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가을, 천고마비의 계절이요, 등화가친의 때.
그런 중공문자와는 상관없이 한국의 가을은 확실히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저 높고 푸른 하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기온. 한국의 가을은 일품의 계절.
그 가을. 1954년 가을은 그러나 아름다운 계절이 못 됐습니다. 추악한 계절이었습니다.
- 이자들이 개헌을 한대. 개헌.
- 이 박사가 종신집권한다면서요?
- 늙은이가 노망을 했지. 에~이.
개헌 문제, 그리고-
- 젠장, 담배값 올린대.
- 아이구, 그러면 어떡해.
- 아,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데 관영요금부터 올려놓으면 금년 연말 물가는 어찌 되나? 에이그, 굶어죽으라는 소리지. 관영요금 인상이 그 가을에 획책되었고 더구나 -
- 이봐, 미국이 휘발유를 끊었대.
- 휘발유를 끊다니요?
- 아, 휘발유! 우리나라에서는 한 방울도 안 나잖아. 미국이 줘야 하는데 미국 측에서 화가 났나 봐. 휘발유를 끊었다는 게야. 이젠 자동차도 못 댕기는 거야.
- 아이구, 그럼 모두 걸어 댕겨야 해유?
- 에이구, 정치를 어떻게 하는 건지.
혼조를 둘러싼 한미 양국의 대립으로 유류 공급이 끊어졌고 1954년 가을은 우울한 계절.
(음악)
1954년 가을은 일반 국민들에게만 우울한 계절은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 최고 집정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
- 각하, 전혀 진전이 없사옵니다.
- 진전이 없다면 일본에서 사란 말인가? 끝내.
- 어떻게 된 일인지 미국 측에서는 바이 저패니스 방침을 절대 양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 미국 정부에 친일파들이 많아서 그래.
- 좋습니다. 내 미국인들을 향해서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할 참이요.
(음악)
- (마이크 음성 소리) 전쟁에 전적으로 파괴당한 우리나라를 우리민족의 자발적 결심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 번 더 각오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를 재건하고 부흥해나갈 계획을 미국 측과 합의하여 추진해나가고 있는 바인데 친일하는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어서 한국이 받을 원조금을 한 푼이라도 더 일본에 떨어트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나간 7, 8년 동안에 미국이 한국 경제 부흥을 위하여 많은 금전을 허비하였는데 우리 경제 부흥에 요소 될 만한 것은 하나도 해 놓은 것이 없다. 그러한 고로 지금 미국인들이 우리와 시비하는 것은 일본의 생산물품을 우리가 보이콧 한다는 까닭으로 우리를 비평해서 우리에게 주는 원조는 할 수 있는 대로 일본인에게 주기를 노력해온 까닭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필요한 비료, 시멘트, 석탄 등의 생산과 전기발전시설, 그리고 어업발전과 같은 사업은 하나도 착수하지 않고 또 착수도 못하게 하였으며, 일본물건을 사다가 쓰게 했다. 매년 사천 만 달러씩 들여서 일본에서 사다 쓰게 하는 것이다. 이 비용을 우리가 1, 2년만 얻으면 한두 해는 비료 없이 지나도 그 돈으로 비료공장을 만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외국에서 비료를 사들이지 않고도 살겠다는데 미국인들은 절대로 막아오면서 우리들에게 권유하는 말은 비료나 시멘트를 만들면은 경비가 더 많이 든다고 하고 일본에서 사오면은 편하고 싸다고 핑계하며 막아온 것이다. 이렇게 막아온 것은 만일 우리가 공장을 설치하면 일본 물건을 팔아먹을 곳이 없어지는 고로 막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결심하기를 만일 미국인들이 우리 경제 부흥을 위하여 금전을 주겠다면 그 원조금을 우리에게 완전히 주어서 쓰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아주 다 일본에게 주라고 말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원조를 하는데 시시하게 굴지 말라고 정면으로 미국인에게 도전. 일본 물건만 자꾸 사다 쓰라니 그렇다면은 아예 원조금을 모두 일본에게 주어라. 이승만은 또 한 번 스트롱맨의 면모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얻은 것은 미국 측의 유류 공급 단절. 휘발유 공급을 중단해버려서 교통을 마비시키자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은 양쪽이 모두 유치한 작전이었지마는 하여간에 국회에서 승용차 안 타기 결의까지 해야 했던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음악)
- 여보, 여보?
- 응?
- 왜 그래요?
- 어... 아, 아무 것도.
- 당신 몸이 말이 아닌가 봐. 그렇게 아프세요?
- 몸이 아니라 아픈 것은 내 마음이야.
- 네?
이 나라 제2인자의 위치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이기붕에게도 그 가을은 우울하고 아팠습니다.
- 그까짓 일 가지고 뭘 그러세요?
- 난 이제 사면초가야. 자유당 의원들까지도 내게 반란을 기도했어. 아... 정치란 이런 것인가.
- 정치가 이렇지 그럼 어때요? 그러니까 정치는 가장 남성적인 스포츠가 아니에요?
- 스...포츠?
- 스포츠라고 생각해야죠. 배은희 영감이 또 고개를 쳐든다죠?
- 응.
- 단방에 KO를 시켜버리지. 그걸로 그냥.
- 75 대 62. 이러다간 개헌도 뭐도 없어.
- 음...
- 기운을 내세요. 기운을.
- 음... 음.
-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는걸.
(음악)
- 아... 가을. 한국의 가을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군. 저 하늘, 비엔나의 하늘이 못 당할 한국의 하늘이야. 마리아.
- 네, 국모님.
- 아니, 마리아. 왜 그래? 무슨 고민이 생겼나?
- 아... 아니올시다.
- 마리아, 난 마리아의 표정을 보면 마음까지 읽을 수 있어. 뭐야, 괴로운 일이?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해결을 해야지.
- 흑... 국모님.
- 마리아, 미스터 리가 요새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지?
- 흐윽... 국모님.
(음악)
- 앞으로 배은희는 경무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어놨어.
- 아, 예. 사모님께서는 역시.
- 그러니까 마음대로 배은희를 탄압해버려. 그 추종자들?
그따위 조무래기들은 공갈을 쳐버려.
- 예.
- 어... 내가 직접 배은희를 만날까?
- 아니... 당신이 왜?
- 직접 담판을 짓는 거죠, 뭐. 쓸데없는 짓하다가 몸을 상하기 전에 입후보 사퇴를 하라구 정면으로 얘기해주는 거예요.
- 안 돼. 그러다가-.
- 여보, 의장님. 뭐가 두려우세요?
- 그렇다고 당신이 나서면 되오?
- 아, 제가 나설까요? 의장 각하.
- 아니야, 다른 사람을 시켜야지. 치안국장을 시켜서 점잖게 타일르라고 그래. 그러나 될까? 끝까지 입후보 사퇴를 안 하면 어쩌지?
- 아, 그러면 선거에서 눌러버리는 거죠, 뭘.
- 하여간에 배은희 하나가 아니라 75명, 게다가 원외세력도 있기에-.
- 원, 걱정도 많으슈. 음, 곧 치안국장을 불러요.
- 예, 음.
(음악)
(잔 부딪치는 소리)
- 아... 야당만이라도 결속을 하면 개헌 통과는 저지됩니다. 여러분 야당 의원들을 초청한 내 뜻을 알아주십쇼. 미장그릴, 신익희 의원 주최로 야당 의원들이 모였습니다. 당면한 개헌 통과 저지.
- 아... 개헌 통과까지 시키는 날에는 이 나라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옵니다. 지금 이 박사 정치하는 꼴 보세요. 노망기가 완전히 나타났습니다. 한미 경제 관계도 그래요. 외교가 공갈과 거짓말로 됩니까? 휘발유가 없어서 조금만 있으면 전국의 교통망이 막힐 판이에요!
물가, 이런 식으로 물가가 오른 것도 내버려둘 수가 없어. 이 박사한테 아첨하는 무리들은 잘 살고 거 그놈 밑에서 치보하는 것들은 ‘잘돼갑니다, 잘돼갑니다.’만 연발하고 전 국민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때에 이 위기를 우리는 잘 판단해야 합니다!
-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슨 혁명단인가 뭔가 요새 서울 시내에다가 벽보다 삐라다 붙이고 뿌리고 야단인 모양인데 그 내용인즉슨, 김상돈이 역적이다, 역적을 죽여라! 이거야 부산 정치파동의 동생이 아니라 오히려 형님뻘이 됩니다! 정치파동 혁명 같은 것을 또 획책하는 모양이에요! 아, 이런 때 우리 야당이 결속 안 될 수 있습니까?! 김상돈이 맞아죽는 거야 좋습니다. 나라가 타살당할까 봐 두려운 거예요! 몇몇 놈들이 이 나라를 죽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김상돈 의원, 연설 그만해.
- 아하하하하.(모두)
- 가을 되면은 새, 짐승들도 털을 벗지 않습니까. 물론 털을 벗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 야당 세력도 모든 것을 일체 탈각하고 공동 연합 전선을 펴야 합니다.
- 아, 창낭도 그럼 개헌 반대로구만.
- 예끼, 이 사람!
- 어, 창낭 만세! 박수, 박수, 박수!
- 아하하하하! (모두)
(박수 소리)
(음악)
(입력일 : 201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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