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춘문예 당선작을 방송극으로 엮어보는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한국일보 소설 부문 당선 이진우 작, 생성을
박서림 극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음악)
- 나오셨군요. 아버지.
- 오냐. 어, 플라타너스를 보고 있구나.
- 네, 줄기차다는 말이 나온담 암만 해도 저 플라타너스를 잊지는 못할 거예요.
비교적 큰 키에 메말랐어요. 밑둥가리는 아무리 후한 눈대중을 매긴데도 60cm밖에는 안 돼요.
곧게 자라지도 못한 채 흡사 물속에서 쥐가 나버린 사람의 거북한 다리처럼 중심이 꺾어져서
가지를 담 안으로 밀어 넣고 있어요. 그러나 나뭇가지 가장 끝부분은 하늘을 향해 반듯이 솟아 있잖아요.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 부분이라고 할까요? 플라타너스의 번식은 머리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나 봐요.
길고 짧은 가지들은 질서 없이 흩어져서 나와 있지마는 그것들의 무질서가 한데 모여져서
보기에도 정연한 그늘을 땅바닥에 내려뜨리고 있잖아요.
- 하아... 자세히 보렴. 저 그늘을.
- 하긴. 엄격한 관심을 두고 관찰한다면 저 그늘은 상처투성이, 마치 도장 부스럼을 앓고 있는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그늘 속에는 햇볕이 내려와 앉은 자리가 군데군데 눈에 띄고
불쾌감을, 불쾌감이라기보다 불안정함을 주고 있어요.
- 니 동생의 담임선생은 만나 봤느냐?
- 만나 봤어요. 카운셀러실에, 이른바 부드럽고 희망적인 분위기 속에서요.
- 앉으시죠. 이 시트에.
- 네, 고맙습니다.
- 음, 어느 날 저녁 때 일입니다. 싸움은 창고 곁에 딸린 오물소각장의 공지에서 벌어졌어요.
두 주인공 중에 하나가 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몸집이 동생의 배쯤은 커 보이는 안경잡이였죠.
그리고 그들의 주의를 참관인 격인 예닐곱 명의 학생들이 가방을 든 채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길 기다리던 거예요. 그런데 그 승부는 어이없게도 끝나버렸어요.
오물소각장에선 불이 꺼져가고 있었죠. 근데 그 둘 중에 하나가 불타고 있는 나무를 꺼내 들어서
그걸 자기 팔뚝에...
- 아니, 그 불로 팔뚝을 지졌단 말씀이죠? 팔뚝을요.
- 아... 싸움은 마치 거짓말처럼 끝나버리고 말더군요. 몸집이 큰 안경잡이는
삽시간에 동생 앞에서 전이를 상실한 채 쓸쓸히 고개를 돌렸고 화상을 입은 동생은
바로 그 팔로 상대방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미소를 지었어요. 회심의 미소를요.
- 낮고도 조심스러운 기침소리와 함께 침묵이 실내를 장식했었죠. 그러나 제 시선은 맑은 양광이
퍼부어지던 푸른 하늘을 뒤덮어가고 있는 검은 구름 속에 머물러 있었어요. 아니, 뭘 지켜보고 계세요?
- 벌레, 벌레다.
(음악)
-흰불나방이군요. 작고도 보잘것없는 흰불나방이군요. 그늘을 찾아 플라타너스 쪽으로 다가오고 있군요.
희무스름한 솜털이 달린 푸른빛 반점을 등에 지고 느리지마는 꾸준한 동작으로 다가오고 있군요.
(음악)
- 놀랍군요. 겨우 일주일인데. 저걸 보세요. 플라타너스의 괴로운 모습을 보세요.
나뭇잎들은 모조리 침식당했어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누렇게 나선형으로 말려 있어요.
벌레의 짓이에요. 승부는 이미 나버렸군요. 남아 있는 푸른 잎들은 마치 해일에 휘몰아치는
먼 바다의 쓸쓸한 고도예요. 벌레, 벌레들을 보세요. 저 움직이는 꼴을 보세요.
아래로부터 위로,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아래로, 긴 횡렬을 지으면서 움직이고 있어요.
정복당했군요. 겨울 일주일 만에.
- 음... 비단 플라타너스뿐이겠니.
- 아버지!
(음악)
- 헤헤헤, 거 미신이라고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말요. 특히 차를 이용하는 서비스업이란
기분에 좌우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말요. 난 절대 아침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질 않지!
아침 안개가 자욱한데 첫 손님이 손을 들잖우? 제발 남자였으면 하고 간절히 빈단 말요.
예를 들으니까 어느 날 밤의 일이에요. 밤도 10시반이 지나 있었는데 손님이 글쎄 시내와는 점점
엉뚱한 곳으로 이끌겠지. 그래, 난 번화가를 벗어나면서부터 줄창 의식적으로 클랙슨을 울렸어요.
그랬더니 웬 걸, 뒤에 앉은 녀석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던 모양이다! 하하하, 과연 그 예감이, 그게 들어 맞습디다! 하!
검문하는 경찰이 그 사내로부터 흉기를 뒤져낼 때 하유~ 하고 한숨이 절로 나더라니까. 하하.
새벽의 그 여자가 영 못마땅하더라니까.
(음악)
- 도련님.
- 아, 아주머니.
- 뭘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나리께서야 그럴 수밖에 없으시겠지만서두. 회사 문을 닫고
마님께서도 세상을 떠나셨으니.
- 아버진 대범한 분이었어요. 쉽게 마음의 바닥을 드러내 뵈는 것도 아니지마는 심각해 보일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지는 일은 없잖아요. 낙천적이고 침착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를 위해서 웃음을 지어주시곤 하였죠. 그런데 요즘 제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을 때
열려 있는 응접실 문을 통해 보이는 아버지 모습은-.
- 작은 도련님 탓도 있어요.
- 아...
- 도련님, 도련님! 아이구, 방금 김씨가, 김씨가 여자를 태우고 왔어요. 여자를!
- 여자로 시작되는 하루를 그렇게도 꺼려하시던 김씨가 바로 그 차에 여자를 태우고 왔군요.
아침이 아니라 오후에.
- 아버지, 차를 씻고 계시는군요.
- 어, 그래.
- 김씨가 떠나버린 지가 오래니까 어떡하겠니? 아, 그래. 니 동생은 어떠냐?
-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애요. 말없이 붉은 줄을 치면서 책을 읽는가 하면
새벽에 눈을 떠보면 걔 기침소리가 들려오곤 해요.
- 그래?
- 아버지, 보세요. 저 플라타너스. 새 잎들이 나오고 있어요. 거짓말 같지 않아요?
미풍에 나부끼고 있던 저 새 잎들의 모습이.
- 오... 그렇구나.
- 어디 갔을까요? 벌레들이. 다시는 오지 않겠죠?
(음악)
- 도련님, 아, 뭘 하고 계세요? 검불을 긁어모아서 뭘 하시게요? 아니, 불 지르시는군요?
- 벌레들 보셨죠? 무수히 몰려든 벌레를 말이에요. 플라타너스를 쑥대로 만든 벌레들 말이에요.
(나뭇가지로 플라타너스 치는 소리)
- 아이구, 벌레가 떨어져요. 떨어져서 불에 타요.
(음악)
- 벌레들은 담 너머 채전밭의 수풀에서 왔어요. 무수하게 자란 플라타너스 잎을
정복한 그들은 다시 잡초가 무성한 채전밭으로 들어가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저 플라타너스에 다시 새싹이 돋아나자
다시 기어든 거죠. 아까 오후의 일이죠. 잡초가 무성한 채전을 지나서 대문 안으로 일어났을 때
전 다시 벌레들을 발견했어요. 벌레들은 무수히 나뭇가지를 향해서 긴 열을 짓고 움직이고 있지 않겠어요?
긴 그림자들을 늘어뜨리고 있는 푸른 잎새들은 적지에서 외롭게 포위당해버린 병사들처럼 쓸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요. 시시각각으로 밀려들어오는 자기 운명에 대해서 이미
체념해버린 채 말이에요. 벌레, 벌레, 그리고 잎들, 과연 그것들은 어떤 숙명적인 함수관계라도
지니고 있어서 존망을 걸 필생의 대길이라도 지워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전 그걸 부정했어요.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다보니 전 어느덧 자기주장에 설복돼버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전 벌레와 싸운 거죠. 그들의 길을 차단하고 그들을 떨구어서 불을 지른 거예요.
- 아... 피곤해 보여요.
- 네, 피곤해요. 오전 중엔 남녀대학생 그룹의 토의가 있었어요. 여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남자들에게 공박을 하면서 단 한 발자국의 양보도 안 했어요. 남자들은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죠. 모임은 언제나처럼 결론 없는 끝을 맺은 채 끝이 났어요. 단지 모두가 공감한 게 있다면
그건 지루한 시간. 그것뿐이었어요. 피곤. 그래요. 피곤만이 남았어요. 아, 그러나 이렇게 피곤을 느끼는 건
그 때문만은 아니죠. 그와 난 서로 사석에서 마주 앉아 있었어요.
(음악)
한동안 서로 무관심한 채 우린 앉아 있었죠. 우리는 마주 앉아 있을 뿐,
실은 상대편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 여자는 내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카렌다 속에 외국 여배우와 눈동자라도 마주 대하고 있는 듯싶었고 그 무렵 전
그 여자 어깨 너머로 어느 청년 신사를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중년 신사는 신문에
수영복 차림에 여자 그림 얼굴에다 만년필로 무수히 점을 찍고 있더군요.
그 무수한 점이 온통 얼굴을 덮고 목으로 내려갈 무렵, 전 비로소 입을 열었어요.
(음악)
- 난 지금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야. 기억나?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지가
몇 달이나 됐는지.
- 흐흠, 1세기가 되려면 아직도 98년이나 모자라요.
- 1세기... 백 년... 98년... 흠, 끈덕지군.
- 기다려지지 않으세요? 우리가 만나는 매주 토요일.
- 물론 기다려지지.
- 저두요.
- 흠, 그 놈이 지진안데. 그러나 아니다. 매주 토요일, 아니 일요일 저녁 7시.
당신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바로 그 시각이 아닐까?
- 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 난 알고 있어. 다른 두 명의 남자를.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음악)
- 그리고 우린 헤어졌죠. ‘안녕히 가십쇼.?? 한마디로. 하마터면 백 년 동안이나 묶어놨을지도 모를
그 빤한 토요일을 영영 끊어버린 거죠.
- 아...
- 아버진 안 계시군요?
- 나가셨어요. 참, 작은 도련님 학교에서 편지가 왔던데. 자, 여기.
(편지 뜯는 소리)
- 성적푠가요?
- 담임선생이 편지도 써 보냈군요.
- (편지글) 드디어 이번 회로서 성적은 수위가 됐습니다.
- 앗, 수석이라구요?
- (편지글) 그러나 이 점에 유의해주십쇼.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림에 감동하지 않으며 또한 시선은 언제나 초점 없는 허공 속에 떠 있습니다.
(음악)
- 도련님, 도련님.
- 아, 아주머니.
- 저것 보세요. 작은 도련님 좀 보세요.
- 아니, 왜 그러세요?
- 아, 그 채전밭에 새집이 섰구 말끔해져서 벌레가 없어진 줄 알았더니.
- 알아요. 벌레들은 다시 새싹을 좀먹기 시작했죠? 불을 질러도 약을 뿌려도
벌레들은 지칠 줄을 몰랐어요. 그런데요-?
- 보세요. 저 밥그릇.
- 아니!
- 아유... 저도 몰라요. 저도 모르는 새 저렇게 아스랗게 나무 위에 올라가 있겠죠.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가지를 마구 꺾고 있는 거예요. 아... 저 벌레들을 좀 보세요.
극성스럽게 잎을 파먹던 벌레들이 어쩔 줄을 모르잖아요. 아, 아유, 아유, 무서워요.
저, 저 눈 좀 보세요.
- (편지글) 그러나 이 점에 유의하십쇼.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림에 감동하지 않으며
또한 시선은 언제나 초점 없는 허공 속에 떠 있습니다.
(음악)
- 아! 아잇, 저 벌레들 좀 보세요. 도련님이 온몸이 벌레 투성이에요. 아, 위험해요!
휘청거리잖아요! 아... 이제 나뭇가지라곤 없어요. 훤해졌어요. 하늘이 내다보여요.
아... 아...내려 오셨어요. 에구머니, 벌레를 밟아 죽이는군요. 한 마리, 한 마리 짓이기고 있어요.
이리저리 찾아내서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짓이기고 있어요. 머리에 붙은 거, 목에 붙은 거,
옷에 붙은 걸 떼내가지고 밟아죽여요. - 아, 저 웃음. 그 무의미한 미소.
(음악)
- 아유, 아버님을 보세요. 응접실의 열린 창가에서 쓸쓸히 지켜보고 계시는군요.
- 아니!
- 왜 그러세요, 도련님?
(발자국 소리)
- 도련님.
- 아버지.
- 왜 그러느냐?
- 사실이었군요. 아버지 머리 위에 언제나 걸려 있던 어머니의 사진이.
- 아... 그것은 말이다. 그것은 저 애 방에 있더구나. 저 애 방에.
(음악)
(기차 기적 소리 및 비오는 소리)
- 줄기차게도 오는군요. 비가.
- 벌레들 보십쇼. 빗물에 씻겨가는 흰불나방을요.
- 작은 도련님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날 떠나시곤 소식이 없으니.
- 벌써 나흘짼가요?
- 예...
- 괜찮아요. 아버지와 제가 이미 그러기를 바랬는걸요.
- 차츰 시일이 흘러가면은 동생은 건강한 아들이 돼서 돌아와 주겠지.
(비 오는 소리 및 천둥번개 치는 소리)
- 얘, 얘야. 저 나무를 봐라. 저 나무를!
- 아버지.
- 저것 좀 봐. 저 플라타너스를!
- 아, 꺾어진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군요.
- 아이고, 어쩌면 저렇게 싱싱하게.
- 아버지, 보세요. 비는 그쳐버렸어요. 바람으로 날려버렸던 옆집의 가설천정이 튼튼한
새 천정으로 얹혀졌어요. 그리고 보세요. 희게 흩어진 하늘의 구름을 내치고 드디어 저
눈부신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어요. 햇살을 보세요. 저 가을햇살을 보세요.
- 오...
- 아버지, 신념이 있는 한 무엇이든지 패배하지 않아요. 저 플라타너스의 어린 싹을 보세요.
신념이 있는 한 패배는 없어요! 신념이 있는 한, 신념이 있는 한!
- 그래! 신념이 있는 한.
- 어디 가세요? 나리.
- 아, 손수 차를 모시려구요?
- 아버지, 이 차의 첫 손님은 꼭 여자 분으로 맞이하세요.
- 오냐, 오냐, 오냐!
(차 소리)
- 아, 도련님.
- 아주머니.
(음악)
나온 사람들. 나에 장민호. 아버지에 홍계일. 노파에 박정자. 선생에 박웅. 운전수에 조명남.
소녀에 김영옥. 그리고 음악에 오순정. 효과에 심재훈, 김평주, 이형종. 기술에 정영철.
이상 여러분이었습니다.
(광고)
(음악)
영진약품이 보내드리는 명작극장.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한국일보 소설 부문 당선 이진우 작, 생성을
박서림 극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 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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