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신당 결성한다카는 움직임 들었소? 죽산.
- 예, 신문을 통해 읽었습니다.
- 참여할 마음 없소?
- 글쎄올습니다.
- 우리 민국당은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신당에 참가키로 했소.
재야 세력이 모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니 죽산도 참가하소.
- 글쎄올시다. 말씀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만 제가 참여하는 데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주동한 인물 중에 해공이야 저를 환영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반대할 걸요?
내가 공산당이라고 생각하는 극우파 인사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아, 동암 선생께서야
저를 이해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죽산 조봉암과 동암 서상일. 1954년 말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신당은 범 야당세력을
규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신익희, 조병옥 등이 이끄는 민주국민당 세력,
전 국무총리 장면이 이끄는 가톨릭계열 정치인들, 그리고 국회 내 곽상훈 부의장을 비롯한
순 무소속 의원들. 또 그리고 포섭대상으로 된 세력이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혁신세력.
문제는 이 혁신세력에 있었습니다.
- 『나는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을 때부터 조봉암 씨의 정치적 행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봉암 씨는 남로당 헤게모니 쟁탈전에 있어가지고 군정의 폭력 정복을 반대했던 까닭에
박헌영에게 패배당하야 반간파로 몰렸던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요
그의 저서 당면과제에서는 사회주의자로 자처를 하면서 자기의 정치적 이념이 변함없음을
밝혔던 것이다. 』
조병옥의 회고록 중에 한 귀절입니다. 조병옥뿐 아니라 신당을 준비하는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반공투쟁의 혁혁한 공로자들인 극우파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조봉암의 입당을
개인적으로 찬성하는 인물이 드물었습니다. 조봉암, 하여튼 간에 이 나라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인물. 그의 경력을 우선 살펴봅시다. 조봉암은 1898년 강화도에서
출생했습니다. 신익희와 조병옥보다 두 살 아래입니다. 그는 고향인 강화도에서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군청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올라와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공부했습니다.
(사람들의 함성)
1919년 3.1운동. 스물두 살 난 조봉암은 만세운동에 참여, 1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 중앙대학 정치과에서 1년 공부했습니다.
그때 그는 흑도회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1925년 스물일곱 살 난 이 청년은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했습니다.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됐습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에 갔습니다.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주의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스크바에 간 길에 그곳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노농총연맹, 조선총동맹을 조직. 문화부책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다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에 임명됐습니다. 공산주의자로서 쟁쟁한
인물로 되어갑니다. 이어 소위 ML당을 조직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7년간의 복역. 7년간이나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도 역시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검거됐습니다.
그때는 다행히 8.15해방이 와서 출감했습니다. 해방 뒤, 조봉암은 인천에서 치안유지회,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 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습니다. 해방 뒤에도 계속 공산주의잡니다.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조봉암은 박헌영과의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공산당의 파괴행동에 대한 의견 차이였습니다. 조봉암은 그래서 공산당을 탈당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리고 초대내각의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한 것입니다. 이승만이 어떻게 조봉암을 기용했는가.
이승만이 귀국해서 아직 돈암장에 있을 땝니다.
(차 소리)
어느 날, 이승만은 비서 윤석오를 데리고 남산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습니다.
- 기분이 풀리는군. 그런데 이봐.
- 네.
- 그... 주머니에 있는 책이 뭐야.
- 아, 네.
윤 비서가 읽다가 급히 주머니에 넣고 온 작은 팜플렛.
(종이 펼치는 소리)
-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조봉암. 조봉암이라는 사람이 누군가?
- 네, 엊그제까지 공산주의자였는데 탈당하고 전향한 사람입니다.
- 그래...? 그 내용이 뭐야?
- 네, 조 씨가 자기주장을 말한 것인데 좌우익 합작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국제정세에 비추어서
논쟁했습니다.
- 좌우 합작?
- 네.
- 원칙적으로는 옳은 얘기지. 조봉암이라는 사람 이상주의자로구만.
현실적으로는 안 되는 얘기야. 공산당에서 탈당을 했어?
- 네. 얼마 전에 탈당했습니다.
-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알겠구만. 안다면 탈당을 해야지.
이렇게 이승만은 조봉암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 제헌국회가 개원되고 이승만이 의장을 지낼 때.
- (마이크 음성 소리)공산주의, 공산주의, 무조건 배격만 하고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이론적 무장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건설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자, 농민 문제에 있어서 공산주의를 능가한다는 실적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은 공산주의의 이용물이 아닙니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역시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세력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조봉암의 색다른 연설이 이승만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국회 본회의가 끝난 후.
- 조봉암 씨.
- 아, 예.
- 인사합시다.
- 예.
- 연설 잘 들었소. 삼천 만 동포에게 좌우익 합작을 부르짖었다지?
- 아, 예. 전 공산주의를 좀 알고 있기 때문에.
- 아하하, 내가 알아. 앞으로 대 공산주의 투쟁에 있어서 자네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이야.
(음악)
그리하여 조봉암의 초대내각의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됐습니다. 1950년 2대 국회에도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1952년 피난시절,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어 대통령직선제가
처음 실시됐을 때 조봉암은 당돌하게도 이승만에 맞서서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이 압도적인 다수로 당선됐지마는 조봉암은 79만여 표를 얻어 차점을 했습니다.
이시영, 신흥우 등을 누른 차점입니다. 그리고 1954년 5.20선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던
그는 등록방해로 못하고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사사오입개헌 파동이 일어났고
야당이 총 단합해서 신당을 만들려 하고 그의 정치적 비중이 커서 신당의 포섭대상으로 된 것.
(음악)
조봉암은 한국적 정치풍토에서는 확실히 기이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야당계 인사들로서도
취급하기 곤란한 인물이었습니다.
- 조봉암 씨는 신당에 넣으면은 신당의 이념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 우리 당의 이념이야 대다수 의견에 따르는 것이지. 한 개인을 따를 수야 있습니까?
그건 염려 없을 겁니다.
- 신당에 참여할 의사는 있는가요?
- 아... 범야정당이니까 자기도 한몫 끼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더군요.
- 그래요...? 그러면 그분을 꼭 신당에 넣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면이 조봉암의 포섭을 계속 따지고 들었습니다.
- 아, 뭐... 특별한 이유랄 거야 있습니까. 야당세력의 총 단합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렇지요.
- 그러나 공산주의자하고야 어떻게 같이 당을 합니까.
(입력일 : 201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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