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동대 말입니다. 치안특별 감찰대로 건준 산하에 들어가기 전 대원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신 데가 어딥니까. 지난 번에는 모처라고 하셨는데……
▲ 원래는 운현궁에 전부 집결시키려고 했는데, 1만 2천 명이나 되니까 한번에 모일 수가 없더라구요. 장소가 비좁아서. 그래서 그 근처에 천도교당이 있어서 반은 그리로 집결시켰지요. 천도교당 안에 제가 순국선열에 대한 제단도 만들어놨어요. 아버지 친구 분들이 그렇게 하라고 얘기를 하셔서, 한일합방 전에 의병을 일으킨 분들부터 시작해서 해방 때까지 자주 독립을 위해 돌아가신 고귀한 국내 및 국외의 순국선열자들의 영정을 모셨지요. 향불을 놓고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1만 2천 명의 동지들에게 절을 하게 했지요.그런 다음 선서식을 했습니다. 1백명 단위로 대원을 편성하고 별동대장을 한 명씩 임명했으니까 한 부대에 101명씩 돌아가면서 한 손을 들고 선서를 한 거예요. ‘우리는 과거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순국선열들이 고귀한 피를 흘렸던 목적인 나라의 자주와 독립 정신을 계승하며, 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방해하는 어떠한 악조건이라도 극복하고 우리 전원의 생명을 걸고서 무찌르겠다’ 하는 게 선서내용이었지요.
─ 그런 다음 건준과 헤어진 뒤 대한민주청년 총연맹으로 개명했다고 하셨는데, 좌익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외 다른 정치판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나요.
▲ 나간 사람은 불과 3, 4백 명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공산당쪽으로 간 게 아니라 장사꾼이 된 사람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향에 가거나 그만 둔 사람도 있었죠. 나중에 안 얘기지만 공산당원이 된 대원들은 거의 다 죽었어요.
─ 기록에 보니까 정모라는 친구가 좌익에 붙어서 행동대장이 돼 나중에 김 선생님하고 맞부딪친 일도 있다고 하던데……
▲ ‘정진영이란 친군데요. 그 친구 살던 곳이 종로 삼정목 부근의 청계천인데 거지 출신이에요. 고아로 자란 놈을 내가 거두어서 부하로 썼는데 어머니가 한 분 계셨어요. 모자가 같이 구걸하러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서 내가 나중에 조선극장 뒷터에 집도 지어주고 그랬지요.
─ 그런 친구가 왜 배신을……
▲ 배신이랄 수도 없지요, 뭐. 사실 그때 거지 출신들은 모두 공산당으로 가는 분위기였으니까요. 공산당들이 빈부의 격차 없이 누구나 잘 살게 해주겠다,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겠다, 노동자나 거지 등 무산자 출신들을 더 우대한다고 선전을 했었으니까요. 우리 대원들 전부가 거지 아니면 부랑자, 전과자 출신인데 심정적으로는 다 공산당쪽에 마음이 가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공산당은 우리의 원수라고 하니까 저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으로 제 쪽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거죠. 저 때문에 징용 끌려가지 않고 해방 때까지 죽지 않고 잘 살았으니까 저에 대해 고마워하는 대원들이 많았죠.정진영은 나중에 바에 근무하는 여자한테 장가도 보내줘서, 해방될 때까지 어린애도 둘이나 낳았어요. 정진영처럼 거지 출신인 아이들이 대개 공산당으로 갔죠. 공산당에는 제가 이끄는 대한민청과 비슷한 조직으로 조선민청이라고 ‘조선민주청년 총연맹’이라는 게 있었어요. 조선민청은 말하자면 공산당의 전위부대 격이죠. 정진영은 조선민청의 부대장이 됐어요. 그래서 몇 번 맞닥뜨리게 됐는데 절 보면 슬슬 피했지요. 저도 좀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저도 사실 아버님이 공산당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사실만 몰랐다면 아마도 공산당이 됐을지도 몰라요. 저도 거지 출신이라 공산당들이 떠드는 선전이 그럴 듯했었고, 김일성이 저를 남반부 인민항전유격총사령관, 조선인민군육군소장으로 임명하려고 포섭을 하려 했으니까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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