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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26화 학병 동맹을 부스라는 지령이 떨러진 얘기
김두한 편
제26화 학병 동맹을 부스라는 지령이 떨러진 얘기
1969.11.12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해방 후 혼란 속에서 행동대를 가진 김선생에게 좌익에서도 오라, 우익에서도 오라 이런 유혹이 있었는데 우익 쪽으로 자기의 태도를 결정했다는 얘긴데요. 그럼 대한민청은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한 건가요?

▲ 운현궁과 천도교당에서 발기한 1945년 9월 26일로 봐야지요. 건준 산하 치안특별 감찰대의 후신인데 감찰대로는 그리 오래 있지 않았으니까.

─ 아, 그런가요. 그럼 대한민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요.

▲ 그때에 맞춰 미군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군정을 실시하면서 모든 불법단체를 해체하면서 우리도 전부 무장 해제 당했지요. 그때 장택상 씨가 수도청장,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이 됐습니다. 그러니 검찰과 경찰권 그러니까 치안의 권력은 모두 한민당이 거머쥐게 된 거지요. 한민당 외에 우익진영으로는 백범 선생님의 한국독립당과 이승만 박사의 독립촉성국민회가 있었고, 남로당으로 변한 조선공산당 외에 공산당 조직도 수십 개나 있었지요. 공산당 조직은 노동계, 학생, 예술가쪽으로도 힘을 뻗쳐서 전국에 많은 산하 조직을 갖고 있었지요. 이 조직들이 인민전선이라는 단일전선으로 나갈 때였죠.

─ 네, 그게 그 당시의 좌우 포진 같은데……

▲ 네, 맞아요. 그런데 제일 곤란한 게 바로 중간노선이었어요. 여운형씨를 중심으로 한 중간노선이 생겨났는데, 좌익과 우익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양쪽을 통합하자는 안을 제시했지요. 중국은 국공합작이란 걸 했잖아요. 한데 미국은 좌익과 우익을 합작시키려고 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을 제외한 중간노선한테 정권을 주려는 거예요. 하지만 말이 중간노선이지 그들 대부분이 좌익계라서 만일 중간노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적화될 게 뻔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북에 있는 소련군은 우익을 다 때려 죽이고 공산당만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하지 장군은 처음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좌익도 살리고 우익도 살리겠다는 하지 노선을 견지했지요. 그때만 해도 군대라는 게 없었어요. 국방경비대가 1947년쯤 돼서야 정식으로 발족했으니까. 그때 군사영어학교라고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단체가 있었지만 2,3천 명에 불과한 데다 미군들 눈치 보느라 군사 활동을 아예 못했거든요. 그러니 힘이 없었지요. 하지만 좌익들은 북쪽의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 힘이 아주 막강했어요. 그러니 하지 장군이 좌익을 몰아내고 우익을 지원해줘야 했다 이 말입니다.

─ 그럼 좌익들과 맞부딪힌 최초의 행동은 무엇이었나요?

▲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군에 학병으로 입대했다가 중위로 진급한 남모씨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일본군을 탈출해서 어디로 갔는고 하니 연안으로 갔어요. 연안에는 팔로군이 있거든요. 만일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갔다면 광복군이 됐겠지만 워낙 멀어서 가까운 연안으로 가는 바람에 좌익이 된 거지. 사상이 없다 해도 팔로군 모택동 밑에서 해방될 때까지 1년 9개월간 있었으면 빨갱이가 되는 거죠.남씨가 해방되고 나서 남한에 들어와서 군사를 조직하기 시작한 거예요. 말이 국군준비대지 사실은 남한인민항쟁 유격사령부예요. 이 국군준비대의 명령계통이 조선인민공화국이예요. 당시 조선인민공화국은 당사자의 양해도 받지 않고 이승만박사를 대통령으로, 김일성을 국방장관으로 조각해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어요. 부통령은 여운형씨였는데 실질적인 지도자였죠. 당시 여운형씨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지요. 그는 공산당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관이 좀 없다 보니 공산당들과도 손을 잡고 있었던 거죠.국군준비대는 명동에 본부를 두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장교집합소를 만들고 학병 출신들과 지원병을 모집해 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남씨는 남한에 거주하던 일본군이나 학병 출신들을 잘 몰라요. 그러나 내가 이끄는 단체가 힘이 워낙 강하니까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별도 조직을 만들기 위해 여운형씨 휘하에 들어간 거죠. 여운형씨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은 젊은이들이 멋모르고 국군준비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국군준비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니 단순한 준비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이 감춰져 있었던 거지요.잘 아시겠지만 여순반란 사건도 몇몇 장교가 모의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몇 천 명씩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국군준비대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만일 사건이 커져서 소련군이 북에서 밀고 들어오면 큰일날 일이지요. 이에 한민당도 위기상황을 느끼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저걸 부수지 않으면 무력혁명이 일어나겠다 해서 국군준비대를 때려부시라는 명령을 제가 받은겁니다.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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