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춘문예 당선작을 방송극으로 엮어보는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오늘은 그 여덟 번째 시간으로 동아일보 희곡 부문 당선 윤대성 작, 출발을
박만규 극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음악)
(바람 소리 및 철문 움직이는 소리)
- 으...
- 저... 여보세요.
- 어? 누구요?
- 지금 몇 시나 됐죠?
- 대체 이 어두운 대합실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발자국 소리)
- 음, 여긴 잠을 자는 곳이 아니오.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 그럼?
- 그 등을... 그 등을 좀 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눈이 부셔서.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됐습니까?
- 나도 모르겠소. 여기선 도무지 시계가 필요치 않으니까. 근데 대관절 시간을 알아서 뭘 하려고?
혹시 누굴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오?
- 아니, 기차를 기다리고 있죠.
- 기차를?
- 네.
-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를 기다린다 그 말이오?
- 한데 당신은 승무원이십니까?
- 아뇨. 난... 그렇죠. 난 이 역을 지키고 있는 셈이니까. 근데 당신은 대체 어디서 오셨소?
- 저... 저 산 너머에서 왔죠.
- 산 너머라면... 한번 입버릇처럼 물어봤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나 알고 계슈?
- 정거장이 아닙니까?
- 그래요. 정거장이죠. 하지만 근래에 여길 온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죠.
이 역에 기차가 선 것은 벌써 5년 전 일이니까.
-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저기 저렇게 시간표까지 붙어 있는데.
- 그러나 근래에 단 한 번도 기차가 서는 걸 못 봤습니다. 아, 한 번. 꼭 한 번 선 적이 있었죠.
어떤 부인이 자살을 했을 때.
- 부인이 자살을요?
- 이... 그러니까 2년 전이던가.
- 오... 젊은 부인이었습니까? 대체 왜 자살을 했나요? 그 부인이.
- 그건 자세히 모르겠소. 기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죠.
그런데 혹시 알 만한 부인 같기라도 해서 물으시는 건가요?
- 아... 아아, 아닙니다. 부인이 죽었다기에, 더구나 자살이라니.
- 하긴. 10년 전만 해도 이 간이역 주변은 꽤 살기 좋은 마을로 번창했었죠. 저...쪽 뚝 너머엔
지금은 말라서 늪이 돼버렸지만 경치가 지극히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어요.
하얀 돌벽의 교회가 있었죠.
- 한데 지금은 무너진 돌더미뿐이더군요.
- 보셨나요?
- 아니...!
- 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까?
(바람 소리 및 종소리)
- 종소리가...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 에? 종소리가요?
- 줄이... 줄이 풀렸나 보군요. 풀려 있어요. 그렇게 꼭 매두라고 일렀었는데.
- 여, 아니, 정신을 차리쇼! 정신을. 그런데 당신은?
- 아... 깜빡 얼이 빠졌었군요. 그 종소리 때문에.
- 혹시 당신은 전에 여길 와본 일이 있나요?
- 처음입니다. 얘길 들었죠.
- 그래요? 어느 해 여름이었죠. 돌연 벼락이 치고 불이 나고 하룻밤 사이에 이 마을은
그만 폐허가 되고 말았죠. 그리고, 그리고 말입니다. 호숫가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떴죠.
- 어린아이의 시체가요?
- 교회가 타버리고 나서 그 얼마 후의 일이죠. 모두들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거라고 했지만,
그렇지만 그건 다름 아닌 사람의 짓이었습니다.
- 네? 사람의 짓이었다구요?
- 벼락이 치는 날 밤, 누군가 교회를 태워버린 겁니다.
- 그런 일이... 그런 일이.
- 그 후, 이 마을에서 기차가 서는 일도 없게 되고.
- 그래서, 그래서 결국 모두 떠나버렸군요.
- 떠나버렸죠. 모두.
- 그래서 마리아도-.
(음악)
- 아니? 마리아!
- 결국 그래서-.
- 대관절!! 어느 마리아 말이오? 당신의 마리아? 아니면 내 마리아?
- 당신의 마리아.
- 정말 모를 일이로군요. 어쨌든, 어쨌든 마리아는 내 아내였소.
- 아... 그럼 결혼을 했군요.
- 물론 했습니다. 좀 늦긴 했지만.
- 오... 마리...아.
- 응?!
-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 마리아라고 하지 않았소?
- 마리아에게,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렸죠.
- 아하, 난 또. 한데 대체 당신은 누구요?
- 아무도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죠.
-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쇼?
- 하나님은 주무시고 있다는 걸 믿고 있죠.
- 그럼 기도는?
- 그저 버릇이죠.
- 하긴, 모두들 버릇처럼 하나님을 찾을 뿐이지.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있는 건 사람뿐이니까.
- 아니, 하나님은 계십니다. 단지 대답을 하시지 않을 뿐.
- 하긴, 이 마을이 폐허가 될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라고 했지만은
난 도대체가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오. 어쨌든 마리아는 이 마을에서 가장 어여쁜 여자였소.
난 아주 미쳐 있었죠.
- 아...
- 아니, 그런데 어째 일어나오?
- 아, 고만, 고만 가봐야겠습니다.
- 이, 이, 이 밤중에 말요? 좀 있으면 기차가 올 텐데.
- 서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녕히 계십쇼.
- 여이, 여보, 여보! 손님, 잠깐만! 대체 어디로 갈려는 게요?
- 아무데로나. 기차가 머무는 곳이라면 아무데로나.
- 그렇지만 어디든 목적지가 있을 게 아니오?
- 종점까지 가보겠습니다.
- 에? 종점까지요... 하하하하하하하.
- 어, 어찌 웃으시는 겁니까?
- 여기를 지나는 기차는 순환열차죠. 뱅뱅 돈단 말입니다.
- 결국, 결국...
- 자, 앉구려. 아... 한데 이제껏 어디로 다니셨소?
- 발 가는 데로 다녔죠.
- 재미있었겠군요.
- 아니, 무서웠죠.
- 뭐가요?
- 다음에, 다음에 올 정거장이...
- 아무도 없으슈? 가족은.
- 있었죠. 옛날엔.
- 결혼은 하셨소?
- 못했습니다.
- 그렇게 떠돌아다니니 그렇지. 여자 같은 것에라도 인연을 가졌다면 뿌리가 바뀌었을 게야.
구르는 바위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한곳에 늘 붙어 있어야 하는 법이죠.
- 그래서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 아니요, 난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죠.
- 기차도 서지 않는 이 대합실에서 말인가요?
- 그래도 올 겁니다. 틀림없이! 어쩌면 지금 오고 있는지도 모르지.
- 부인인가요?
- 아니, 내 아내는 죽었슈.
- 죽다니...? 어째 죽었습니까?
- 기차에 죽었죠.
- 기차에...?
- 내가... 내가 죽였수다.
- 당신이...?
- 그렇소.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내 아내가 미쳤지. 사람들은 모두들 나를 미친놈으로 알고 있으니까.
- 미쳤다니요?
- 난 여자의 치맛자락을 따라다녔소. 그것도 3년 동안이나.
- 3년...
- 그 여자, 아니 마리아를 따라다닌 지 3년 만에-. 난 남자에게 미쳐 있는 그 여자를 말이요.
그 젊은 전도사 때문에!
- 저... 전도사요?!
- 그렇소. 이 마을 교회의 전도사가 그 여자의 마음을 뺏어간 거요. 서로 좋아했는지 모르지.
난, 난 미칠 것만 같았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전도사가 어디로인가 떠나버렸어!
올 때처럼 소식 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잘됐다고 좋아했죠.
인제 그 여자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3년 동안, 그 3년 동안이 내겐
인생의 전부였던 것 같았죠. 기다린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더군요.
- 그래서 결혼을...
- 아니, 그렇지만 그렇게 쉽진 않았소. 한데 당신도 여자를 사랑해본 일이 있나요?
- 하지만, 하지만... 아... 그래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 아... 그럼 당신도... 쯧쯧쯧쯧쯧. 안됐군. 그런데 어째서 죽었습니까?
- 기차에... 기차에 죽어버렸죠. 자살을 했습니다.
- 당신! 당신 때문일 거야.
- 내가 못난 놈이었어요.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죠.
- 인생이란... 죄다 그런 모양이오. 한데 내 아내는 3년 동안이나 그 젊은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었어.
- 그 여자는 잃어버리지도 않았던가요? 그 못난 사나이를-.
- 죽을 때까지 만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결혼을 해서도.
- 바보... 바보.
- 한밤중에 기적 소리가 나면 그 여자가 있는 곳은 바로 여기였죠.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한데 당신은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헤매었소? 누굴 찾기 위해서? 아니면-.
-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찾는 건 언제나 거기에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 내 얘길 더 계속하죠. 근데 난 3년 동안이나 참아왔지만 더 기다릴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난
어느 날 밤, 기차가 막 지나친 뒤에 여기서 그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렸죠! 강제로!
- 강제로...?
- 그런데... 하하, 결혼은 했는데도 그 여자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었소.
- 무슨 뜻입니까?
- 내가 소유한 것은 겨우 그 여자의 몸뿐, 그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데 있었단 말이요.
그건 비극이었죠. 전부 차지하지 못한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 내 품에서 누굴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나는 불안했습니다. 난 난폭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던 중 아이가 생겼어요. 사내아이였죠. 한데 아내는 어린 것에게 도마라는 괴이한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도마!
- 토마스... 토마스.
(바람 소리)
- 그래... 그러고 보니 그건 당신의 이름이었구만!
- 아니, 난 아닙니다. 난 이름 없는 나그네요. 한데 그 아이는 어디 있나요?
-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내 존재는 그 여자의 안중에 없었소. 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길 같은 질투가 나를 태우기 시작했죠. 토마스라는 사나이에게 느끼는 질투를
아이에게 느꼈단 말입니다. 난 버럭 의심이 솟기 시작했소. 어쩌면 내 자식이 아니라는 의심이!
- 그야말로 의심입니다. 그 아이는 틀림없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 도마라는 이름을 붙였는데도 말이요?!
- 하지만!
- 당신은 그 사나이가 사라진 3년 후에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아하하, 그랬었지. 한데... 한데 어째서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을까? 틀림없다고 확신은 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엔 알지 못할 그 무엇이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나를 꼭 잡아내고 있었어!
-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 아내가 없을 때 호수에 던져버렸소. 갈대숲 속에다가 그 조그마한 몸뚱이가 호수에서 몸부림치는 걸
난 가만히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소! 그 미친놈처럼... 흐흐흐흐흐흐...
- 악마, 잔인한 사람... 어떻게 그럴 수가! 자기 자식을...!
- 히히히히힛, 당신의 자식인 줄 알았거든.
- 오... 하나님!
- 아내는 미쳐 있었어. 도마, 도마, 종일토록 어린 것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면서 도마, 아니 토마스, 토마스!
당신을 불렀던 거야. 죽는 날까지!
- 마리아!
- 아이가 호수에 뜨게 되자, 아내 마리아도 물에 뛰어들었지마는, 그러나 죽지는 않았어.
물은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았으니까. 호수가 마르기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대신 나는 그 여자를-.
- 고만!!! 이제, 이제 고만 하십쇼...
- 그래서 난 대신 그 여자의 소원을 풀어주었거든요? 한데 어째서 당신은 그 여자를 버렸소?
(음악)
- 버린 게... 버린 게 아니오. 다시 돌아오려던 것이 저 너머, 저 산 너머, 그곳을 찾아서 손을 벌리고
떠났던 거요. 여자를 버린 게 아닙니다.
- 그래서, 그것을! 찾고자 한 것을 찾으셨소?
- 황무지와 폐허를 발견했을 뿐이지.
- 아... 그래서 이제야 돌아왔군. 하지만 너무 늦었어. 그 여잔 당신을 기다리기엔 미치고
끝내, 그래, 난 아내 대신 당신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믿었던 대로 당신은
돌아왔어! 헌데 어찌된 셈인지 알 수가 없구려. 그 많은 원한과 질투가 이제 이렇게 당신을 만나서
도리어 반가움으로 변하는구려. 어, 이럴 수가.
- 하지만 당신이 기다리는 그 사나이는 이미 죽은 지 오랩니다. 10년 전 이 마을을 떠날 때
그는 벌써 죽었던 거예요.
- 당신은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을 떠났던 거요. 자기가 서 있는 곳 외에
종점은 따로 없소. 허나, 기왕 떠났던 바엔 다시 떠나야 할 거요.
(바람 소리)
- 그 여자는 자는 듯 선로 위에 누워 있었다오. 정말 잠깐 동안에 끝났지.
(기차 기적 소리)
- 기차가, 기차가 오지 않습니까?
- 음, 정말 기차가 오는 모양이군요. 산을 돌고 있겠지. 5분 후쯤이면 이 앞을 통과할 거요.
(바람 소리)
- 분향할 준비를, 제단을 마련해야 할 준비를 해야겠죠.
- 혼자 할 수 있겠소? 두렵지 않소?
- 조금도.
(발자국 소리 및 바람 소리)
- 역시 당신은 종점으로 떠나는 이 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소?
- 그 여자 옆에 갈 수 있는 길은 달리, 달리 없지 않습니까?
- 역시 그랬군. 잔인한 사나이. 죽음 속에서 당신은 이 남편을 제껴놓고 그 여자와
함께 있기를 원한단 말이요? 당신은 누구요?! 뭣이요?! 도대체 무엇을 가져왔소?
당신의 무엇이 그 여자로 하여금 그토록 당신을 기다리게 했느냔 말야!
- 나에겐 꿈이 있었죠. 화려한 꿈이.
- 꿈?
- 그렇습니다. 내겐 꿈이 있었습니다. 저 너머, 저 산 너머에 황무지와 폐허만이 가득 차 있는 그곳을.
-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꿈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당신의 꿈을. 꿈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지도 모르고.
(기차 기적 소리)
- 아... 기차가 가까이 오는군요.
- 잠깐. 자, 이걸 받으슈. 이건 그 여자의 전부요. 분향할 준비 합시다.
- 이 봉투는...
- 뼛가루, 그 여자의 뼛가루요! 난, 난 기차를 타겠소.
- 기차가 서지 않습니다.
- 알고 있어!
- 그러면 당신도-!
- 난, 난 당신이 죽어서까지 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용서할 수 없어! 그 여자는 내 거야!
내 것이란 말야!!
(기차 소리)
- 자, 그럼. 안녕히. 뛰어!
- 여보시오!! 여보!!
(기차 소리)
(흐느껴 우는 소리 및 바람 소리)
(음악)
나온 사람들. 승무원에 주상현. 사나이에 이완호. 그리고 음악에 오순정. 효과에 심재훈, 김평주, 이형종.
기술에 정영철. 이상 여러분이었습니다.
(광고)
(음악)
영진약품이 보내드리는 명작극장.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그 여덟 번째 시간으로 동아일보 희곡 부문 당선 윤대성 작, 출발을 박만규 극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 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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