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됐을 때 백지 상태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을 텐데, 구체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또 어떤 활동부터 시작했는지가 궁금하군요.
▲ 징용을 안 가려고 모인 1만 2천 명의 정신대 대원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들이 그동안 방랑하면서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좌우지간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못된 짓은 다 한 사람들이에요. 뭐 그때는 나도 그랬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배급쌀 타서 먹이고 징용 안 끌려가게 했으니 내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갑자기 해방이 되는 바람에 할 일도 없어졌고, 배급쌀도 안 나오게 생겼으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전체 회의를 열기로 했지요. 인원이 워낙 많으니까 모처에 장소를 빌렸지요.제가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자, 이제 어떡할 것이냐? 그동안 우리에게 나라가 있었으면 우리가 적어도 요동반도나 만주 등 대고구려의 옛영토를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위대한 국민, 장군이 있었지 않느냐.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다. 주권국가에서 태어났다면 큰 인물이 됐겠지만 나라 없는 설움을 견디지 못해 우리가 부랑자로 지내다 전과자가 된 것이 아니냐. 이젠 불문에 붙일 과거사니까 해방이 된 새 조국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토의해 보자’ 이렇게요.
─ 그래 반응이 어떻던가요?
▲ 반응은 열렬했지만 참 난감합디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호응을 갖고 어떤 계획을 세워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지만 저도 마찬가지고 개개인이 전부 홍길동이고 팔도강산에서 몰려든 어중이떠중이니 그 우거지잡탕을 말아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죠. 제 아버지, 어머니 말도 안 듣는 부랑자들인데 통솔이 쉽게 되겠어요. 게다가 의견들이 또 다 다릅니다. 연안파를 지지하자는 무리도 있고, 박헌영이한테 가자, 여운형에게 붙자는 쪽도 많고……별소리가 다 나오는 거죠. 아무래도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 같더군요. 어디가 정통파인지를 서로 모르니까.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불러서 이것저것 얘기하니까 저 역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더군요. 하루는 현재 공화당 대통령 고문으로 있는 이규갑씨가 절 불렀어요. 그분은 당시 건국준비위원회 재정부장이었죠. 찾아 뵈었더니 윤치영씨의 형님되는 분과 함께 있다가 다짜고짜 ‘너 내 말 들어라. 나는 네 아버지의 결의형제다’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쭉 하는 거예요. 이 두 분과 제 아버님, 노백린 장군, 현재 통일부에 있는 유동렬 씨 등 8명이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해요.이규갑씨는 ‘해방이 되었지만 김좌진 장군은 못 들어온다, 죽었으니까 해방 조국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다. 그러니 아들인 네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했어요. 제가 울음을 터트리니까 화를 내시며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부터 아버지가 못 다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내가 대신 아버지를 위해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아버지는 일본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국제공산당의 음모에 의해 암살범 박상실한테 당했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정미소에서 일을 하던 중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숨졌다고요.
─ 지난 번에 그런 얘기를 장덕수 선생에게도 들었다고 하셨는데……
▲ 맞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에게 불려갔을 때 이런 얘길 많이 들었지요. 한데 이규갑 선생은 아버지가 왜 암살당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얘기를 해주었어요.
─ 아, 그래요. 왜 그렇게 됐다고 하시던가요.
▲ 아버님이 11년 동안 만주 일대에서 전투하면서 일본인 무사를 수만 명이나 전사시켰잖아요. 아버님이 주석을 맡은 한족총연합회가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 거주하는 2백만 교포들로부터도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공산당이 만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김좌진 장군이 걸릴 것 아니겠어요. 만주의 치안과 군권, 민권을 전부 쥐고 있으니…… 국제공산당이 아버님과 타협을 시작했죠. 그러나 아버님은 현재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하지 공산당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은 나라의 독립을 찾은 뒤 국민에게 물어보면 되지 지금 여기서 공산당하는 것은 안 된다고 거절했답니다. 그래서 만주를 점령한 뒤 일본, 조선으로 손을 뻗치고 싶은 국제공산당이 아버지를 암살했다고 말이죠. ‘그러니 공산당은 너희 아버지의 원수인 동시에 앞으로 이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 원흉이므로 공산당을 처단하는 것이 국가와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길이다’ 라고 절 설득하셨어요. 공산당은 이미 일제시대 때도 자기네 말을 안 듣는다고 흑하참변을 일으켜 동족을 많이 죽였잖아요. 그래서 머지 않은 장래에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면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산당을 말살하는 것이 조국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니 지금부터 공산당을 적으로 설정하고 싸워주기 바란다고 했지요. 이규갑 선생님의 말씀은 혼란스러웠던 저를 바로잡아주고 제 할 일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해줬을 만큼 감명적이었지요.
─ 그럼 그때서야 공산당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건가요?
▲ 네, 그렇지요. 해방 전에는 잘 몰랐고 그런 얘길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감옥에서 만났던 공산주의자들도 주적은 일본이었기 때문에 공감하는 바가 있었으니까요. 그때 옆에 계신 윤선생님이 신문을 보여줘요. <인민일보>라는 공산당 기관지입니다. 그때 공산당 기관지가 5개나 있었는데, <중앙일보(현재 중앙일보와는 다른 것임-편집자)>을 비롯 <조선인민보>, <노력인민> 등인데, 박헌영이가 조선공산당을 창건하면서 한 말이 실려 있었어요. 우리가 소련연방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식민지가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두 분 선생님은 소련연방이 일본 식민지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했어요. 공산당은 강령정책에 위반하면 용서라는 게 없고 다 죽인다 이겁니다. 일본은 식민지 국민이라도 그 앞에서 절만 하고 자기네 얘기만 듣는 척하면 죽이지 않지만 공산당은 혁명 대열에서 이탈하면 전부 죽인다는 거예요. 국가와 민족을 부정하고 혈육도 없으며 전통을 깨뜨리고 역사를 바꾸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김 동지가 잘 알아서 부하들에게 얘기해라 이런 얘기를 쭉 해줬습니다.
─ 윤선생님의 존함을 모르시나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 아, 윤치성씨일 겁니다. 앞으로 백범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입국하실 텐데 그냥 이대로 있으면 큰일나겠다 싶었죠. 곧바로 동지들을 만나 얘기를 했죠. 먼저 치안을 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치안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해서 동지들도 수긍을 했지요. 제가 1만 2천 명의 인원으로 특별감찰대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했었죠? 그래서 그걸 대한민주청년총연맹으로 바꾸고 제가 위원장에 취임했던 겁니다.
─ 아,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해군 무관부를 습격한 것은 그 전이겠군요.
▲ 그렇습니다. 해군 무관부를 습격한 것은 해방되자마자 만든 치안특별 감찰대에서 한 거죠. 해방됐다고는 하나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기 전이어서 아직 일본군은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말이 해방이지 사실상 일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할 때라 일본군과 싸우려고 해도 무기가 없었어요. 나는 5백 명의 대원을 선발해서 화신 네거리에 있는 해군 무관부를 점령하자고 설득했습니다.해군 무관부의 대장은 중장이었는데, 바리케이트를 이중삼중으로 쳐놓고 있어서 정면습격은 좀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가 행진을 하는 것처럼 해군 무관부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되돌아서서 공격하는 전법을 쓰기로 했죠. 나는 내 부하들 중 곱슬머리나 옴팍눈을 한 독종들로만 선발했기 때문에 그 용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앞장 서서 쳐들어가니 일본군들은 감히 대항조차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이미 패전군인 그들에게 싸울 정신이 있었겠습니까?그곳의 책임자인 해군 대령으로부터 순순히 서울지구의 군수품 창고 열쇠를 인계받았어요. 그들은 본토에서 최후의 일전을 각오했기 때문에 창고의 군수품은 정말 대단했어요. 제조된 피복을 비롯해서 양복지, 군화, 38구경식의 권총 등 일체의 무장을 얻었죠. 나는 귀대해서 압수한 양복지로 단원들에게 제복을 만들어 입히고 나 자신은 무궁화 안에 태극기를 그려넣은 마크를 만들고 금으로 뜬 별 3개를 붙였죠. 스스로 한국독립군의 정신적 후계자로 자임했고, 대원들에게도 만주에서 싸운 대한독립군의 법통을 이었다는 명예심을 갖도록 훈계했습니다.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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