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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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노변야화
김두한 편 - 제80화 4.19 이야기
김두한 편
제80화 4.19 이야기
1970.01.24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4대 때로 넘어오면 2.4파동이 있고, 그 이후에 그것의 연장이기도 한 3.15부정선거가 있는데 그 결과로서 4.19가...

(중간에 끊김)

▲우양이예요. 집우자 볕양자. 우주의 빛.

- 허정씨가 우양이잖아요.

▲ 그 우양은 다르죠. 나는 집우자이고요. 그때 광산을 내가 하고 있었어요. 석탄광을 누가 자꾸만 사자고 해서 그걸 판것이 내가 3천만원이 들어왔는데 그때 3.15 부정선거가 한참 있어서 마산 이쪽에서 들고 있어났는데 서울에는 잠잠했습니다. 그때 내가 뭘 했냐면, 파고다 공원 뒤에가면 빨간 벽돌집 있습니다. 거기 2층 3층은 전국 고학생 총연맹이 있어요. 내가 그때 총재직을 한 10년동안 해가지고 거기서 모은 돈을 가지고 중학교 들어가는 애, 고등학교 들어가는 애, 대학교 들어가는 애 등록금들 내주고요. 내가 과거에 좋은 아버지를 뒀지만 공부를 못했으니까 고학하는 사람들 전부 만원 이만원 줘야되거든요. 돈 없으면 떨어지니까요.
내가 고학생 연맹 총재로 그때 있을 땐데, 내가 머리에 퍼뜩 떠오른게 서울이 잠잠한게 안되겠다. 이래서 성균관 대학, 서울대학, 동국대학에 있는 고학생 출신을 불렀어요. `지금 대구하고 마산이 전지역으로 퍼졌는데 동지들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전부 지휘를 해서 내가 과거에 선동경력이 있으니까, 전부 짜서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전부 줬습니다. 이래서 성균관 대학하고 동국대학 애들이 맞았어요. 왜냐면 다른 대학은 거리가 멀거든요. 고대도 멀고 동시에 중앙대, 연희대, 한양대도 머니까 중앙지에서 가장 가까운 성균관대학이랑 서울대, 동국대란 말이예요. 이게 먼저 경찰에 잡혀가서 참 처참하게 맞았어요.
여기가 무너지니까 할수 없이 고대하고 한양대하고 중앙대하고 연희대하고 다시 갖다 대지 않았습니까. 제가 돈이 있으니까요. 그때 4월 18일이 닥쳐오지 않았어요? 18일이 닥쳐왔는데 마산 불상사가 팍 튀어나오지 않았습니까. 김주열이 튀어나오고 이정재 동지를 중심으로 반공청년단이 고려대학 대모하고 들어가서 떡을 만들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걸 조직화 해야된다 이거예요. 내가 과거에 공산당에 대한 조직 투쟁을 했으니까 그때 중대한 역할을 할때 아닙니까? 돈 있고 하니까요. 그래서 파고다 공원에 있는 수위가 두 사람있어요. 내가 낙원 시장을 만들어 준 사람이니까 부하들 시켜서 가서 술먹고 돈좀 줘서 데리고 나와라 했어요. 그래서 파고다 공원 문을 활짝 열어놨어요. 그때는 자동차가 시발자동차밖에 없습니다. 시발자동차를 있는대로 파고다공원에 집어 넣었어요. 그때 60대가 동원됐어요.
고학생 총연맹에서 밤을 새가며 일을 해가면서, 서울의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팜플렛을 돌려서 4월 19일에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까지 일제히 들고 일어나게 하는데 원동력에 3000만원을 소비한겁니다. 그걸 조직화 해야되니까 일제히 들고 일어나야됩니다. 조직화 해야 하니까. 왜냐면 4월 18일날 얻어맞은 것이 밤이예요. 껌껌해서 맞은거니까 조직화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밤새도록 시발차를 굴려서 팜플렛을 돌렸죠. 고학생을 전부 총동원 시킨거예요. 이렇게 4.19혁명의 원동력을 만들었어요.
이래서 밀고 들어가면서 경기도청을 그 때 (4.19나던 그날) 부하들하고 점령했습니다. 점령을 해서 학생들하고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밀고 들어갈 때, 같이 지휘하고 싸웠을 거 아닙니까. 박상원 동지라고 있죠? 나하고 한독당 했을 때. 그 동지가 고려대 동지의 대표인데요. "지금 이 상황이 이렇게 되는데 안된다.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고 하는건 소용없다. 부정선거는 돈이랑 권력 있으면 다시하는건데, 안된다. 그러니 대통령을 하야한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수천명이 희생된다고 해도 해야된다." 이걸 경기도청에서 결의해서 경기도 도청을 중심잡아서 각 대학에 있는 동지들이랑 해서 결국 4.19혁명을 완수했는데요.
내가 부산서 이범석씨하고 자유당을 만들때 그때 내가 대한노총 위원장이기 때문에 자유당의 광범위한 세력을 내가 알고, 이기봉씨를 도와서 다시 서울에 와서 제2차 자유당을 재건했을 때 구국세력인 동시에 반공세력이고 청년세력 등 자유당의 광범위한 300만 조직의 세력을 내가 누구보다도 아는데요. 만약 이것을 4.19혁명 때 내가 한사람의 간부라고 해서 지휘를 했다면 내가 나중에 자유당 전체의 세력에 맞아 죽는단 말이예요. 맞아 죽는게 아니라 일을 못해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유당이 무너지면 민주당한테 정권이 가게 되어있는거지 김두한이 한테 정권이 오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이러니 괜히 정만 산더미같이 씌워놓고 (나도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인데) 적을 만들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단체에 혼이 한번 나니까, 종교단체만큼 적지않은 자유당의 세력한테는 내가 지면 안되겠다. 이래서 후퇴하고 학생한테 물려줘버리고 나는 내 선거운동이라도 해야겠다 해서 종로구에다 선거준비단계를 하니까 하루는 장면씨가 불러요.
명륜동에 들어갔더니 "김의원, 내가 종로구에서 나가야 될텐데, 또 여기가 내 구인데, 내가 저번에도 여기서 나가고 했는데, 김의원하고 나하고 어떻게 대립해서 나갈수가 있소. 그래서 내가 여러가지로 걱정에 김의원을 불렀네." 대세가 민주당으로 기우는데 내가 장면씨하고 싸운다는게 대의적 명분이 서질 않아요. "그럼 제가 물러서죠." 그러니 이제 내가 갈데가 없어요.
등록할 수 있는 기간은 엿새밖에 안남았어요. 그러니 보따리 싸서 아버지 고향인 충남 홍성에 갔어요. 그때는 무소속까지 난리를 펴서 16명이 등록을 했는데, 아버지 고향이라고 가니 거기서 누가 반가워 할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가방 하나 메고가서 등록하고 딱 있었죠.

- 그게 과도정부때 했던 7.29 선거죠?

▲ 그렇죠. 아버님 산소가 홍성에 있는게 아니고 보령군에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35년전에 중국에서 백골을 캐서 아버님 신체에 백골을 보령에 모셨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나는 보령에서 아버님한테 참배하고 그냥 들어오니까 아버지 고향을 못 가봤거든요. 그러니 홍성을 보따리 싸갖고 처음 내려간 것이니, 이러한 데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애로가 많았어요.

- 그 선거에서는 거의 민주당이 통했기 때문에 그때도 떨어졌죠.

▲ 150표로 떨어졌죠. 시내에서. 역시 종교단체에서 맞은 거예요.

- 4.19와 관련해서도 객관적으로 하여간 본인은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홍성선거에 나왔다가 낙선을 했다. 그 얘기로 마칩니다.

(입력일 : 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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