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얘기는 나중에 또 들을 수 있으니까, 다시 얘기를 해방 직후로 돌려봅시다. 해방 전에 징용을 끌려가지 않으려고 만든 반도의용정신대가 해방이 되면서 치안을 유지하는 행동단체 같은 게 됐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좌우가 분명하게 갈리지는 않았잖아요. ▲분명하게 안 갈렸었죠.
- 그래서 김일성이 사람을 시켜서 육군소장을 시켜주겠다고 포섭하려고 했었던가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우익에서도 김선생이 남아야 한다, 이렇게 밀고 당긴 게 아닌가 싶어요.
▲ 먼저 해방 직후만 해도 김일성이 아직 정부를 수립하기 전이니까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할 수 있었던 거라는 걸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혁명을 달성해야 하는 공산정권측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할 수 있는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생각하나봐요. 인텔리겐차, 즉 지식분자들은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운 거죠. 이런 맥락에서 좌익에서 볼 때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 전과자들이 무장을 한 채 사단병력 정도 되니까 이게 10만 명의 전위부대보다 낫다고 생각한 거죠. 게다가 우리가 해방 직후 해군 무관부를 점령해 상당수의 무기도 갖고 있었으니…… 하지만 내가 독립군 사령관의 후예니까 괴뢰군 계급장으로는 안 되겠으니까 소련군 계급장을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스티코프’라고 소련군 육군소장이 북한의 군사책임자였는데 남한의 군사책임자로 날 포섭하려고 한 거죠.
─ 어떻게 포섭하던가요?
▲ 지금은 월북한 만담가인 신불출이라고 있어요.
─ 신불출이요?
▲ 신불출은 낙원동에 살았었는데, 일정 때부터 나와 친하게 지냈어요. 그 친구가 좌익인데 나한테 연락이 와서 만나자고 해요. 지금은 태화관이라는 중국 요리집에서요. 전에는 거기가 조선관이란 요리집이었지요. 만나니 나를 소련군 육군소장으로서 남한의 군사책임자로 임명한다는 사령장과 함께 금단추가 번쩍이는 소장 제복을 보여주더라구요. 스티코프가 김일성을 통해서 보낸 거죠. 그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 소령이었고, 남일은 소련군 육군 대위였었죠.
─ 아주 좋은 제안이었는데 귀가 솔깃하셨겠네요.
▲ 처음에는 그랬죠. 하지만 이 말이 어떻게 우익으로 새어 나갔는지 난리가 난 거죠. 만일 김두한이가 공산당에 붙으면 하루아침에 적화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때 남한에 진주한 연합군 사령관이 하지 중장인데 사단병력을 이끌고 들어왔거든. 38선 지키고 서울 점령한 병력이 2만밖에 안되는데 나하고 붙어서 패하면 일본 오키나와로 돌아가야 되거든. 그걸 북한이 노리고 나에게 접근한 거예요. 미군이 진주해서 우익진영이 강력해지면 그땐 이미 늦으니까. 해방 직후가 찬스인 거지요.한민당에서 총무부장으로 계시던 장덕수 선생이 볼셰비키에 대한 강연을 했어요. 그 자리서 공산당이 어떤 곳인지 좀 알게 됐지만 그래도 한창 영웅심에 불타는 젊은 나이 아닙니까? 27세밖에 안 됐으니까. 제가 마음을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때 장덕수씨가 술 한잔 하며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거예요.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 박상실이 자네 아버지를 방앗간에서 죽였다. 소하 6년 그러니까 1930년에.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이 주도한 거라며 얘기하니까 눈물이 확 쏟아지지 않습니까. 그때서야 진실을 알게 됐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거죠. 참 위태로웠던 순간이었죠.백범 선생도 나중에 그 얘길 들으시고는 깜짝 놀라시더군요. 저를 불러서 내가 너희 아버지와 친군데 그러면 안 된다며 내가 갈길에 대해 한참 얘기를 해주셨지요. 제가 그후 정치적인 노선은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박사를 따랐지만 정신적인 지도자로는 백범 선생을 가장 존경했어요. 그 분은 참 애국자입니다. 우리가 남북으로 갈려 우리 민족끼리 영원히 서로 살상을 하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신 것은 애국심의 차원입니다. 38선은 우리의 38선이 아니라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한 힘의 균형의 선이라고 보신 거지.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를 파악하신 거예요. 우리가 만든 선이 아니거든요. 그게 바로 우리 국민의 비극이란 걸 잘 알고 누구보다 슬퍼하신 분이지요. .
─ 그럼 김선생이 공산당과는 같이 안 하고 민족진영 쪽에서 싸워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그 별동대에 균열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 아니오. 그 전에 벌써 떨어져 나갔죠. 좌익이 창건하자마자 사상이 그런 애들은 이미 그쪽으로 갔습니다. 주로 가난하고 거지로 자란 아이들이 갔는데 간 인원은 불과 몇 백 명이 안 됐어요. 남은 인원 가지고 대한민주청년 총연맹을 창설한 겁니다.
(입력일 : 2007.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