 중대한 손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은 그것은 전혀 비교도 안되는 일이야. 플레이튼 장군이 가지고 있던 공군력은 참 딱할만치 보잘것 없었고 그것이 비일빈의 전국을 좌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다시 맥아더 사령부 정보부 기록.

- 플레이튼 장군의 제의대로 대만 공격을 감행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저 그 기록을 좀.

- 네. 만약 B17을 대만 공격을 위해 발진 시켰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전과는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대만 다카오 부근에는 많은 비행장이 있었다. 그것을 일회의 공습에서 모두 격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도리어 미국 항공부대는 그 진주만에 내습했던 것과 같은 아주 성능이 우수한 일본 전투기 수백대가 충돌해서 손해가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끝으로 일본 해군소장 도미오카의 증언. 도미오카는 개전당시 해군군령부 제일과장이고 비일빈 공격작전회의에 참가한 한 사람이다.

- 만약 맥아더 장군이 500이상의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비일빈 공격을 단념했을 것이다. 일본은 오랜 경험에서 재공권을 장악 하자면 공군력 비육이 3대1로 우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일빈 작전에 우리가 투입한 공군력은 육군기 307기, 해군기 444기, 총 751기 였다.

- 하늘의 요새 B17, 하늘의 전함 B17 이에 대한 논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입력일 : 200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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