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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54화 전평 사무실의 습격
김두한 편
제54화 전평 사무실의 습격
1969.12.19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철도 파업 그리고 용산 기관고 탈환, 파업 현장에서 활약했던 얘기를 지금까지 쭉 했는데요. 기록에 의하면 전평, 그러니까 전평 산하 노동조합들이 파업한 것 아니예요? 그 전평 사무실들을 여기저기 습격했다고 하던데요.

▲ 볼셰비키 러시아혁명이나 공산주의 혁명을 보면 농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대개 노동자가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동지들이 전체 회의를 연 결과, 내 구역이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북도인데 가장 큰 수도를 방치한다면 중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전평 본부와 서울 경기도 지부를 습격해서 서류를 탈취해야겠다고 결정한 겁니다. 그래서 2패로 나눠서 한날 한시에 하기로 했습니다. 서울 경기도 지부는 파고다공원의 뒷문에 있는 빨간 벽돌집 3층에 있었어요. 그리고 전평 본부는 서울역 맞은편에 있었구요.

─ 전평의 중앙본부?

▲ 중앙본부가 어딘고 하니 남대문경찰서 바로 옆 건물 2층이 전평 본부예요. 전평 본부와 서울 경기도 지부를 습격해서 공산당 노동조합에 대한 서류를 뺏지 않고서는 제대로 투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조병옥 박사와 장택상 씨와 검찰총장과 내가 전체 회의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뒷받침이 없으면 대공투쟁을 할 수 없는 거니까. 그 자리에서 ‘좋다!’ 합의를 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파고다공원 뒤로 가기로 하고 조동지와 김동지, 신동지, 홍동지 등 여러 동지들은 서울역 쪽으로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파고다공원 빨간 벽돌집에 도착했을 때가 10시15분 정도 됐어요. 그래서 2층, 3층으로 올라가면서 권총을 들고 ‘손들어라! 돌아서라! 엎드려라!’ 소리를 쳤죠. 그러면 벌써 그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우익 진영의 테러라는 걸.

옆에 있던 뚱뚱한 사람 모가지에 딱 대고 ‘여기 조직부장이 누구냐’ 하니까 ‘저 사람이다’ 라는 거예요. ‘묶어라.’ 그래서 뒤로 책상 의자에 묶고 잉크 찍어서 쓰는 것 있잖아요.

─ 철필 말인가요?

▲ 맞아요, 철필. 해방 직후에는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고 나무떼기에다가 꽂아서 쓰는 거였어요. 이 철필을 가죽장갑 낀 손으로 눈동자에 딱 들이대는 거예요. ‘서류가 어디 있는지 안 대면 장님 된다. 죽인다. 조국이고 민족이고 없다. 대라!’ 그랬더니 곱슬머리 놈이 엎드려서 침을 탁 뱉어요. ‘이 개새끼 한민당 앞잡이’하면서. 그러니까 내가 약이 오를 거 아니예요? 주먹으로 치니까 핑 돌아 떨어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까 그 뚱뚱한 놈을 다시 묶어 가지고 그 앞에서 ‘장님 되는 거니까 대라!’ 했더니, ‘대겠습니다. 저기 있습니다. 거기 캐비넷,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치우면 됩니다.’ 그래요.

거기 있는 거 치우니까 조그만 구멍이 있어요. 그 안에 보니까 조직문서가 있었어요. 서울과 경기도 노동조합에 대한 거였죠.그때 해방 직후에 노동자들이 약 50만 명 이상 됐습니다. 군수 공장이 전부 인천으로 나왔기 때문에 경기도 등지의 노동자를 합하면 수도권에만 40만 명이 넘었어요. 우리가 서류를 탈취할 때 세 가마니에 나눠 담았어요. 그 중에서 공산당 조직세포 책임자 명단은 제일 중요한 건데 밑의 동지를 시켜서 내게로 빼돌렸지요. 미국 정보 요원이 내 뒤를 따라다니니까. 그래서 내가 남대문을 못 간 거거든.

그리고 여러 동지들이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 사진과 레닌 사진을 갖다놓고 들이대면서 거기의 인적 서류를 전부 탈취했습니다. 그때는 공산당이 합법화되어 있었으니까 대낮에 습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그 노동조합의 서류 전체를 가지고 와서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공산당 루트예요. 개성에서부터 철원까지 7개 군인데 이북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루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별동대원을 전체 소집해서 한 개 군에 3백명씩 배치했어요. 왜냐하면 남로당 밑에 있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밑에는 전평, 농민 동맹, 부녀 동맹, 예술가 동맹, 민예청, 학병 동맹, 예술 전문 등의 조직이 하나의 공동 전선으로 되어 있었어요. 이들이 남북을 오가며 서로 연결하기 때문에 38선에다가 배치를 했던 거예요.

일곱 전선을 정해서 3백명씩 배치했어요. 그리고 각 경찰서에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는데 우리와 합작해서 하니까 전반적인 공산당 루트가 쫙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동두천 아래 무슨 촌인지 그곳을 먼동이 트기 전에 습격해서 이 명단에 의거해 가지고 전부 잡아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38선 부근에 미군 부대가 있기 때문에 총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 전부 대창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하지 중장의 정책은 극우 극좌를 배제한 중간노선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건 사형에 처했거든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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