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뉴델리에서 신익희와 조소앙이 만나서 남북협상을 했다고 떠들어댄 소위 뉴델리 사건.
그 사건의 공개적인 발설자 함상훈은 16년이 지난 오늘, 조병옥이 오히려 최초의 발설자라고
진상을 털어놨습니다. 조병옥은 물론 고인이 된 위대한 정치인입니다.
조병옥 박사의 측근이었던 전 국회의원 이상돈 씨가 거기에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 『신당추진이 순조롭게 돼감에 따라서 나는 민국당 중앙상무위원회에
수차 보고를 하였으며 그 후도 곽상훈 씨를 통하야 2대 국회 때에 원내 자유당 의원이었던
대부분의 인사들도 가입할 가능성이 있다 하는 것을 들었고 또 상당수에 달하는 청년들도
신당 창당에 승낙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병옥 박사의 회고록 중에 1절입니다. 1954년 10월이 자유당으로서 개헌안 통과가
당면의 과제였다면 야당은 범야당, 즉 새롭고 강력한 정당 하나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던 땝니다.
그런데 10월 말경, 돌연히 뉴델리 사건이라는 회오리바람이 이 나라 정계에 불어 닥쳤던 것입니다.
조병옥 박사의 회고록을 계속해 읽어 보면은-.
- 『그리하야 그해 10월 중에는 신당 발기의 전망이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당발기 준비에 대하야 곽상훈 씨와 의논한 결과, 그 당시 국회에 제출됐던 개헌안이 처리된 뒤에
신당발기 준비회 또는 신당발기대회를 개최하자하고 서로 합의가 성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절풍처럼 휘몰아치는 사사오입개헌 파동은 드디어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해 10월과 11월에 걸쳐서 이 나라의 가장 큰 사건은 물론 사사오입개헌 파동입니다.
그러나 거기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으로서 뉴델리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병옥은 뉴델리 사건 얘기는
그의 회고록에 한 줄도 안 쓰고 있습니다. 400페이지나 되는 비교적 자세한 회고록에서
뉴델리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당, 즉 범야당 창립이 개헌파동 때문에만
지연되었다고 했는데 단순히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시는 뉴델리 사건으로 인한
신익희와 조병옥의 대립으로 야당 단합이 어려웠던 것은 아닌가.
(음악)
- 『다음은 뉴델리 사건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1966년에 낭산 김준연은 ‘나의 길’이라는 작은 책자를 냈습니다.
- 『1954년 3월 16일로 기억한다. 그날 저녁에 조병옥 씨 댁에서 민주국민당 간부급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다.
조병옥 씨는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해 말하기를, 내 판단에 의하면 ‘신익희 씨가
인도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이 사실을 내가 조작했다고 말한 사람이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봐야겠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사건이 한창 떠들썩해 있을 때 일반에서도-.
- 함상훈이는 하수인이라는군. 그 뒤에는 김준연이가 있대.
- 아니, 그럼 자유당 사람들이 만든 게 아니구?
- 응, 진짜 조종한 사람은 김준연이래.
이런 얘기들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또 그 뒤에 조병옥이 있다는 얘기는 떠도는 듯하다가
묵살됐습니다. 김준연 씨는 물론 현재에도 생존해 있어서 같은 내용을 주장합니다.
(음성 녹음)
(음악)
다시 주인공 함상훈 씨의 증언.
(음성 녹음)
(음악)
그리고 신익희 측에서도 뉴델리 사건은 조병옥 측의 공작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 아니, 영감을 죽일려고 칼을 갈고 있는 자가 둘이나 곁에 있는데 그걸 가만히 놔둡니까?
- 어허, 그게 무슨 소리.
- 아니, 그자들을 멀거니 보고만 계시겠어요?!
- 무슨 얘긴가? 아녀자가.
해공을 죽일려고 칼을 갈고 있는 두 사람이란 조병옥과 김준연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됩니다.
해공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고 계획적으로 꾸민 공작이라고 그 측근에서는 해석을 했고
해공 당사자는 함구불언했습니다. 물론 해공 자신도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 남이 시켜서 했으면 멍텅구리요 자기 스스로 했다면 소인배지.
이런 얘기까지는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해공의 정치생명에 관계될지도 모르는 큰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유당
일당 독재의 뿌리가 박혀가고 있는 때에 거기 견제세력이 되어야 할 야당이 분열될
위기에까지 놓인 사건인 것입니다. 해공의 고민은 거기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음악)
뉴델리 사건에 조병옥이 관련됐다는 얘기는 함상훈, 김준연 두 사람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진상을 알고 있을 대부분의 인사들은 난처한 듯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곽상훈 씨의 증언이 있습니다. 당시 무소속 의원으로서 국회에 부의장을 하고
있던 곽상훈 씨는-.
(음성 녹음)
(음악)
이미 고인이 되었고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 유석 조병옥입니다.
그의 결단력, 투쟁력, 그리고 인품은 영웅적이었다고 기억됩니다. 해공이 위대했다면은
유석 또한 위대합니다. 곽상훈 씨의 논평대로 유석으로서는 꼭 한 번의 실수가 뉴델리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유석으로서도 이 사건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런데 이 나라 정치인들은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려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측근의 인물들 또한 고인을 욕되게 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은 숨겨줄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뉴델리 사건은 우리나라 정치풍토를 알 수 있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숨길려고 하는 풍토.
신처럼 완전무결한 듯한 인상만을 줄려고 하는 정치인들. 이런 풍토에서 대중은 속고 통치받아야 하는 것인가.
뉴델리 사건은 그러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야당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조장한 계기가 되었는가.
그 수습과정에서 우리는 해공 신익희와 유석 조병옥의 위대성을 보게 됩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