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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50화 좌익신문에 대한 이야기
김두한 편
제50화 좌익신문에 대한 이야기
1969.12.15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노동조합과 대결했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신문 이야기가 나왔어요. 신문도 역시 당시에는 일종의 노동조합 같은 움직임이 있었겠죠. 특히 좌익 쪽의 신문들은……

▲ 그게 완전히 좌익 신문이에요. 그때 우익 신문으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있었어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도 없었고 다른 신문도 없었죠. 그런데 한국일보 자리에서 이종영 씨라고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신 분인데 당시에 대동신문이라고 반공신문을 만들고 있었어요. 대동신문은 러시아혁명 등 공산당이 사람들을 죽이고 피흘린 것을 폭로했거든요.

벽보를 붙이고 신문을 돌렸어요. 그러니까 좌익이 테러를 해요. 그래서 내가 동지 30명을 보내서 3교대로 권총을 차고 보호하도록 했어요. 우익 진영의 청년 단체들이 신문을 받아 가지고 청년 단체에 배부하면 애국 청년들이 그 신문을 배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 우익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대동신문 3개이고 좌익은 4개예요.

당시 좌익신문 만들던 곳은 말하자면 나무떼기 집이었어요. 일정 때 그건 단층이었어요. 그곳에 대낮에 뒤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지붕 위에서부터 밑으로 휘발유를 두루루 붓는 거예요. 그리고 불을 확 지르니까 밑에 인쇄 공장에 불이 확 붙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골목길에 네 사람이 두 사람을 앉고 두 사람은 서 가지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지만 할 수 없이 비밀로 했죠.

그때 이 일에 가담한 네 사람 다 카메라가 없었어요. 당시 고급 카메라는 CIC 같은 특수 기관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CIC에 있는 김동지가 카메라를 몰래 빌려 왔어요. 그 카메라로 중국집 2층에서 사진을 찍는 거야. 물론 내가 찍는 게 아니고 카메라 기술자가 찍는 거죠. 한 장에 얼마씩 주고…… 찍은 사진이 나오면 그걸 가지고 좌익 신문 만드는 사람들을 미행해서 집에 찾아 갔죠. 그런 식으로 해서 네 군데 신문사는 완전히 없어진 겁니다.

─ 신문사 쪽 얘기는 그렇고, 철도 노조파업을 구실로 벌였던 싸움 때문에 군정 경찰에 잡혀가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까?

▲ 내가 사형을 받았을 때 어디서 받았느냐 하면 지금의 중앙청……

─ 그 얘기보다는 사형을 받게 된 원인이 되는 사건들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 전부 한 데 모아서 사형을 당하게 되는 건데요. 먼저 파업 관련 이야기를 하자면 노량진부터 인천까지 밀고 들어가서 싸우는 겁니다. 당시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올라가면 철 공장, 옷감 공장, 군수 공장 등이 전부 있거든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40만 명이다 이겁니다. 이게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기를 들어갈 때는 대창을 전부 구워서 톱으로 썰고 대패로 깎아 가지고 숯을 벌겋게 피워서 그걸 콩기름에 집어 넣었다가 꺼냅니다. 그게 칼보다 더 좋습니다. 총소리가 너무 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애들을 제 1 별동대, 제 2 별동대 하는 식으로 만들어 너는 어디 공장 너는 어디 공장하는 식으로 배당합니다. 조선기계제작소, 방직회사, 제철 공장, 군수 공장 등에 3백 명씩 배치를 하는 거예요. 그때 공장이 수백 개거든요.그런데 경성방직 같은 데 들어가서 앞에서 탁탁 대면 여자들이 행주치마에다가 돌을 날라 올리는 거예요. 데모할 때 여학생들이 돌을 날라주지 않아요? 그러면 들것에다가 돌멩이를 담아 우박 같이 쏟아붓는 거예요. 그리고 대창이나 삼지창 같은 것을 가지고 덤벼든단 말이에요.

여기에서도 그때 만 명이 나갔지만 40만 명을 대항하기에는 적어요. 지금 서울시 경찰국 자리가 금천대라고 하는데 금천대 술집 바로 옆에 신 씨라는 사람이 부랑자를 1만 명을 뽑은 거예요.
그 사람들을 싣고 가서 술을 한 잔씩 배급 주는 거예요. 독한 술을 한 컵 쭉 들이키면 얼큰하게 취한단 말이에요. 그리고선 트럭으로 정문을 들이받는 거야. 방직회사 정문은 쇠문이 아니고 쇠줄로 쭉쭉 쳐놓은 거 있잖아요.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 그걸 트럭으로 받으면 쇠줄이 왕창 무너져요. 그러면 자동차를 타고 방직회사 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돌멩이가 우박 같이 쏟아져요. 그럴 때 수류탄이 필요한 거야. 수류탄을 뽑아서 두 방 터뜨리면 한 서너 명이 죽어 나자빠지거든요. 그런데 일본 것은 오래된 탓인지 미제만 못 해요. 아무튼 인천까지 싸움하러 들어갔다 나왔다 밤에 습격했다 하는 데 3개월이 걸렸습니다.

─ 1만 명이나 동원했습니까?

▲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거예요. 밤에 있다가는 야습을 당하니까…… 이렇게 해서 3개월 후에 마지막으로 인천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를 점령했어요.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다 들고 튀었죠. 그때 전부 쫓아내고 보니까 노량진에서부터 인천 바닷가까지 일본 사람들이 쓰던 관사는 전부 한국 사람들, 즉 공산당 간부들이 살고 있었어요. 4천 7백 몇 십 개의 관사가 남았어요.

─ 1만 명이라면 자그마치 일개 사단의 병력일 겁니다. 인원으로 보면 엄청난데요.

▲ 저쪽은 40만 명이죠.

─ 그와 같은 인원을 동원해서 영등포 일대의 공장 지대를……

▲ 영등포부터 부평, 인천까지. 군수 공장이니까.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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