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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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태평양 전쟁
제37회 - 일본의 극동함대 작전
제37회
일본의 극동함대 작전
1967.12.18 방송
‘여명 80년’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동아방송은 민족사와 세계사의 재조명이라는 사명감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속 정진해 명실공히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풍요한 산실로서의 명망과 평판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동아방송의 다섯번째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67년 11월 6일부터 69년 4월 27일까지 매일 밤 10시 10분부터 20분간 방송된 ‘태평양전쟁’은 모두 457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때까지 전방송의 프로그램 가운데 청취율 1위를 계속 유지해 다큐멘터리의 강세를 확인해준 작품이다.
- 오! 존 대위. 기연이오. 음? 이렇게 만나는 것도 깊은 인연이라는 말이오. 음? 자, 앉으시지요. 음? 존 대위. 앉으시오. 어떻소, 존 대위. 자, 담배. 뭐 거북해 할 건 없소, 존 대위.

- 바로 장군이었군. 비열하게 기습해 온 것이.

- 오, 기습이라니. 아니 귀국과 우리 일본은 이미 선전포고가 내렸는데 존 대위는 아직 몰랐던가?

- 음.

- 어떻소, 존 대위. 우리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 한번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볼까요?

- 허심탄회요?

- 사슬이 불편한 모양이군. 아 연대장.

- 네.

- 존 대위 사슬을 풀어주지.

- 네.

- 아니, 풀거 없소. 그냥 두시오.

- 존 대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어떻소.

- 소원이라면 좋소. 뭐든지 물어 보시오.

- 먼저 저수지 경비를 어떻게 하고 있었소. 부대 배치상황 말이오.

- 내 중대는 병력이 100명 정도밖에 없었소. 그래서 전 토치카 진지에 배치할 수는 없고 세 군대만 일개소대씩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워 두었소.

- 진지 경계는 어떻게 했소.

- 각 소대별로 자기 토치카 주위를 경계시켜서 성문 저수지 댐엔 경비병을 배치시키지 않았지요.

- 않했소. 그 댐은 아주 중요한덴데 장애물도 없고 경비병도 배치시키지 않았다는건 좀 소홀했구만.

- 그렇소. 일본군이 비열하게 특히 옛 친구인 장군이 그렇게 비열하게야 습격을 해오리라곤 생각치 못했던 거요.

- 존 대위, 말 조심해.

- 아 괜찮아. 괜찮아, 스티븐. 그래 어젯밤 우리 일본군 야습은 어떻게 알았소.

- 처음에 총성이 들렸소. 그리고 토치카 입구에 있던 보초가 적이라고 보고해서 알았소.

- 그래 어떻게 했소.

- 일본군은 토치카 총구와 출입구에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에 안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소. 그리고 대대장 한테선 후퇴 하라는 명령이 왔소.

- 그럼, 왜 후퇴하지 않았소.

- 후퇴할 도리가 없었던 거요. 출입구를 막고 있으니까.

- 그럼 일본군이 돌입했을 때 왜 저항하지 않았소.

- 저항이요? 중기는 다 부서지고 저항할 도리가 없었소. 그래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있었소. 그런데 일본군은 손 들고있는 내 부하들을 모조리 찔러 죽였소.

- 닥쳐! 거짓말이야, 존 대위.

- 대경, 난 대영제국 장교요. 거짓말은 알아.

- 닥치지 못해?

- 장군, 내 얘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그 토치카에 가 보시오. 내 부하들이 어떻게 죽어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 있는가.

- 스티븐.

- 네.

- 데리고 나가게.

- 네. 일어서.

- 장군, 장군의 이런 우정 잊지 않겠소. 반드시 보답할 날이 올것이오.

- 나가. 빨리 기어나와. 서라. 뭐? 대영제국의 장교? 대영제국이야. 어이 보초.

- 네.

- 이 자를 가둬라.

- 네.

- 들어가.

-음.


- 성문 저수지 진지를 점령한 23군은 구령반도 전면에 걸쳐 노도와 같이 진격해 갔다. 성문 저수지 진지를 무모하게 점령한 수색대원들을 무조건 철수 시키고 수색대장 와카바야시 중위를 엄벌에 처하라고 하던 군사령부의 명령이 마침내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와카바야시 중위는 엄벌 대신 군 최고의 영애인 훈장까지 받았다. 토치카 안에서 손을 들고있는 영국 병사들을 무차별 학살한 그 공헌으로 말미암아 훈장까지 받았던 것이다. 홍콩 공격을 개시한지 닷새째 12월 1일, 일본군은 구령시가 일각에 돌입하고 포병부대는 홍콩시에 포격을 가했다.


- 여기는 국경에서 15킬로, 구령까지는 20킬로, 반도 동해안 대보라는 시가지 부가. 파괴된 도로를 수리하고 지뢰를 파내고 사보댐과 파인애플의 무성한 숲을 지나 진격하는 일본군. 그의 일본군 포병은 엄호사격을 했다.
청취자 여러분이 지금 들으시는 이 녹음은 그 당시의 생생한 실황녹음 입니다. 따라서 포성과 자동차 소리 그리고 부대가 진격하는 소리도 그 당시의 생생한 실황녹음 입니다.
12월 17일 홍콩 공격의 포성이 갑자기 그치고 영국군 측에 항복을 공고하는 일본측 군사절이 들어왔다. 군사절은 참모 타다 육군중자와 고도 해군중위 그들을 태운 발동선이 파도를 가르며 구령항구에 가 닿았다. 타다 참모 왼손에는 하얀 종이 케이스가 쥐어져 있다. 홍콩 영국 총독이 일본 사령관에게 보내는 친서이다. 예스냐 노냐 그 대답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윽고 배가 부두에 닿았다. 타다 중자가 마이크 앞에 섰다.
홍콩의 영국군 복서 참모는 일본군이 무서웠던지 오지 않았다. 영국군이 항복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대답은 이 친서를 열어봐야 알 것이다. 그러나 홍콩에 상륙해서 일본군이 느낀 인상은 총독이하 모두가 하루속히 홍콩시를 일본군에게 내줄 생각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다만 대영제국이라는 면목 때문에 일본군이 한 사람이라도 홍콩에 상륙하지 않는 한 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청취자 여러분, 이 말은 그 당시 일본의 육군참모 타다 중자의 육성 입니다. 거의 전문 그대로 소개했습니다만 그 당시 일본군이나 일본인들을 생각을 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영국측 홍콩 총독은 영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만은 총독이하 전 영국군이 하루속히 홍콩을 일본의 손에 넘기겠다고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속히 항복하고 싶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 군부나 일본인들의 판단 이었다. 오만불순하다고 할까. 독선적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무렵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은 아무래도 좀 정상이 아닌것 같았다. 또 백보를 양보해서 영국군이 정말 빨리 항복하고 싶어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국군은 아직 전쟁 준비가 돼있지 않았던 것이다. 구령반도의 가장 중요한 진지인 성문 저수지에는 100명정도 극히 소수의 경비병이 있었을 뿐 대다수의 토치카는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또 홍콩 공략전이 끝난 뒤 포로가 된 영국군 참모 복서 소령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영국군은 극력 전쟁을 피할 생각이라고 증언 했으며 이어 아주 불가피했을 경우 3월 말에 가서나 겨우 전투태세를 갖출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홍콩에 일본군은 진격해 갔고 맹렬한 포격을 가했으며 홍콩 시민에게까지 무차별 포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럼 여러분 또 다음 전투실황 녹음을 들어 보시지요. 이것은 일본군이 홍콩 시민에게 무차별 돌격을 가한 실황 입니다. 특히 연약한 부녀자들이 포격을 당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본군은 쐈습니다. 그들이 쏜 포탄이 홍콩 건물에 명중했다. 삽시간에 불꽃이 일어나고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일본군은 홍콩 시민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홍콩시 수도 수원지를 공격했다. 수원지 저수지에 근무하고 있던 중국 민간인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수돗물 공급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홍콩의 영국군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12월 28일.
지금 들으시는 것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던 홍콩에 무자비한 포격을 가하고 침략자 일본의 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이 홍콩에 입성하는 실황 녹음 입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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