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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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실록구성 다큐멘터리 정계야화
6화 - 양우정 의원 구속사건
6화
양우정 의원 구속사건
1970.10.10 방송
70년 10월 5일 밤 10시 5분부터 방송을 시작한 ‘정계야화’는 동명의 대담프로그램을 드라마 타이틀로 부활시킨 20분짜리 실록구성물로 6·25이후 한국정치사의 이면에 갇혔던 뒷얘기를 캐내 대단한 청취율을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은 73년 1월 당국의 규제조치에 따라 폐쇄되었으며, 80년 4월에 부활될 때까지 7년 동안을 동면해야 했다.
(사람들 웅성거림)

- 어떻하지? 양의원.

- 어떻하긴. 여러 동지들의 뜻에 달렸지.

- 감옥에 가긴 싫겠지.

- 음..

10월 17일 토요일. 민의원 의사당.

(나무치는 소리 - 탕탕탕!)

- 지금 개회하겠어요. 제 58차 회의를 개회합니다. 좌석 정돈해 주세요. 보고 사항을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10월 17일 부로 정부로 부터 양우정 의원 구속에 관한 건이 제출됐

습니다.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

- 단기 4286년 10월 17일. 국무총리 백두진. 민의원 의장 신익희 각하. 양우정 의원 구속에

관한 건. 수제직권에 관하여 민의원 양우정 의원은 정구근 사건에 관련되어 있어, 군 수

사 기관에서 구속하고자 하오니 국회에서 동의하여 주시기 바라기를 자의양망 하나이다.

(음악)

양우정 의원 구속 동의. 양우정이라면 세칭 족청계. 원내에서 한 때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휘둘렀던 인물. 이 인물의 구속을 정부에서 요청해 온 것입니다. 간첩 정구근과의 관련.

이미 세상에서는 그 쇼킹한 뉴스를 듣고 의논이 분분했던 때입니다. 그 날은 토요일 부의

장 윤치영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당사자 양우정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아니, 엊그제 까지 대단했던 자기의 세력을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려고 하려는가.

의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 보고한 바로 마찬가지로 양우정 의원 구금에 대한 동의를 요청한 서류가 온 것을 여러분

이 들으셨는데, 이 사건의 조사위원으로서 서범석 의원이 먼저 중간보고가 있다고 해서 언

권을 드립니다. 서범석 의원 나와 보고해 주세요.

(발소리)

- 아, 지금 의장께서 이 사건에 대한 수기로서의 중간보고를 한다고 소개 했습니다만 이 것

은 중간보고가 아니라 양우정 의원에 관계되는 부분만을 우리가 표결하는데 참고로서 특위

가 그 재료를 제공하는데 그친 것이올시다. 그것은 정구근이라는 간첩이 6.25 이전부터 대

한민국에 와가지고 여러가지고 간첩 행위를 하다가 이것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일시 도피

했습니다. 그 정구군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은 그 뭐 조사위원으로서 발표할 때 구체적인 보

고를 하겠습니다만은 그 당시 일본으로 도피할 때, 양우정 의원이 경영한 연합신문의 특

파원이라는 합법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던 것이올시다. 에, 우리 조사위원회에서 양우정

의원이 우리 진영에서 상당히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그러한 간첩에게 합법성을 이용해

주었다는 어떠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안되냐 하는 생각 아래서 이 점을 특히 조심스럽게

규명 했던 것이올시다. 그러나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만 하여간 양우정 의원이

경영한 연합신문사에 특파원이 되가지고 일본에 갔던 것이올시다.


거물 간첩 정구근의 뒤를 봐주었다는 혐의. 세도 정치인이요. 언론기관의 운영자로서의 양우

정 의원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타격은 양우정 일 개인의 뿐만아니라

족청계라는 하나의 세력이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이룬 타격이었습니다. 당사자 양우정이

지켜보는 가운데 토론이 진행되고, 비밀 회의를 열고, 도주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

현역 국회의원을 구속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는 기운도 감돌았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양

우정의 표정에도 그 어떤 희망이 엿보였습니다. 하여간에 이 민의원 의사당을 흔들었던

실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토론은 길었습니다. 좀체로 결론이 안났습니다. 사회자는 신익희

의장으로 교체되었고, 0시 5분에는 비공개 회의로 들어갔고, 그리고 무기명 투표.


- 에, 투표 결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재석 의원수 149위. 가에 120표. 부에 18표. 기권

11표. 그래서 양의원의 체포 동의안은 가결 되었습니다.

(땅땅땅)

- 의장!

(음악)

족청계라는 이름의 세력은 불운했습니다. 이렇다 할 동정도 못 받으면서 가을 잎 처럼 떨

어져 갔습니다.

(음성 녹음)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세력의 판도는 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음악)

- 탄원서.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

- 이런거 나 수없이 받았어. 나 이승만일 숭배하고 보좌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으며, 간절

하다는 탄원서.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자들이 감히 나를 숭배를 한다고? 안되지.


아무리 숭배하는 마음이,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은 무엇 하는가. 이미 내 사랑

그대의 마음은 내게서 떠나고 만 것을. 족청계는 시련을 상처의 아픔을 안고 사라져 가는

연인처럼 쓸쓸히 이승만의 곁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음악)

족청계는 자유당을 떠났습니다. 이승만은 그의 뜻대로 자유당을 개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1월 22일.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 했습니다. 노회한 그 정치인 다운 그 성명서.


- 나는 오늘 가능한 조속한 시일 내에 외세의 압력 없이 민족 자결 원칙에 입각한 선거가

완전하고도 만족스럽게 시행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시민이 남한 시민

과 더불어 대통령 선거를 시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선출하고자 하더라도 그 것은 완

전히 자유인 것이다. 북한 전 시민의 뜻이 북한에만 국한된 선거시행이 아닐때, 내가 전

국을 통한 투표를 승인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완전한 선출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남북한 통일 선거를 시행함에 있어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해도 괜찮다. 언뜻 들으

면은 얼마나 관대한 발언 같아 보이는가. 그 사흘뒤인 11월 25일에는 그 설명을 부연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중공군이 철수한 뒤에는 북한군이 원한다면은 남북 총선거를

하자. 그 때 만일 다른 사람을 뽑아도 좋다. 남북통일이 이미 좌절된 때에 남북 총선거를

새삼스럽게 인정하다니.


- 이박사가 난 분은 난 분이여. 통일을 해야지. 암.. 통일이 제일이여.

- 통일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되어.


이런 소박한 감동도 불러 일으킨 성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남북이

라는 어휘보다 선거라는 어휘입니다. 선거. 그렇습니다. 그 이듬해인 54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56년에는 대통령 선거. 당시 헌법으론 대통령중임제

가 못 박혀 있었음으로 이승만은 56년까지만 대통령을 하고 물러나야 할 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그 당시 마지막 임기를 채우고 있는 대통령.


- 아니, 그럼 이승만이 또 해먹어 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어떻하겠다는거야? 남북한 통일

선거를 하면 대통령에 또 출마하겠다? 통일 선거가 안되면? 음.. 아무래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통일의 염원을 빌어서 영구집권을 슬쩍 비춰본 고등단수로 해석되지 않을수 밖에 없는 이승

만의 담화였습니다. 이승만은 북한 동포라는 말을 잘 이용한 정치가 였습니다. 북한 동포가

바란다던가, 북한 동포를 위해서라던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승만은 북한 동포라는

말을 써먹었습니다. 따지고 보면은 그의 영구집권과 북한 동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러나 이승만의 논리로는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일시적이나마 거기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음악)

(입력일 : 200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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