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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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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51화 남조선 철도 파업
김두한 편
제51화 남조선 철도 파업
1969.12.16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지난 번에는 노량진과 영등포에서부터 인천까지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없애기 위해서 대규모의 사람들을 동원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철도 노조파업이 또 하나 크게 남은 이야기 같은데요.

▲ 그런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예전에 일본인들이 쓰던 관사가 4천 몇 백 개가 남았다고 했죠. 그곳에 살던 노동자들이 모두 떠나버려서 관사가 모두 다 텅텅 비어 버렸어요. 그곳에 있다가는 죽을 테니까. 그래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등 이북 5도 피난민 대표를 만나서 인천 얘기를 했죠. 그동안 이북 피난민들은 장충단공원이나 효창공원 같은 곳에 수용돼서 비를 맞으며 살았거든요.

그중에서 부인네들과 어린이들 중에는 집 없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들을 위해 빈 관사에다가 쪽지를 붙여서 무슨 공단 1번, 2번 하는 식으로 배당을 했죠. 그런데 피난민들이 그곳까지 모두 걸어갈 수가 없거든요. 이북 5도 피난민이 4천 몇 백 세대인데 식구가 7, 8명씩 되니까 수만 명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부자들한테 가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유 대한이 그리워서 남한에 오신 이북 동포가 공산당 때문에 쫓겨 왔지만 살 집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지어줘야 되겠다. 그들도 우리 민족이고 우리 동포니까 집이 있어야 쌀 배급을 줄 거 아니냐.’ 그랬더니 ‘좋습니다’ 해요.그래서 일곱 명한테 돈 3백만원을 만들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효창공원과 전국 각지의 이북 피난민들 중 어려운 사람들을 수송해서 날라주는 데 2개월이 걸렸어요. 내가 그 사람들 날라다주고 욕 엄청 얻어먹었어요. 일단 관사에다가 배치했는데 그 분들이 생활이 금방 어려워지니까 공장의 고철, 방직기계 등을 팔아서 생활을 했거든요. 그런데 수습은 내가 해야 된단 말이죠. 내가 수송해줬으니까. 그런데 김두한 부대가 팔아먹었다고 소문이 나는 거예요. 그거 옴팡 내가 다 뒤집어썼습니다. 사흘 굶으면 배 고파서 팔아먹었다는데 어떻게 해요. 도리가 없지.

아무튼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일개 사단의 병력을 어떻게 투입했느냐? 저쪽은 전국에 40만 명인데…… 그래서 1천 명, 2천 명쯤 되면 일시에 들어가서 점령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전평을 점령할 도리가 없어요. 서로 쫓겨났다 들어갔다 하면서 완전히 소탕하는 데 3개월이 걸렸어요. 그렇게 해서 김두한이 책임지고 있던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지역에 있는 공산당 계열 노동조합을 다 평정을 한 거예요.

─ 시기적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 1947년이죠. 2월 달부터 10월 달까지 싸웠으니까. 제일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싸움 붙은 것이 남조선 철도파업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공산당 소련 혁명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남조선에서 철도파업이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때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때 용산경찰서 옆에 철도경찰청이라고 있었습니다.

─ 철도경찰이라고 있었죠.

▲ 당시 철도경찰청장이 백형근 씨예요. 당시 혼란기니까 철도를 경비해야 되는데 공산당들이 단결해서 철도경찰청을 새벽 2시 반에 습격을 했단 말이죠. 철도경찰청과 용산경찰서가 붙어 있으니까 한꺼번에 들어가서 점령을 해 가지고 기관총과 수류탄, 장총을 있는 대로 가지고 빠져 나갔어요.

그런데 그 기관총을 가지고 어디로 갔는가 하면, 지금 용산 기관고 가운데쯤 가면 철도 설계사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3층 건물입니다. 거기서 철도 그림도 그리고 기차 설계도 하는데 그 건물 꼭대기에다가 중기관총 4개를 걸고, 가장자리에는 소기관총을 걸고 삥 둘러서 12개를 쌓았단 말입니다. 거기다가 38구경식 권총을 들고 수류탄을 가져오고 3천 2백 명이 딱 둘러싸면서 철도파업을 시작한 거예요.기차가 들어오는 대로 모조리 잡아놓는 거야. 서울에 일단 도착하면 기차가 다시 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호남에서든지 영남에서든지 기차가 들어오면 일단 잡아놓고 철도파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전평이 하나가 돼서 지방에 있는 교각을 죄다 끊어 버리는 겁니다. 경찰이 진압하러 들어가면 쏘는 겁니다. 경찰들이 죽으니까 미군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무전기만 들고 있고 들어가지 못해요.공산당은 철도파업이 목적이 아니고 서울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거예요. 서울에 쌀이 들어오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 아닙니까?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석탄이나 물자는 무조건 못 들어오는 거예요. 쌀이 이틀도 걸릴 것 없이 배 이상, 3배씩 뛰는 거예요.

만약에 쌀이 없어 식량이 떨어지면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 옆집을 습격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폭동이 하루 아침에 격화되는 거예요. 그동안 잠재해 있던 공산당이 들고 일어나니까 그때서야 미국 사람도 급한 거예요.

장택상 씨와 조병옥 박사는 꼭 그럴 때만 날 써먹어요. ‘두한이, 이번에만 자네가 꼭 해 줘야겠네’. 도리가 없거든. 폭동이 일어나고 쌀값이 10배가 뛴 거예요. 원료도 안 들어와서 장작을 땠거든요.미국 사람들이 놀랬어요. 교각은 다 끊어 놓았지, 땅을 파서 자동차는 못 지나가지, 철도를 다 떼어 놓았지, 기관차와 전차는 파업을 하지, 남한 전체가 파업이다 이 말이에요.

그때 경찰이 월급을 한 달에 몇 백 원 받는데 무엇 때문에 생명을 바쳐 거기에 들어가요? 저번에 김신조가 공비 삼십 몇 명을 끌고 와서 대한민국 전 국민이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우리 경우는 3천여 명이다 이 말이죠. 물론 저쪽에서는 철도 종업원 4만 명이 총파업한 거구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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