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약품 제공 명작극장
(음악)
신춘문예 당선작을 방송극으로 엮어본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동아일보 소설 부문 당선작 백시정 원작,
비둘기를 정진건 극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음악)
뱀은 비둘기를 잡아먹었다.
(바람 소리)
- 어... 아... 음.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가?
으...음. 살았구나. 내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손은 왜 뒤로? 그렇지, 내가 그 총살을 당했지. 으...으...음.
아... 으...으...음. 이 냄새, 피비린내. 이게 뭐야? 공세, 덕분이, 으, 길상이, 김 생원, 강씨, 덕호의 큰 머슴. 죽었구나. 나만 살았구나.
아아아... 모두들 저렇게 피를 흘리고 죽구 나만 살아났구나. 나만...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아아... 이봐, 다리가 움직이는데.
몸도 나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조금도 다치지 않았잖아?
내가 어떻게 살아 있을까?
(총소리)
- 그래그래. 키가 전봇대 같은 사내가 쏘는 총에 맞았었다면, 땅 하고 총 쏘는 소리가 났을 때, 곰보바위 밑에 덕호가 서있었어. 웃고 있었지. 이제 내 안의 금순이를 제 것으로 독차지 할 수 있다는 망조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내가 마지막으로 봤는데 한데, 한데 내가 살아 있어! 열넷이 하나로 묶인 가운데 나만이.
살았으면 일어나야지. 윽... 아악... 공세하고 다리 뿌리가 같이 떨어져 나는구나.
으...! 아이구야! 할 수가 없구나. 이, 이 밧줄을 끊지 않고서는. 으...으...윽.
(바람 소리 및 까마귀 우는 소리)
(파도 소리)
- 이겨라! 이겨라! 내 말이 먼저야! 이히히히.
- 넌 물파리 개엄질 시키는 거 안 하니?
- 난 싫다.
- 왜?
- 금순이 니가 싫어하지 않어?
- 그래서 넌 구경만 하는 거야?
- 응, 니가 싫어하니까.
- 아, 정말?
- 그래, 난 니가 싫어하는 건 하기 싫더라. 나도 애들처럼 물파리를 잡아 놀자면 옷을 개울물에 담그지 않아도 되지만. 이히히히히히히!
- 왜 웃니? 갑작스레.
- 아니야,
- 그게 무슨 웃음이니?
- 히히히히히히히히히.
(파도 소리 및 빨래 두드리는 소리)
- 에이, 이제 만들기만 하면 풀은 다 지겠지?
- 하동댁.
- 어머, 아이 참. 누가 봐요.
- 하하하하하, 뭘 그래.
- 으응, 대낮에 정말 왜 이래요. 누가 본다니까. 저리로 비켜요.
-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보긴 누가 봐?
- 대낮인데.
- 대낮이면 어때. 이 골짜기 위에서. 아, 이 골짜기 위에도 밤이 있고 낮이 있나?
그 빨래방망이 놓지 못해? 놔.
- 아유, 안 돼요.
- 헤에. 그 앙탈.
- 아이, 참. 증말 내가 미치겠어.
- 하하하하하, 진작에 그렇게 할 일이지.
- 대낮에 혼자 사는 과부 넘겨다보고 염치도 좋아.
- 이, 하하하하하.
- 가요.
- 어? 덕호 아버지하고 하동댁하고.
(음악)
- 음, 덕호야.
- 응.
- 왜 큰 머슴이 싫다는 게냐?
- 싫어, 창피해서 싫어.
- 창피해서?
- 금순이하고 훈이한테 창피하단 말이야! 다 큰 게 어린애처럼 머슴한테 엎어서 학교 다닌다고 그런단 말이야!
- 쯧쯧쯧, 으으흥, 아, 창피할 게 뭐 있어? 그런 게.
- 그래도 난 싫단 말이야!
- 저저저, 저 녀석이!
- 금순아, 금순아!
- 오호,
- 먹어, 이거.
- 아이, 자꾸 이렇게 거저 얻어먹어도 되니?
- 그까짓 눈깔사탕인데 뭐. 난 금순이한테 주고 싶단 말야. 받아.
- 고맙다.
- 음, 훈이는 안 주니?
- 훈이는 안 줘도 돼.
- 불쌍하다, 얘.
- 없으면 할 수 없지 뭐? 하긴 훈이 저도 너한테 눈깔사탕 사주고 싶을 거야.
그치만 지가 돈이 있나? 지네 엄마가 사천 회비 밖에 안 주는데.
아하, 아하하하.
- 치, 하지만 병신아. 난, 난 금순이가 좋아하는 산비둘기를 잡아줄 거란 말야. 산비둘기를.
-힛, 그까짓 눈깔사탕? 덕호, 니가 몰라서 그렇지. 금순이한테 산비둘기만 잡아주면 덕호 니가 사주는 눈깔사탕 얻어먹는 거 열배는 좋아할 거야! 열배는! 알았어?! 힉,
내가 꼭 잡아준다! 꼭! 벼랑 밑에 사는 비둘기를 잡아주겠단 말야!
(파도 소리)
- 비가 올 것 같지?
- 그래. 하늘이 낮게 가라앉았어. 소나기가 올려나 봐?
- 소나기 쏟아지기 전에 우리 뛰어서 갈까?
- 그래.
- 가만있어.
- 왜 그러니, 훈이야?
- 가만히 있으란 말야.
- 짜식, 너 비 맞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그러니?
- 아니야.
- 그럼?
- 이 책보 좀 가지고 있어, 금순아.
- 아, 왜?
- 가지고 있으라면 가지고 있어. 보면 이제 알게 될 테니까.
- 뭘 할려고 그러는데?
- 받어, 빨리.
- 아, 정말 뭘 할려고 그러는 거야? 빨리 집에 가야잖아.
- 눈치도 없어. 너, 저 벼랑 아래 사는 산비둘기 갖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어?
- 그랬어.
- 내가 지금 그걸 잡아서 너한테 줄려고 하는 거란 말야.
- 정말?
-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구. 오늘은 내가 꼭 잡아줄 거란 말야.
- 하지만 얘, 훈이야. 니가 저 벼랑을 어떻게 내려가니?
- 걱정 없어.
- 하지만 얘, 훈이야.
- 너, 정말이지?
- 그래.
- 못 잡으면 뭐야?
- 내가 덕호 너 같은 줄 아니? 씨이, 너같이 겁본 줄 알어?! 잡아올 테니까 두고만 보란 말야!
- 정말이다?
- 그래.
- 봐야지, 여기 앉아서.
- 봐, 보란 말야! 못할 줄 알구!
- 하지만 얘, 훈이야. 너, 벼랑 내려가다 떨어지면 바다에 빠져서 죽을 텐데 그만둬.
그만두고 가.
- 걱정 말어, 글쎄. 내가 꼭 벼랑에 사는 산비둘기를 잡아가지고 올라올 테니까 말야.
- 하지만-.
- 내려간다.
- 내가 못 잡을 줄 알구서. 이힛, 덕호 두고 봐라! 이까짓 놈이 준 눈깔사탕.
흥, 몇 십 배 좋아할 거다. 금순이가. 몇 십 배! 으잇, 여기 있었구나.
이 굴에 비둘기가 살지. 이힛, 손을 넣어야지. 히히힛, 있구나. 잡혔지. 이놈!
히, 꼼짝 마라! 니놈이 내 손에 잡혔는데 어디로 도망을 갈려구? 이...이익... 엑?! 뱀, 뱀!! 윽!
(음악)
- 뱀이야, 뱀! 아니, 지금 날 묶고 있는 이 밧줄! 뱀이 감긴 거야! 이 밧줄을 끊어야지. 이 밧줄... 윽!
- 아... 시체 투성이의 이 골짜기를 벗어나야지. 그리고 내 안의 금순이를 끼고 누워 있을 그 덕호라는 자식을 싹 죽여 없애야지. 아니야. 덕호 뿐만이 아니다.
나를 잡아서 이 골짜기로 끌고 와서 총을 쏜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야지. 그래야 내 속이 후련할 텐데.
그래야 내 속이 후련할 텐데. 으...아...아... 안 되는구나. 안 끊어지는구나. 아아...
(까마귀 우는 소리)
- 안 돼, 안 돼! 윽!
(까마귀 우는 소리)
- 음...
- 넌 뭔데 한숨을 들이쉬고 내려 쉬고 하는 거야?
- 동무, 물 한 그릇만 주십쇼.
- 뭐야, 이 새끼?
- 나 목이 타서 그럽니다.
- 입 닥쳐! 너희들 같은 반동분자들 때문에 우리는 끼니도 못 찾아 먹었단 말야.
- 예?
(웃음소리)
- 덕호. 덕호 나 물 한 그릇만 주게.
- 닥치래두, 이 새끼가.
- 동무.
- 왜 그러우?
- 잠깐.
- 무슨 얘기요?
- 여기 잡혀온 놈들이야말로 정말로 다 죽여 마땅한 놈들입니다. 반동이니까.
지서를 지을 때 돌을 날라다 준 반역자들이란 말입니다. 아셨죠?
- 알고 있소. 알고 있어.
- 모조리 죽여 없애 버리셔야 합니다. 모조리, 하나도 남기지 말고 말입니다.
- 알고 있으니까 동무는 나가 있소.
- 네, 네.
- 뭘 쳐다보는 거야, 넌 임마!
- 난 왜 묶었죠?
- 뭐야?
- 나를 묶은 까닭이나 알아야 억울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 닥쳐! 이 새끼야!
(바람 소리)
- 아니, 몰라서 물어? 몰라서? 지서를 지을 때 돌을 날라다준 새끼가 바로 너 아니야? 너!
- 내가요?
- 니가 돌을 날랐단 말야! 니가! 할 말 없지?
- 네...
- 네 이놈들 열네 명은 모조리 총살이다. 총살! 부역을 했으니까 말야.
- 하지만 그때 지서 짓는 데 환심을 살려고 돼지까지 잡아준 것은 바로 덕호 녀석인데.
덕호는 그냥 두고 돌이나 날라줬다는 이유로 아아... 총살형. 으으... 좋다. 마음대로 해라.
금순이를 주물러라. 주물러 터지든지 마음대로 해! 흐흥흐흥.
(까마귀 우는 소리 및 바람 소리)
- 그러나 지금 내가, 아까와는 다르다. 난 살아 있어. 또 살아야지.
나를 묶은 저 끈을 끊고 살아야지. 으...아...아...
(음악)
- 금순아.
- 나... 잘못했나 봐. 훈이에겐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난 훈이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야. 난 오늘 그런 생각을 했었어.
- 그만해.
- 정말이야. 훈이는 나보다 더 좋은 여자하고 결혼했어야 했을 거야.
- 가라. 그만.
(음악)
- 망할... 자식. 이럴 때 담배를 한 가치 피워보면 묘한 방안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담배... 담배. 아, 아냐, 아냐. 그까짓 담배 한 대 피웠다고 해서 묶인 팔이 풀어지거나 이 산골짜기를 벗어날 수는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렇게 묶여서 시체 속에 오래오래 있어야 한단 말이냐? 밤이 온다, 아침이 온다. 또 밤이 온다.
아... 갈증이 심해진다. 그리고 현기증도 찾아올 것이다. 마침내 나는 쓰러진다.
죽는 것이다. 안 돼! 나는 죽어서는 안 돼! 나는 살아야 해! 살아서 다시금 금순이를 찾아야지. 내가 금순이를 갖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데! 나는 살아야 해!
그것은 신의 섭리야. 그러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니야? 자, 분명히 기다리는 거야.
당황하지 않고 내 안의 금순이를 기다리는 거야. 그렇다. 금순이도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야. 그럼 시체라도 확인하러 올 거야.
아니야, 덕호가 그 소문을 퍼트렸을 리 없지. 비굴한 수단으로 나를 들먹이며 금순이를 끌어안을려고 열을 내고 있을 거. 윽, 풀어야지! 풀어야지! 윽!
으으윽! 아유... 아이고, 묶인 데가 쓰리구나. 벗겨지더래두 벗겨져서 피가 흘러도 난... 난 이걸 풀어야 한다. 아, 아, 아, 안 되는구나. 안 되는구나. 아, 아, 익... 아, 안 돼.
윽! 안 돼. 다시 일어나야지. 그렇지. 고인 빗물을, 핏물이라도 좋다. 난 살아야 하니까.
아, 더 기운이 없구나. 아아, 이젠 도저히 안 돼. 안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아, 어, 그렇지. 왜 진작에 내가 그런 생각을 못했지? 이 근방에 사람이 지나갈런지도 모르는데.
사람이 지나가지 않더래두 목청껏 외치면 동네까지 들릴런지도 모르는데.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니야, 너무 컸나? 너무 컸다. 덕호나 나를 쏜 실무자가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러면 금방 뛰어올라올 거 아니야? 금방! 그럼 요번에는 틀림없는 사격을 할 거 아니야.
그럼 마지막이지. 죽는다. 안 돼. 안 돼! 안 돼! 허수아비 짓을 할 순 없어!
두세 마디가 끊어지더래두 내 힘으로 살아나야지.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덕호 녀석을 단번에 싹 죽여 없애고 금순이와 배를 타야지. 아무도 없는 무인도를 찾아가야지.
나는 고기를 잡고 금순이는 밭을 친다. 나는 집을 짓고 금순이는 아기를 낳고 수십 마리의 비둘기를 기르며 산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겠지. 못하겠지. 우리만의 세상에 그런 것이 없으니까. 노래를 부르고 보름달이 부서지는 밤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오래오래 살자. 오래 살자. 어쨌든 이걸, 나의 발을 묶고 있는 이것만 없으면은 모든 것은 되는 것이다. 으아, 윽! 으...아!
(발자국 소리)
- 으, 무슨 소리야? 누가 오고 있다. 덕호가 온 건가?
덕호하고 실무자가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쏴죽이러 온 거야!
(발자국 소리)
- 아니야, 아니야? 금순이의 발소리야. 아내의 발소리야.
(발자국 소리)
- 안... 돼. 내 잘못 들었구나. 덕호야, 덕호.
내가 차분히 기다렸어야 하는 것인데.
- 여보, 여보! 여보! 아아, 여보? 여보! 여보!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는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멍청히 시선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비둘기의 깃털 같은 안개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빗발을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
(음악)
나온 사람들. 훈에 주상현, 어릴 적 훈에 이영민, 금순에 김수희, 어릴 적 금순에 이은미,
덕호에 이완호, 어릴 적 덕호에 김영옥, 실무자에 김영식, 최노인에 홍계일, 하동댁 박정자.
해설에 박웅. 그리고 음악에 오순정, 효과에 심재훈, 김평주, 이형종. 기술에 정영철. 이상 여러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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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영진약품 제공, 명작극장. 신춘문예 당선작을 방송극으로 엮어보는 신춘문예 당선작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동아일보 소설 부문 당선작품 백시정 원작, 비둘기를
정진건 각본, 이희복 연출로 보내드렸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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