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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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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34화 해방후 좌우에 갈림
김두한 편
제34화 해방후 좌우에 갈림
1969.11.22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그래 공산당에 대한 테러를 계속하시는 김선생님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 뭐, 나를 백색테러리스트라 불렀죠. 그런데 일부에서는 나를 한민당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기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난 공산당 조지는 일만 한 거지 정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특히 공산당 놈들이 나를 한민당의 앞잡이로 몰아세우면서 벽보를 전국적으로 붙이기도 하고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돼 있었지요. 총도 서너 방 맞았지만 다행히 별 일은 없었지요. 그때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하지 중장하고 싸우고 미국 갔다 온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 중장의 정체가 애매하다고 항의한 거죠. 좌익편도 들고 우익편도 들고 하니까 도대체 대한민국 국가를 수립할 수가 없거든. 그렇지 않아요?

─ 네.

▲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하지 중장과는 얘기 안 한다며 미국 국무성에 간 거예요. 이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는데 종로 네거리에 삐라가 살포되는 거예요. 이승만 박사가 금강산을 팔아먹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때는 내가 경비부장이었어요.

─ 아, 대한민청의?

▲ 이승만 박사의 민족위원회에 반탁투쟁위원회가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본부장이고 제가 경비부장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익 진영의 정당 사회단체가 공산당에게 테러받는 것을 대비해 보호하고 경비하는 거죠. 이승만 박사가 김포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좌익이 테러할까 봐서 2만여 명을 동원해서 김포공항부터 이 박사 집인 이화장까지 지켰지요. 경비를 서고 있는데 전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지금 데모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자동차를 집어 타고, 데모하는 곳을 둘러쌌죠. 한 1천여 명이. 늙은이와 어린애만 빼고 대한적십자사 본부 옆의 한 절간으로 싹 잡아왔어요. 내가 수습하려고 나중에 올라가 보니 거기 정진용이란 친구도 끌려왔더군요. 왜 제 밑에 거지로 있다가 나중에 공산당으로 전향한 친구 말입니다. 거기 잡혀온 28명이 다 조선민청의 주력 부대원들입니다. 옷을 홀딱 벗겨서 심문한 뒤에 껌껌한 밤에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장택상 씨가 아주 곤란해졌지요.

─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나요?

▲ 원래는 방공호에 파묻으려고 했는데 CIC가 알아가지고 다른 곳에 묻어버렸어요.

─ 그럼 우익 안에서는 파가 없었나요? 가령 이박사를 따르는 쪽이 있고……

▲ 있었죠. 백범 선생과 이박사가 갈라졌죠. 갈라졌기 때문에 혼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만일 오키나와 형무소에만 잡혀 가지 않았다면 백범 선생이 남북 협상에 참석하지 못 했을 겁니다. 내가 경교장을 둘러싸고 세상 없어도 안 보냈을 테니까 , 하늘이 두 쪽 나도……한국독립당을 공산당으로 몰고 백범 선생을 안두희가 암살하고 이렇게 해서 민족의 분열이 일어났던 게 제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부분입니다. 이박사와 백범 선생이 결렬한 게……

─ 그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김선생님이 우익 진영과 충돌한 사건은 없었습니까?

▲ 난 마음 속으로는 이박사보다 백범 선생을 더 존경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쪽하고는 충돌이 없죠. 그때는 경교장도 내가 경비, 보호해 드렸으니까…… 그리고 백범 선생에게 비밀리에 만든 돈을 남몰래 갖다 드렸지요. 한 번에 5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그때 한독당은 돈이 부족했거든요. 공식적으로는 한민당에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한독당을 도와준 거지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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