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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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태평양 전쟁
제41회 - 말레이 공격작전
제41회
말레이 공격작전
1967.12.22 방송
‘여명 80년’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동아방송은 민족사와 세계사의 재조명이라는 사명감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속 정진해 명실공히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풍요한 산실로서의 명망과 평판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동아방송의 다섯번째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67년 11월 6일부터 69년 4월 27일까지 매일 밤 10시 10분부터 20분간 방송된 ‘태평양전쟁’은 모두 457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때까지 전방송의 프로그램 가운데 청취율 1위를 계속 유지해 다큐멘터리의 강세를 확인해준 작품이다.
- 각 소대. 각 소대. 각 소대. 시속 8킬로. 등화를 켜지 마라. 전차 사이 거리 10미터. 사격 준비. 각 소대. 각 소대. 각 소대. 감속. 시속 4킬로. 전차 사이 거리 8미터. 사격 개시.

- 1942년 2월 6일 23시 30분 일본군 진지를 기도한 시마다 전차대는 하룻밤 사이에 영국 인도군이 자랑하는 스인진지를 돌파하고 말았다. 정글과 고무나무 숲속에 은폐되어 있는 영국군 인도군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전진했던 것이다.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 휘하 25군의 마레이 저켠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한 부대가 이 시마다 전차대였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들으시는 이 일본어 방송은 그 당시 시마다 전차대장의 전투실황 얘기를 NHK 일본 방송국 와다 아나운서가 낭독한 것입니다. 그럼 시마다 전차대장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교량이 파괴됐기 때문에 더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군과 인도군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 다음 다리가 또 파괴돼 있다.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무슨 새로운 전법을 써야 겠다. 그래서 우선 영국군 인도군 진지에 보병을 구축하고 일본군 보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공병대가 교량을 수리했다. 말할것도 없이 영국군과 인도군은 습격해 올 것이지만은 야간에만 적전 작업을 했다. 교량 수리가 끝나면 전차를 투입했다. 다음 전차 뒤로 트럭을 탄 보병을 투입했다. 그 다음엔 대포, 이러한 모든 준비가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보병이 영국군 인도군 진지에 야습을 감행 했다. 야습을 하면 반드시 점령할 수 있었다. 진지 하나를 점령하면 이미 후반의 교량은 완성돼 있으니까 더 많은 부대를 한꺼번에 투입해서 공격할 수 있었다. 어떤때는 영국군과 인도군 그리고 일본군 부대가 한테 어울려서 서로 분간할 수 없었다. 거기 트럭과 전철까지 밀어 닥쳤다. 이렇게 적과 우군이 한테 어울린 기묘한 혼성 부대가 진격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국군 항공부대도 우군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폭격을 가할 수 없었다. 졸바르 수도까지 철저하게 이 전법으로 밀고 내려갔다. 이 적군 속 깊숙히 뛰어들어 한 덩어리가 된다는 제멋대로의 전법이 뜻밖에도 크게 주요했다. 영국군 인도군은 전선경비부대에서 아무 연락도 없는데 갑자기 검은 황소알 같은 일본군 탱크가 나타나고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시커먼 일본 병정들이 토치카에 육박했다. 이 전법이 영국군 인도군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다시 이 일본어 방송은 그 당시 야마시토 도모유키 장군 휘하 25군의 작전참모였던 스치 마스노부의 중자의 말을 역시 와다 아나운서가 낭독한 것입니다.
마레이 작전, 싱가폴 공략에 있어 작전상 중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고심한 점은 무엇인가. 또 일선 병사들이 어떻게 활동 했는가를 말하겠다. 처음 상륙지점에서 싱가폴까지의 거리는 약 1천 500킬로 대체로 도쿄에서 시모노세키간의 거리와 맞먹는다. 상륙작전에 약 1개월 걸린다고 보고 석달 쯤에서 즈홀바르시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싱가폴 공략에 2,3주간을 잡았다. 이 작전이 아주 뜻대로 유리하게 전개됐을 때 상륙 개시일 부터 싱가폴 공략까지는 대체 100일쯤 걸리리라는 것이 시초 일본군의 목표였다. 12월 8일 산전의 조서를 받았으니까 그때부터 계산하면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이 된다는 것이 일본군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든지 작전을 더욱 빨리 진전시켜 기원전인 2월 10일까지 싱가폴을 함락 시키고자 했다.

이 일본어 녹음은 그 당시 일본 대번영발표를 녹음한 것입니다. 그럼 다시 우리말로 옮겨 보겠습니다.
1942년 2월 1일 오후 6시 마레이 반도를 진격중인 제국 육군부대는 작 1월 31일 저녁 그 선봉으로서 싱가폴 섬 대안에 진출했다. 상륙이레 55일 주파한 전 거리는 약 1천 100킬로, 선박 및 함정 기동거리 약 650킬로, 교량수리 약 250, ... 실로 92회에 이르렀다.1942년 2월 8일 졸바르 시까지 진격해간 일본군은 8일 24시를 기해 졸바르 수도 도하작전을 결행했다. 졸바르 수도는 싱가폴 밖 졸바르 시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그 넓이는 700미터에서 1킬로, 그 바로 건너에 있는 싱가폴은 총 면적이 570평방킬로 섬 전체가 견고한 요새지로 구축돼있고 영국군 인도군을 비롯해서 오스트레일리아군 스코틀랜드군 등 혼성부대 8만여명의 병력이 집결 돼있었다. 그리고 이 졸바르 수도에는 졸바르 시와 싱가폴을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 있었다. 일본군이 졸바르 시에 돌입하자 졸바르에서 저항하던 영국군은 다리를 건너 싱가폴로 철수했다. 그것도 아주 질서 정연하게 철수했던 것이다. 영국군이 먼저 다리를 건넜다. 그 뒤를 인도군 오스트레일리아군 그들이 따랐고 끝으로 스코틀랜드의 아킬연대가 건너갔다. 이 아킬연대는 거의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90명 가량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피리를 연주하며 건넜다. 대열 맨 끝으로 연대장 마키중장이 뒤를 따랐다. 그 순간 졸바르 다리는 폭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으로 싱가폴과 마레이 반도는 절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졸바르 도하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군 종군작가 사토무라 긴조의 수기를 잠깐 추려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전신 흙과 물에 뒤범벅이 된 채 도하이점 뒤에 있는 언덕에 엎드려 도하가 ...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콜은 그쳤지만 싱가폴의 주유 탱크가 폭발해서 온통 검은연기로 흐린 밤하늘은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름이 끼치는 포탄이 지나가는 소리 흡사 염주를 한 알씩 훑어가듯 쉴 새 없이 밤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포탄이 지나가는 바로 아래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는 물론 기침소리조차 엄금돼 있었다. 나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오직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1942년 2월 9일 마레이 방면 제국 육군부대는 작 8일이레 적의 저항을 배제하고 졸바르 수도를 건너는데 성공 했으며 견고한 보루 싱가폴 요새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1942년 2월 9일 오후 5시 5분 마레이 방면 육군 최고 지휘관은 육군중장 야마시타 도모유키.
이 일본어 방송 역시 그 당시 싱가폴 공격 실황 녹음 입니다.
1942년 2월 10일 오늘은 싱가폴 총공격 제3일째 입니다. 아침녘에 봤을때 싱가폴 3국은 영국 인도군 진지에서 솟아오르는 포염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졸바르시 상공도 그 포염때문에 태양빛을 잃어 흡사 흐린밤을 연상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들으시는 이 포성도 그 당시의 생생한 실황녹음 입니다. 영국군의 포성과 인도군의 포성이 서로 엇갈리면서 들리고 있었습니다.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세 사람의 사병이 엎드렸습니다. 100미터 전방 입니다. 사병들은 육교 기슭에서 적정을 정찰하던 정찰대원 입니다. 위험해 합니다. 영국군의 포탄이 소름을 끼칠듯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 포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일본군이 싱가폴을 공격한 때의그 포성 입니다. 침략자 일본군이 싱가폴을 공격한 때의 그 침략의 포성 입니다.

(입력일 : 200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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