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 군인이 아니면서 대거 동지들이랑 무장해서 전투에 참가했던 이야기였는데 전쟁이 포항에서 그렇게 되고, 영천에서 국군이 이기고 이러면서 인천 상륙이 되고 그러면서 6.25는 전쟁 그 자체는 반전이 되어서 거꾸로 위로 올라가는 걸로 되는데, 전쟁쪽 얘기보다도 이제는 김선생이 부산쪽에서 겪었던 정치파동 그 무렵의 얘기로 넘어가보죠.
▲ 전 군인도 아니고 포항전투에서 연합군이 진격해 들어오고 맥아더 장군이 와서 20만 연합군이 들어오니까 내 사명은 끝난거죠. 위기만 막는거니까요. 그래서 그때 대한건설부흥단이라고 단장으로 있었는데 그때 부산의 정치풍토가 이박사를 지지하는 세력이 25%고 야당표가 75%예요. 그때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았거든요. 지금은 직접선거지만 그때는 간접선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대통령 임기가 거의 다 왔는데 국회에서 뽑으면 장면씨가 되는거란 말이예요. 그때 장면씨를 내놓으려 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안되니까 이거를 직접투표로 해야된다. 아니 시골에서 대통령 반대한다면 맞아 죽을텐데 그러니 국회의원들이 말을 안듣는단 말이예요. 이박사는 위급해지고 그러니까 강력한 것이 내무부장관으로 해야되는데, 그 때 경남도서 관세에 있는 임시청와대에서 와서 김장한씨하고 몇분이서 왔어요. "각하께서 들어오시라 합니다." 날 또 왜오라 하나, 난 할일 다했는데 말이죠. 갔더니 "미스터 김, 자네 그동안 참 애도 많이쓰고 큰일도 많이 했는데, 또 이번에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는데, 이번에 어려운 일을 맡아달라." 가슴이 철컥하죠. 꼭 못된 일만 나한테 배급하지, 여태까지 좋은거 배급을 못받아봤으니까요. "내무장관을 해라." 근데 가만히 보니까 내가 그때 31살이예요. 큰일 났거든요. 왜냐면 뭘 알아야 하지 말이예요. 그 전, 몇달 전에는 나한테 방위군 사령관을 하라고 하는데 그거 못한다니까 내무장관을 하라해요. "각하, 못합니다. 몇달전에도 말씀하셔서 방위군 사령관을 하라 했지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제가 학식이 없습니다.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십시요" 했더니 이 사람은 하라고 그래도 안하는 사람이라고 화를 막 내요. 남은 하라고 하면 다 하는데 자네는 안하냐고 손가락질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각하, 배우지 못한걸 어떡합니까? 무식한 사람이 남을 어떻게 지도합니까? 뭐 싸인을 해도 글자를 알아야 하지 어떻게 마음대로 합니까? 그거 못하니까 다른거 하라고 하시면 제가 하지만 이건 못합니다." 하고서 뒤로 갔단 말이예요. 그다음에 누가 들어가나 하고서 이렇게 봤더니 대만 대사로 가 있는 이범석씨를 불렀어요. 이범석씨 같은 사람은 훌륭한 점이 있거든요. 그 양반은 솔직히 말하자면 혁명적인 부분도 있거든요. 그리고 이 시점에는 대통령을 갈면 안되겠다 하는 신념도 있어요. 이래서 딱 보니까 이범석씨가 들어가서는 내무장관을 한단 말이예요. 그래서 원영덕씨가 육군 소장으로 가서 부산지역에 계엄령 선포를 하더니 경찰력을 갖고 국회를 포위 해 버린거예요. 그때는 피난통이니까 경상도청 옆에 검도하고 유도도장이 하나 있어요. 거기다가 문을 딱 걸어잠그고 물도 안주고 밥도 안주고 막 잡아 넣고하니까 국회의원이 급했단 말이예요. 그래서 기립투표를 했죠.
- 그게 부산 5.15정치 파동이라고 하는건데 그때 김선생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무장관 하라고 하는걸 안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또 큰일나니까 치질아프다고 하면서 앓아누웠어요. 왜냐면 본인이 하면 사고가 나거든요. 국제구락부 사건이라는 거 아시죠? 국제구락부에 이시형 부통령하고 김창수 선생이라 건국총장 맡던 분하고 조병욱박사 이런분들이 쭉 앉아서는, 그때 (이박사가 계엄령을 선포해서 국회를 포위하니까) 민족 선언문을 낭독했거든요. 그때 소위 경찰 앞잡이들을 세워서 막 때렸거든요. 나는 아프다고 드러누웠단 말이예요. 치질앓는다고 안꼈어요. 이렇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까지도 권력을 앞세워 약자를 때렸다는 오점을 남기지 않았어요. 그 때 만약 했으면 내가 아무리 큰소리해도 민주주의 반역자거든요.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당당하게 뽑는것에 강제로 두들겨 팼다면 반역자가 되는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번에 4.19혁명 났을때도 윤보선씨하고 장례식에 표창장들고 감사장들고 돈주고, 오히려 군사혁명 나서 특별히 대우해주고 자동차주고요. 안 걸린게 나 하납니다. 두 번 혁명에 나밖에 대우받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부정과 불법을 타도하는데 싸워야지, 우리같은 놈이 권력앞에 서서 약자를 때리면 우리같은 사람은 못산단 말이예요. 이만수가 죽는데 김두한이 안죽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란 것은 언제든지간에 정당한 옳은 길에서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부정과 불법을 타도하고 정당한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에 있어서는 혁명이 12번 나도 안다친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번 두번 혁명에도 안다친건 나만 싹 빠진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점이 없었죠.
- 그게 이제 2대 국회인데 소위, 그 이후에 3대 국회때 김선생님 자신이 출마하게 되잖아요? 그건 이제 서울에서 하는 것이지만은, 그때 출마한 건 자유당으로 출마했죠?
▲ 아니죠. 그 때 제가 대한노총 최고위원인데, 부산서 대한노총 감찰부장인데 그때 화폐개혁했죠. 그때 100대 1로 됐거든요. 그래서 만원이 백원 됐거든요. 그때 백원 가지고 못살거든요. 이래서 부두노동조합가 18만명 있고 철도노조가 4만명인데, 싹 위원장을 붙들어다 내 창고에 넣고는 기관총을 갖다 댔어요. 파업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사람들이 전쟁하는 도중이니까 항만총사령관 쫓아오고 난리가 났거든요. 내가 "임금인상 올려라. 100원갖고 어떻게 사느냐. 우리도 인간인데 먹어야 되는데." 그래 얼마 원하냐고 해서 "800원이다" 그랬어요. 그래 시간적으로 운수 못하면 항만사령관이 총살당하거든요. 가족사진을 들고 나좀 살려달라면서 울어요. 이제 두시간반이면 나 사형당한다 이거예요. 맥아더 사령관이 땀을 뻘뻘 흘려요. 그래서 100원을 400원으로 결정한 일이 있는데요. 그 중간에 백두산 호랑이(김종운)를 데려온 거예요. 그때 그 사람이 육군 대령인데, 경남 계엄사령관인 동시에 헌병 부사령관이고 병사부사령관이예요. 그냥 막 갖다 죽일때예요. 상권을 다 쥐고 있는데, 항만사령관이 김두한이라는 하는 놈이 대한노총감찰위원장이 전 파업을 다 내는데 그 자식이 돈달라 그러는데 어떡하냐 그랬더니, 김종운이 "난 안간다." 그러니 "왜안가냐?" 하니 김종운이 그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인데 가면 그냥 쏜단 말이예요. 그래서 김종운이가 안오니까 미국 사람이 깨달았죠. 그때 전쟁중인데 노동상투쟁을 42만명이 했어요. 이래가지고는 100원을 400원, 철도노조의 경우 2700원을 6200원으로 만들어 놨어요. 배 이상을 증가시켰죠. 이래서 대한노총에서 만장일치를 해서 (서울을 수복하면서) 대한노총연합회 제가 최고인이 되었죠. 그래서 출마를 했는데 자유당 5개 기관단체가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어민회, 국민회 이렇죠.
- 부산에서 있었던 정치파동에 어떡하면 가담할뻔 했는데 거기에서 몸을 사렸었다. 그 이후에 대한노총의 감찰위원으로써 부두의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를 위해 파업을 시켜서 임금을 올려준 일이 있다. 그걸 배경으로 서울에 와서 3대 국회에 출연을 하게 된다. 그걸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입력일 : 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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