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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59화 형무소내 좌익간수 24명을 적발
김두한 편
제59화 형무소내 좌익간수 24명을 적발
1969.12.27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형무소 안에서의 김두한 부대(김두한 자신)의 활약을 얘기하는 대목인데요, 형무소 안에서 간수들이 좌익 죄수들하고 연락을 해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27명의 좌익조직에 가담한 간수를 적발해냈다. 그래서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씨한테 연락을 했다. 이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최운하씨가 구치과장실에 왔는데, 내가 "이거 지금 여기서 잡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럼 나머지 사람들이 다 들고 뛰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을 여기서 교대할때 지켜서 있다가 (명단있고 주소있고 사진이 붙어있으니까 여기에 형사를 배치시켜서) 이 사람들이 나갈때 전차를 타고가니까 한 사람앞에 셋씩 배당을 해서 중간에 귀신도 모르게 잡아가서... 오늘 저녁에 잡아가면 (내일 아침에 교대를 하니까) 교대하기 전에 사람이 안들어오면 사고난줄 아니까 급속도로 고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예요. 그리고 잡아가는 데에는 서로 눈치 못채게 잡아가야된단 말이죠.
그렇게 내가 지시를 했어요. 확 잡아가면 다 들고 뛰니까....그런식으로해서 형사들을 배치해서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걸 교대해가지고 27명을 제시했어요. 고문이란게 지독할거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나온게 약 50여명이 나왔어요. 그래서 내가 한말이 "여기다 잡아놓으면 안된다. 안양 형무소로 돌리든지 해야지 여기다 집어넣으면 우리 입장이 곤란하다. 왜냐면 우익진영의 간수가 (같은 좌익이지만, 사상적으로서는 적이되지만) 동조한단 말이야. 같은 간수가, 위층의 간수도 우리를 적으로 설정을 하니까, 될수 있으면 안양이나 수원형무소 그쪽으로 보내주길 바란다." 해서 그쪽으로 보냈어요.
그렇게 완전히 뿌리를 뽑으니까 공산당 루트가 흐트러졌죠. 왜냐면 이것이 적어도 서대문 형무소쯤 들어가는 (중앙에 있는
좌익에 되어있는) 거물급이 전쟁을 한다는 것은 2급,3급,4급이 싸운거지요. 만일 얘네들 6000명이 다시 터져나오면 일대에 혼란이 또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수립하느냐, 인민공화국으로 수립하느냐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단 말이예요. 이러니 내가 정치적으로 봤을때도 중요성이 있으니까 얘네를 못나가게 만들어야 된단 말이예요.
그러니 장택삼씨나 조병욱 박사가 미군하고 얘기를 하는거예요. 미국싸움에서도 다 동조하는게 아니예요. 거기서도 반공주의자가 있지만....그러나 소련하고 미국하고 손잡고서 독일이랑 이태리랑 일본을 쳐부셨으니까 독일을 때려부시는데 손잡은 동맹국이였기 때문에 공산당이 나쁘다는 사상이 미국사람들의 머리에 박히기 전이란 말이예요.
지금처럼 월남전 이후라면 천만의 말씀인데, 그때는 미국이 동부전선을 막기 위해 160억 달러를 소련한테 줘서 독일, 이태리, 일본을 쳐부셨기 때문에 한 때 소련하고 동맹국이거든요. 모택동이고 장개석이고 난리를 쳐서 중국 새빨갛게 만들어 놨는데, 미국이 공산당을 강력한 적으로 설정하기 전이니까....지금같이 월남전이랑 6.25동란이 나서 미국이 30만이나 죽고 이랬다면 별문제지만 그때는 알쏭달쏭해서 우리입장이 대단히 곤란할 때예요.
내가 그때 잡혀갈때가 9월달이예요. 앉아가지고 위스키도 좀 먹고 그러는데, 그러다가 난리가 났단 말이예요. 뭐냐 했더니 `대구에 폭동이 있어났습니다` 이거예요. 내가 9월 2,3일쯤 잡혀들어갔는데, 좌익이 전부 숙청하고 있어가지고 막 소문이 돌아가지고 최운하씨가 왔어요.
최씨가 "큰일났소." 내가 무슨일이냐 하니까 10월 폭동(10월 1일에)이 일어났다 하네요. 대구에 경찰서가 점령당하고 경상북도 대구도청이
경찰도청과 완전점령 당해서 완전히 경찰이 들어가지 못한대요. 경찰이 수십명이 학살을 당했고 대구전체가 폭동이 일어났대요.
내가 "당신, 답답하다 이거예요. 당신들하고 나하고 약속이 자꾸 틀리다 이거야. 남조선 철도파업을 해가지고 경찰관이 십여명 들어가 죽을 때, 나한테 원상복구하라고 해서 내가가서 동지가 수십명이 죽고 수십명이 다쳤어. 이래가지고 남조선 철도에 대한 걸 전부 원상복구 했는데 나중에 미국사람들이 뒷구멍으로 빼내니까 (그래서 내가 여덟명 쏴서 죽여서 묻어버렸더니) 나중에 나를 살인죄로 몰아서 또 잡아넣었어. 결국엔 이게 하나의 전쟁인데, (하라 해놓고 사람을 죽이면) 뒷구멍으로 또 잡아넣고..그러니 나 이제 안 나간다. 툭하면, 급하면 나만 찾냔 말이야" 그랬더니 "이번엔 할수 없이 미국사람하고도 약속을 했습니다. 전체가 회의를 했는데 김선생이 아니면 도리가 없으니까 어떻게 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글쎄 좋다. 그럼 나만 나가면 안된다. 여기있는 동지 전체 다 내보내야 된다." 이래서 합의해서 밤 11시반에 슬그머니 빠져나왔어요. 이게 내가 숙명적이거든. 그때나 옛날이나, 못되고 골치아프고 돈 안생기고 총 맞고 말이예요.형무소 들어가는게. 이게 지금까지도입니다. 이십몇년동안.
5년동안 형무소 여섯번 들어가서...그래서 내가 정치 안하고 장사 할라고 손번쩍 들고 정릉 골짜기에서 땅만 파니까 요즘처럼 편안할때가 없지만은, 했다하면 과격하니까 잡혀 들어가거든.

-10.1 사건이 난 후죠?

▼10.1 사건이 폭동일어나서 대구경찰서, 대구도청, 경북도경찰부가 완전히 점령당해서 경찰들을 다 죽이고.... 대구가 완전히 다 들고 일어난거예요. 폭동중에는 대구폭동하고 여수순천반란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예요. 이러니 경찰은 들어갈 자리가 없고 미국도 급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김두한이 부대밖에 없다해서 내가 나온거예요. 장택상씨하고 조박사랑 전부 다 (경찰순회복입고) 앉아서, 먼저 남조선 철도파업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회의했죠.
내가 "이 문제는 내가 한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이건 하나의 독립투쟁이요. 내가 될 수 있으면 살상을 안하겠지만, 만약 저항을 하면 싹 다 죽이겠다 이거야. 나중에 사람많이 죽였다고 하는 얘기는 미국사람한테 당신이 책임져라 말이야. 저번처럼 또 잡아 넣지말고...."
이게 중대한 문제예요. 남조선 철도파업이라고 하는 것은 용산 기관골을 둘러싸고 1800명이였는데, 이거랑은 또 달라요.
대구는 그때 40만이란 말이예요. 서울이 80만이였고요. 대구전체가 들고 일어나는데 중요한 문제란 말이죠. 그래서 얼마전에 남조선 철도파업했던 그 동지를 다시 조직한거예요. 완장 두르고서 총 들고.(근데 그 총이라는게 제대로 된 것을 안 주는거예요. 총 끝이 구부러지기 때문에 사람을 쏘면 옆으로 쏘아지기 때문에 총알이 삐뚤게 나가는 못된 총만 주는거예요. 나가지도 않는 총.) 하여튼 총을 받고 해서 용산역에서 탄 거예요.
근데 내가 지금 정거장은 기억을 할 수가 없는데, 김성권씨 선거구역이 대구에서 두 정거장 밑이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니까.
거기다 트럭 300대를 대란 말이예요. 우리가 3000여명이니까. 이래가지고 그때 새벽 3시에 도착했어요. 그래서 트럭타고 갔죠.
대구에서 20~30리 떨어진 곳이 김성권씨 선거구역인데 그때 밤중이라 내가 정확히 기억은 못해요. 앞에는 경찰차가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 화물차에서 내려서 불을 끄고서 살살 들어가는데 그때 새벽 4시가 약간 넘었어요. 들어가서 언덕을 넘어서 보니까 대구시가 번쩍번쩍 하는거예요.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한시름을 넘겼는데 그 안에서 대구에 10.1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의 의뢰를 받아서 대구를 구하러 내려갔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얘기였습니다.

(입력일 : 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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