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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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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42화 이박사와의 관계
김두한 편
제42화 이박사와의 관계
1969.12.05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이제까지 좌우 합작을 하려고 하던 세력들과 싸웠다는 얘기를 계속 해왔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좌우 합작을 반대하는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이 이승만 박사의 진영 하에 있었다는데…… 그러면 좌우 합작을 하려고 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박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또 직접 만나서 무슨 협의를 했는지 얘기를 해주세요. 이 박사를 몇 번이나 만났나요?

▲ 이 박사는 가끔 만났죠. 민주의원 의장으로 있으니까…… 그런데 민주의원 산하에 반탁투쟁위원회라고 있지 않아요? 내가 그때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이고 경비부장이었어요. 그래서 찬탁을 하는 영화 배우, 연극 배우는 이제부터 노래, 연극, 영화를 못 하게 했어요. 총으로 갈기고 해서 걔네들이 노래, 연극, 영화를 일체 못 했어요. 그런데 내가 과격한 것을 잘 아니까 장택상 수도총장께서 나를 불러서, 될 수 있으면 앞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고 혼 정도만 내라고 그러는 바람에 저번에 여운형씨를 납치했다가 죽이지 않고 놔줬잖아요.두 번째는 그래도 좌우 합작을 하니까 시한 폭탄을 던졌는데 빗나갔단 말이에요. 그때 여운형이 안 죽었으니까 앞으로 좌우 합작이 되면 중대한 문제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좌우 합작은 공산당과 합작하는 것인데 선거철 때 중간 노선이라는 건 큰 두통거리거든요.그런데 이박사께서 비서실장이었던 동산(東山) 윤치영 선생을 보내서 ‘날 좀 도와달라고’해요. 그래서 이박사께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김두한이 왔다고, 이박사가 웃으면서 애 많이 썼다고 영어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난 꼭 그런 데만 써먹는 거야. 다른 데는 안 써먹으니까. 이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감투는 다른 사람 다 주고 우리 같은 사람은 순사부장도 안 시켜줬으니까. 또 시켜줘도 하지도 않지만……그때 이박사가 영어 신문을 놓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동산 선생이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지금 장개석 총통이 상하이에 있는데 광동으로 밀렸다’ 이거예요. 트루먼 정부가 마셜정책을 해서 총 한 방 못 쏘고 교섭으로 밀려가는데 이것 때문에 큰일이라는 거예요. 이 박사께서 ‘중국이 새빨개졌어요. 트루먼과 미국무성의 중국 정책이 실패하는데 여기서도 좌우 합작을 해서 여운형, 김규식 박사한테다가 정권을 주려고 움직이니 큰일났다’는 거예요. 공산당은 중대한 문제인데 미스터 김이 심각하게 생각해서 빨리 처리해 주기 바란다는 거예요. 이박사가 ‘죽여라!’ 그런 말은 안 하거든요. 대개 보면 미국식 사고 방식은 그 사람이 있으면 이 일은 못 할 테니, 이상하게 장애가 되니, 우리가 건국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곤란하다는 식이에요.그러면서 이박사가 하는 말이 ‘며칠 전에 얘기를 들어 보니까 김규식 박사에 대해서는 미스터 김이 가서 어떻게 해서 좌우 합작에서 자진 탈퇴했다 하는데’ 하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김규식 박사 대신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김원봉이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했잖아요. 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습니다. 김원봉은 의혈단 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의혈단 단장 김원봉 장군, 그때는 장군이거든요. 그는 대한임시정부의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그 유명한 김원봉 씨가 똥통 밑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고 신문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택상 씨가 잠자코만 있었으면 꽝, 해 버리는 건데 자꾸 죽이지 말라고 해서 혼만 냈습니다’고 했어요.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장개석 총통 밑에 있는 건 ‘남의사’인데 이 단체는 군통국장(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대립이라고 하는 육군 중장이 만들어 장개석 총통의 생명을 지킨 겁니다. 여기에서는 백의사라고 만들었는데 공산당 두목을 죽이려는 5도 단체의 청년들이 모였죠. 그 백의사가 사령부로 되어 있어요. 지하사령부인데 사령관이 누구냐면 염동진 씨라고 평양분인데, 장개석 총통 밑의 군통국에 있다가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들어왔지만 밀렸거든요. 항일 투쟁을 했으니 어떠랴 싶었는데 공산당 본부에 끌려가 척추뼈가 부러지고 장님이 됐어요. 중국이 항일 전쟁 할 때 모택동이가 염동진은 장개석 편이라고 두들겨 팼단 말이야. 그래서 옛날에 항일 투쟁하던 동지들이 그 분을 업고 38선을 넘어왔어요. 이름을 한국말로는 염동진 씨고 중국말로는 요 모씨라고 썼대요.그런데 백의사 사령부는 비밀 결성인데 남쪽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예요. 그건 왜 그러냐면 독립 운동을 한 민족주의자로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고 항전총연합회 주석으로 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제 아버님 아닙니까? 아버님께서 국제공산당한테 암살을 당해서 돌아가셨으니까 일급 거물이거든요. 우리 한국의 거물이 국제공산당한테 제일 처음으로 암살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 연유로 해서 백의사의 참모가 됐어요.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까 무기, 돈, 정보,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나하고 합작을 원해요. 그런데 이박사와 뜻을 맞춘 염동진 씨가 나를 들어오라고 해요. 들어가니까 염동진 씨가 인사를 하고……

─ 그 분은 어디 있었는데요?

▲ 그때 낙원동에 있었어요. 낙원동 한양목욕탕이라고 하는 큰 집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인직이 살던 효자동의 집으로 옮겼지만. 아무튼 나를 오라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갔죠. 그랬더니 암만해도 여운형 씨를 패야 된다고 해요. 그러니 김동지가 정보와 돈과 무기만 우리한테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죠.’ 아니 사람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일이지 개인적으로 무슨 감정 있습니까? 사적 감정은 없거든요.그런데 ‘누가 할 겁니까?’ 그랬더니 염동진 씨가 ‘저기 쟤다.’이래요. ‘어떻게 됐습니까?’ ‘쟤가 이북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학살당했소. 그래서 철천지 원한을 가지고 있지.’ ‘그쪽은 나이가 몇 살입니까?’ 그랬더니 18살이라고 합니다. 저런 아이가 한다 이겁니다. 그럼 이름은 뭐냐고 하니까 한지근이라고 그래요. ‘한지근. 좋습니다. 그러면 거행합니까?’ 못 하면 내가 하려고 생각했어요. ‘총을 어떻게 구입해서 줘야겠네.’ ‘알았습니다’ ‘총, 제가 드린 것은 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했더니 가지고 38선을 넘어갔다고, 이북공작으로 들어가서 탄환하고 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총을 갖다 드리겠어요.’ 라고 말하고 총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고 돈 백만 원 갖다 드리고. 이래 가지고서 혜화동에 있던 내시집 있잖아요. 동소문 바깥인데 지금의 삼선교 근방에서 저쪽 개천교로 올라가면 김연수 씨 별장 위에 내시집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서 위해를 한다고 해서 목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1차, 2차, 3차로. 그래서 그런 비밀 결사를 딱 맡겨 놓고 있는데 백범 선생한테서 밀사가 왔어요. 들어오라고.’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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