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마이크 음성 소리)그러면 표결에 들어가겠습니다. 표결하기 전에
감표위원을 선정해야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 의장이 선정하시오.
- 의장이 선정하시오!
- (마이크 음성 소리)의장에게 일임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의 없으십니까?
- 이의 없다!
- 그러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매 열에 한 분씩 호명하겠습니다. 나와서 수고해 주십시오.
제1열에 최창섭 의원, 2열에 최병국 의원, 3열에 김창수 의원, 4열에 김재곤 의원, 5열에 정중섭 의원,
6열에 박준길 의원. 이상 여섯 분 나와주세요.
이미 오후 4시가 지난 시각. 1954년 11월 27일, 토요일.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 의장.
- 왜 그러세요?
- 5열, 6열 감표위원 변경하겄습니다.
- 어떻게요?
- 5열에 박종길 의원, 6열에 이철승이가 맡겄습니다.
- 그러면 그렇게 해주세요.
- (마이크 음성 소리)투표함과 명패함을 봉하겠습니다. 호명에 의해서 투표를 개시하겠습니다.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온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개헌안 표결이 시작됐습니다. 오후 4시 22분.
- (마이크 음성 소리)신익희 의원.
(발자국 소리)
- 아아, 흠. 아, 그만들 해둬요. 그만들.
해공 신익희의 투표 차례가 오자, 카메라의 플래시가 집중되었고 투표 분위기는 점점
열을 띠어 갔습니다. 4시 45분. 투표를 시작한 지 23분 만에-.
- (마이크 음성 소리)투표 안 하신 분 없으십니까? 다 했을 것 같으면 명패함과 투표함을 폐쇄합니다.
투표 완료.
- 그래도 여전히 암호투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 뭐야?! 그렇게 야단을 했는데 여전히-.
- 고위층의 지시대로 맹종을 하고 있는 거죠.
- 어허, 망할 자들 같으니라구.
- (마이크 음성 소리)지금은 명패함을 열어서 명패 수를 점검합니다. 명패 수는 202.
이백 둘입니다. 지금은 투표함을 열겠습니다.
- 예정대로 잘돼가고 있습네다. 의장 각하.
- 아직도 개표를 해봐야 알지.
- 보나마나 뻔하디요. 거 뭐 지령대로 잘 움직이고 있시요.
- 기래? 다행이군.
- 안심 푹 놓으시고 인젠 돌아가셔도 되갔습네다.
- (마이크 음성 소리)투표 수도 명패 수와 202로 부합됩니다. 그러면 개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이제 판가름이 난다. 제3대 국회 개원 이래 숙제이던 개헌안. 국민투표제. 대통령 책임제 강화,
그리고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에 한해 얼마든지 집권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조항이 들어 있는 개헌안.
- 가, 좋습니다. 또 가.
- 문제없소이다.
(사람들의 환호성)
감표위원인 자유당의 최창섭 의원이 통과는 문제없다는 중간신호를 자유당 의원석에 전해지자
환호성이 일어났고 3분지 2인 136표는 무난히 확보될 것인가. 꽉 메운 방청객들, 그리고 의사당 바깥
마이크 밑에 모인 시민들의 얼굴에는 초조하고 우울한 표정들이 스쳐가고 있었습니다.
- 아... 안심해도 괜찮단 말이지..
- 예. 현재 상태라면 3분 2는 무난할 듯싶습니다. 돌아가셔서 쉬시죠, 그만.
- 아니야, 난. 이 의장실에서 결과를 보는 대로 경무대에 들어가야지.
- 기쁜 소식을 각하께 전해드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 기래야지. 아... 오늘부터야말로, 오늘부터는 잠을 좀 자야겠어. 이 소식을 전해 드리면 각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 각하 측근에서도 지금 표수를 계속 확인하고 있을 것입니다.
- 기러시겠지. 각하, 이 한마디면 끝나는 게야, 각하, 그러면 각하께선 ‘기붕이, 자네 수고가 많았어.’
아... 그리고 그만... 그밖에 무슨 얘기가 또 필요하겠나. 난... 눈물이 나오겠지. 각하... 그런 데에 비해선
그 한마디뿐. 아... 내, 내 임무는 끝났어. 전쟁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아테네로 뛰어온 그 병사처럼
난 숨이 차 소리칠 뿐이겠지. ‘각하, 각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각하!!’
(문 두드리는 소리)
- 예.
(문 여닫는 소리)
- 아...
- 여보!
- 어...
- 다 통과됐다면서요?
- 어, 그래서 지금 곧 경무대로 들어가서 보고를 올리려는 참이에요.
- 아하하하.
- 각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 아, 승리죠. 승리. 아...
(문 여닫는 소리)
- 의장님, 각하!
- 아, 왜? 무슨 일이오?
- 의장 각하!!
- 왜 그래?!
- 무슨 일이에요?!
- 아니, 장 의원. 왜 그러십니까?
- 으으흑...
- 아니...?!
(음악)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개표완료. 그런데 사회를 맡은 부의장 최순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만을 연거퍼 빨아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발자국 소리)
- 아니, 최 의장님.
- 오, 이 총무. 이 일을 어찌하죠?
- 음, 어떤 놈이디요?! 배신자 누군겨?!!
- 아, 떠들지 마세요.
- 내레 분하고 원통해서 못 살갔수다!! 의장 각하께서는 지금 기절하셨시오. 이 소식 듣고 기절하셨시오!!!
어떤 놈이야요?! 한 놈!! 딱 한 놈!!!
- 아아, 진정하십쇼.
- 발표는 어쩌죠?
- 사실대로 하는 수밖에 없죠. 의장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 기절하셨대니깐요!!!
- 아.. 어쩌지. 일을 어쩌지...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사회자 최순주 부의장은 투표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음, 부결인 모양입니다. 선생님.
- 음, 그렇지. 그러니까 발표를 못하고 있지.
- 아... 그러면 그렇지, 하늘이 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지. 해공, 우리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야겠어!!
- 응, 유석, 유석. 하늘이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어. 이 민족, 이 국가를 버리지 않았어. 아...
- (마이크 음성 소리)투표결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재석 202인. 가에 135표, 부에 60표.
기권 7표. 개헌안은 부결됐습니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
- 만세!!!
- 하하하하!!!
부결. 개헌안 부결. 야당 의원들은 발을 구르며 만세를 불렀고 거기 방청객들도 호응.
그리고 바깥에서 마이크 앞에 귀 기울이고 있던 수천 시민들도 일제히 함성을 질렀습니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
(음악)
생각해보면은 제정신 가진 시민들에게 이 소식은 꿈만 같았습니다. 개헌안 부결.
그것이 부결되리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자유당이 한다면은,
이승만이 한다면은 불가능이 없던 시대. 금전으로 매수하고, 폭력으로 협박하고,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그것의 인간의 수단이라면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해내는
자유당 수뇌부들의 짜이고 짜인 치밀한 계획. 암호투표까지 행한 그 개헌안 표결이
부결되다니. 그것도 한 표차. 단 한 표차. 1954년 11월 27일 토요일 오후 5시 7분에
판별된 이 쇼킹 뉴스. 개헌안은 부결됐습니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시도한 개헌안은
드디어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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