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향토무대. 일곱 번째 시간. 유흑렬 편극, 양녕대군. 안평선 연출로 보내 드립니다.
(음악)
이 강산 산하를 누벼온 역사의 뒤안길에서 배달겨레의 얼을 찾아보는 향토무대.
오늘은 왕세자의 몸으로 거짓 미친 체 하던 양광의 폐세자 양녕의 모습을 새겨보자.
- 어찌 안 된단 말이오?! 태상왕께오서도 이 나라를 개창하셨으나 보위에 겨우 7년간 머무르셨소.
경들도 생각해보오. 이제 과인은 연만했으니 보위를 동궁에게 넘기려 하는 거요. 세자가 이제 컸으니
과인은 뒤에서 뒷배나 보아주고 싶으오.
- 좌의정 하륜 아뢰오. 전하, 연부역강하오신데 세자마마께 전위하시긴 아직 이른가 아뢰옵니다.
마마, 영을 거두옵소서.
- 신, 이화 아뢰옵니다. 국가조찬이 불과 스무 해도 못 됐으니 나이 어린 동궁께 전위하심은 불가한 줄 아뢰오.
아직 어두운 밤길을 걷듯 성은에 힘입고 살아가는 억조창생을 전하는 더욱 보살피심이 가한 줄로 아뢰오.
- 신, 조영무도 어명을 거두시옵기 아뢰옵니다.
(음악)
왕은 어전에 부복한 백관들의 얼굴을 묵묵히 쏘아봤다.
(음악)
- 음... 너희들이 과인을 위함보다도 정녕 한 번 뒤집히는 것을 두려워하는구나. 아하하하하.
오늘의 권두가 좋아서, 권두가 좋아서.
대왕의 용안엔 활활 타듯 붉은 입술 위로 뜻 모를 미소가 빙그레 올라갔다.
때는 이조 제3대 태종 17년. 이윽고 용안에서 웃음을 거둔 왕은 승전빗을 따라
일렀으며
- 과인은 진정리, 경들은 더욱 생각해보오.
내전으로 왕은 들어갔다. 휘는 방원. 이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고초 끝에 3대 왕으로 오른 보위를
지키기 17년. 곤전에게서 네 아들과 네 딸을 보고 빈과 후궁들 몸에서도 스물 하나나 되는 군과 옹주를 본
다복한 왕은 이제 보위를 세자에게 넘기려 한다. 그날 밤, 사동부원군 민제의 큰 사랑에는-.
(음악)
- 쉬이, 동궁저하 납시오.
스물셋 홍안의 양녕세자가 납시었다. 마침 모여 있던 외숙 무구, 무휼들이-.
- 저하, 세자저하. 강령하옵셨습니까.
-세자저하, 이제 보위에 오르신다죠?
- 임금 되는 것이 그리 좋으오?
- 이를 말씀이오니까. 남아가 이승에 태어나서 백성을 잘 다스려 보아야
만세에게 이름을 되날릴 수 있는 법이죠.
- 저하도 영특하신 기질로 선정을 베푸셔서 후세에 왕명을 남겨주시오, 저하.
- 내 아직 나이 어려 무슨 힘으로 천하의 덕치를 배우겠소? 여러 외숙들이 잘 보호해야 되겠소.
- 아, 그야 염려 없소이다, 저하. 소신 네 외숙이 받들자오면 무슨 일인들 못하오리까?
- 동궁으로 옥새까지 나리셨다죠? 세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비록 지금의 대왕의 국구인 처남매부사이이나 민무구, 무질, 무휼, 무회 형제들은
그 기상이 범 같은 태종의 위력에 눌려 감히 외척의 권리를 부려볼 수 없었다.
마침내 상감의 전위로 어린 세자가 보위에 오르기만 하면 벼르고 벼르던 대권을
한번 흔들어 볼 수도 있으련만.
(음악)
이튿날, 어전회의에서는 양사 대관들의 간절한 항소로 마침내 대왕은 전위의 뜻을 거두고 말았다.
그날 어전회의에서 부원군 민제가 돌아오자,
아버님, 어떻게 됐습니까? 안정이 흐리시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
- 무휼아, 어머님 들라 해라.
- 동궁께서 선위를 받자왔습니다?
- 음...
- 대감.
- 부인, 이리 좀 앉구려.
- 동궁께서는-.
- 상감께선 밀지를 거두셨소.
- 아니! 예?
- 아니, 그럼 동궁은!
- 하는 수 없구려. 상감께서 전위교서를 거두셨으니 더 세월을 기다릴밖에.
(음악)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고 전위문제는 이제 사그려 들려는 무렵. 하루는 원로종친 이화가
의전에 부복하여 상소하기를.
- 상감마마께 아뢰오. 자고로 종실이나 외척들이 정사에 참여하면 국강이 흔들린다
하였사옵니다. 근자 듣자옵긴 민무구, 민무질 등 민 씨 형제들이 세자를 싸고돌며
어서 대권을 나눠 받길 고대한다 하오니.
- 뭣이!! 뭐라 한다?!
- 심히 황공하오나 종사를 어지럽히는 줄 아뢰오.
(음악)
원로종친 이화의 한마디는 활화산에 불을 당기듯 동궁인 양녕세자에게 전위까지 하려던
대왕의 금도를 뒤흔들어놓고 말았다.
- 안 된다! 불가 감히 과인 앞에 누가 있어? 태상왕 전하, 이 땅 위에 개국하신 사직을
흔들어 보겠단 말인고! 잔망타, 잔망해. 여봐라!!
- 예.
- 민문 일족을 잡아들여라!
- 예.
(음악)
드디어 친국이 시작되었다. 왕은 차마 처남인 외척들을 학대하지 못하고 사동에 자주 드나들던 임우와 신금례를
가혹하게 다뤘다. 민제의 네 형제 중 형 둘이 잡혀간 무휼은 동궁에 뛰어들어 세자 양녕에게-.
- 저하, 살려주십쇼. 우리 형제들은 세자의 앞날을 위해서 충성을 바치려던 충심밖엔 없었는데. 저하.
- 그러니 내 언제 외숙들께 임금으로 내세워달라 했소! 공연한 소문만 퍼트려 아바마마께 나는 어찌 되겠소?!
양녕은 젊은 세자다웁게 일단 냉염히 외숙 무휼을 돌려보냈으나 어릴 때 자라난 외가를 잊지 못해
조심조심 부왕의 처소에 나아가-.
(종소리)
- 아바마마, 민무구, 민무질 두 형제는 죄가 없사온 줄 아룁니다.
- 아니, 동궁.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일은 중간에 공신들이 서로 이간키 위해 만든 일일까 하옵니다. 마마.
그러나 세자의 탄원은 그만 대왕의 노여움만 더했다.
- 동궁, 동궁은 아직 내 눈이 시퍼런데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니 외가에 말 심부름이나 하는 동궁의 꼴이
가관이구나. 동궁, 동궁이 정 대위에 앉고 싶으면 내 오늘이라도 기꺼이 내주마! 여봐라!
- 예.
- 어디, 이 민가를 두둔하는 동궁 앞에서 필시 일당일 저 신금례를 매우 쳐라!
- 예.
- 아바마마!
- 더욱 쳐라!!
- 예.
(음악)
나라의 기틀은 외골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상감의 지엄한 법통을 태종은 왕세자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 나라의 만년대계를 이룩하기 위해선 비록 사가로는 국구이나 법통 위에 넘실대는 외척이 있어선 국권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왕은-.
- 임우와 신금례는 처형하고 이후 민 씨 일문은 평민들과 혼인하되 무구는 종성으로 그리고 무질은
해남으로 내쳐라!
드디어 새 왕을 등에 엎으려던 민 씨 일문은 뿌리 뽑히고 말았다. 그로부터 동궁 양녕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새 지저귀는 소리)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새 지저귀는 소리)
- 오, 왕의 길은 뭔가...
(새 지저귀는 소리)
오늘도 수척한 얼굴에 고개를 떨어뜨린 왕세자 양녕은 후원을 돌아 동궁전을 나온다.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0
- 오, 희빈마마, 또 맞았사와요.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및 웃음소리)
내정엔 봄볕에 겨운 항아들이 백자항아리를 가운데 놓고 투호놀이가 한창이었으나
궁전의 춘색도 잊은 듯 멀어지던 양녕의 발걸음이 문득 머물렀다.
- 쉬이-
- 동궁저하. 어디를 납시옵니까.
- 어, 효령인가.
- 봄볕이 좋아 매사냥이나 나갈까 하옵니다.
- 효령, 잠깐.
- 그렇지.
- 저... 내 하나 묻겠는데. 왕자의 도, 그 왕자의 도란 무엇인고?
- 저하, 소제는 모르옵니다. 다만 저하께서 뒷날 보위에 오르시면 그때나 이제나 봄철엔
겨울난 뭍짐승을 사냥하고 여름엔 꽃놀이오, 가을엔 달을 우러러 만끽하는 것이 소인의 길일까 하옵니다.
- 꽃놀이에 달을 우러른다?
- 그렇사옵니다. 이 철엔 뭍짐승을 후리는 일이옵니다. 저하, 그럼 소인 다녀오겠습니다.
- 뭍짐승을 후린다...
뭍짐승을 후린다고 까불까불 별배들에 휩싸여 근정문을 나서는 효령의 뒤에서
멍청하게 서 있던 양녕이 이른 것은 셋째 왕자 충녕대군의 사저였다.
- 동궁저하 납시옵니까.
- 충녕, 오늘도 만곤서한에 쌓여 있구려.
- 아직 미흡할 뿐이오니다.
- 내 하나 물으리까? 충녕, 그-.
- 무슨 말씀이온지?
- 왕자의 도란 뭐요?
- 동궁저하께 여쭈올 말씀이오이다.
- 충녕은 열여덟인데도 내 어른 같구려.
- 위로 아바마마와 세자마마를 섬기고 있는 충녕이옵니다.
- 세제, 왕자의 도란 뭐요?
- 태산 같아 흔들리지 않고, 바위 같아 더욱 푸르른 외나무길. 그곳엔 뒤바라봄도 없고
외눈으로 걸어갈 수도 없는, 오직 밝고 정대하고 공명한 길이올까 하오니다. 저하.
- 밝고 정대하고 공명의 도라...
(음악)
- 과연 밝고 정대하고 공명한 왕자의 길을 나는 갈 수가 있을까... 지엄하신 아바마마.
보좌를 위해선 아우와 형을 도륙했다는 아바마마. 대왕, 내 생가인 외가까지 몰락시킨
대왕. 그 아바마마께 진정 승복하려 해도 내 이다지 못하거늘, 장차 이 나라의 임금으로
억조창생을 끌어갈 수 있을까. 아바마마께 불효한 아들이 그 대위를 이어받을 수 있을까?
밤새도록 전전하던 동궁은 새벽녘 홀연히 무릎을 쳤다.
- 양광, 동궁이란 무어냐.
외척의 일로 아직도 용안을 찌푸리신 상감. 그 상감께 대관들은 또 언제 어느 때 정배 간 외종들이
두둔하던 동궁 자신을 모함할까. 인간사 기약 없다 생각한 동궁.
- 아하하하하하...
(음악)
- 세자저하, 어디로 납시오? 책방에서 기다린 지 오래외다.
- 음하하하하하, 책은 읽어 뭣 하나요?
- 예?
- 대감, 책을 읽어 뭣하오? 책 속에 할아버지가 있습디까?
- 아니, 저하. 세자저하.
-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 이 무슨 변괴론고? 아니, 이이이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
- 자, 이번엔 내 차례니라. 꽃살을 다오.
- 마마, 또 곱게 맞치시와요.
(사람들의 웃음소리)
- 희빈마마, 다섯 살 모두 쏙쏙 넣으시와요.
- 쏙쏙 넣다니, 경망하구나.
(사람들의 웃음소리)
- 아니, 저기 동궁마마께옵서.
- 아하하하하하하하.
- 동궁이?
- 어... 동궁, 이리 오시오.
- 아하하하하하하하.
- 어두운 데 조심하시오, 마마.
- 무슨 말씀이온지...
- 햇빛이 어둡지 않소, 마마? 무슨 욕을 하고 계시오. 아하하하하하하하!
- 동궁! 놀라운 말씀 거두시오!!
- 항아야, 내가, 내가 그리, 그리 좋아? 아하하하하하하!
- 동궁!!
(음악)
삽시간에 수라장이 된 내정 투호장. 상감은 우상 조영무 등을 통해 이 말을 전갈 받았으나
웃어넘기고 며칠 뒤, 다시 비원 숲길에서 열 서넛 하나 항아의 손목을 잡히니 대왕은-.
- 내 동궁을 경연에 묶어보려 늦게 두었더니 안 되겠구나... 경들은 곧 세자빈을 간택케 하오.
- 예.
(음악)
초간택, 두 번 간택, 세 번째 간택. 50일 행사를 보름으로 줄여 중추부사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들였으나 양녕은 본 척도 않고 여전히 실성거린다.
- 신, 이화 아뢰오. 근자 동궁께오선 주먹을 쥐고 하늘을 치는 일이 잦다 아뢰오.
- 그래도... 동궁이 그럴 리는 없소... !
- 하륜 아뢰오. 동궁은 적수 없는 것을 일체 폐하시고 궁성 밖을 무상출입하신다 하옵니다.
- 양녕... 양녕아!
(음악)
아바마마, 이 길은 떳떳한 양녕의 길이오이다. 흠도, 티도 없는 왕자. 충녕.
충녕에게-.
- 으흐흐흑...
- 아이, 깜짝이야.
- 누구냐?!
- 아닌 밤길에 뉘시냐 일러라.
- 소리가 곱다. 뉘 댁이냐 일러라.
- 전엔 강계기생이나 이젠 어엿한 중추부사댁 소실이다 일러라.
- 응? 중추부사 소실이라... 아하, 헤, 아하하, 윽, 아하하하!
(음악)
이 끔찍한 일을 곧 조정안을 놀라게 했다.
- 윽? 무엇이라? 양녕이... 곽정의 소첩을...!
사헌부의 폐세자 상소는 꼬리를 물었다.
- 신 조영무 듣자옵긴 근자 둘째 세자 효령께서 학업 정진한다 하오니 세자위를 내려주심이
가할까 하옵니다.
이 소식은 동궁 빗을 타고 나는 듯이 동궁의 귀에도 들어갔다.
- 아하하하하... 효령. 어리석은 효령아. 아하하하하... 조랑말 타고 까불기나 하던 니가 갑자기
진중해졌다고? 으으하하하... 음... 상감을 속이다니!
맥살없이 웃어 제치던 양녕이 그로부터 한식경. 효령 잠저에 다녀온 뒤 효령은 갑자기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 효령대군께오서 입산수도승이 됐다...
- 모두가! 모두가 듣기 싫소!! 아... 좌상 하륜만 남고 경들은 물러가오...
- 예.
(음악)
- 하륜... 경. 경은 폐세자를 어찌 생각하오?
- 마마... 노신 하륜은 폐세자야말로 도량 높으신 위인이시며 역대 다시없을 훌륭한 동궁이었다
감히 아뢰옵니다.
- 아... 경만은 그 뜻을 알아주는구려. 양녕은 이 보좌를 누구보다 아꼈던 사람이오.
깨끗하게 전하려...
(음악)
한 번 눈 밖에 났던 상감의 은총을 고스란히 아우 충녕에게 티 없이 넘겨주려 살을 깎듯 제 자신을
가학한 양녕. 세상사 허무타 뒷날 산승이 된 효령을 찾아 살아생전엔 상감의 형이 되고
죽어선 부처의 형 노릇을 할 테니 이 더욱 반갑고야 하며 한 떨기 너털웃음을 웃더라는
절세명필 양녕대군.
(음악)
출연. 홍계일, 조명남, 장건일, 김태연, 이광세, 안종국, 양진웅, 김진동, 이완호, 박웅.
김을동, 명순희, 오영자, 최희정, 이소연, 노명순. 해설 김영식. 음악 오순정. 효과 심재훈.
기술 이회근이었습니다.
(광고)
(음악)
순도와 함량이 약효를 보증하는 한일약품 제공. 항토무대.
유흑렬 편극, 양녕대군. 안평선 연출로 보내 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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