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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21화 해방을 맞은 마음의 준비
김두한 편
제21화 해방을 맞은 마음의 준비
1969.11.06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지금까지 태어나서부터 아버님 얘기도 듣고 하면서 해방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습니다만 김선생님이 걸어온 길은 벌거벗은 형태의 정치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인이 의식을 했건 안 했건 말이에요. 적이 있고 동지가 있고……

▲ 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 적을 골탕먹인다든지 어려운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서 빠져나왔다든지 하는 것도 사실 정치에서도 많이 나타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또 조직을 이끌어가는 것도 그렇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인간적인 면에 호소한다든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기도 하고…
… 해방 후 김선생께서 정치판에 뛰어들었을 때 배운 건 많지 않아도 유능한 정치인이 된 건 그런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어떤 정치 논리를 터득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정치의식이 쌓이게 되면서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얘기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배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해방을 맞이해서 그렇게 감격에 겨워하시면서 앞으로 내가 무얼 해야 하겠다, 아니면 정치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군요.

▲ 사실 그때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누구 아들이란 걸 일본 순사들이 다 알 때인데 똑똑하게 보이고 내가 무슨 일을 할 사람인 걸 알면 가만두었겠습니까? 항상 요시찰 인물이었으니 벌써 죽었지요.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유치장은 물론이고 형무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했어요. 일제 땐 감옥에 가면 사상범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사상범이라 해도 그땐 연합전선 아닙니까. 해방 후처럼 좌익과 우익이 서로 싸우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의 적은 하나, 일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다 같은 동지였지 서로 사상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릴 때는 아니었어요. 특히나 감옥에서 제가 볼 때는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하면 아주 잘해 주고 아버지에 대해 들은 얘기를 참 많이 해줍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만나자고 연락하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에 관해 새로 들은 얘기를 해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어요.하지만 스무살 적인가 경기도 경찰부에서 나를 데려다가 아버님 사진을 쭉 갖다 놓고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아버지 얼굴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중국사람이냐고 물어보지요. 그러면 조선 남자가 아버지도 몰라보는 못난 자식이라고 따귀를 갈기는 거야. 그래도 계속 모른다고 잡아떼면 나가라고 그래요. 이렇게 병신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그때는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백지 상태였어요. 빨강 물감 들이면 공산당 되고 파란 물감 들이면 민주주의 되고, 까만 물감 들이면 아나키스트 되고, 하얀 물감 들이면 민족주의자되고, 노랑 물감 들이면 회색분자 됐던 시절이죠. 그러니까 저 또한 완전히 백지로서 해방을 맞이한 겁니다.’

─ 아무런 준비 없이 말입니까?

▲ 그렇죠. 지도층에 있는 독립운동가라고 해 봐야 수십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다수 민중은 일본 사람한테 짓밟혀 살아왔기 때문에 독립 의식이 전혀 없었죠. 강압적인 정치와 강제적인 교육을 받았으니 백지 상태인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뭐가 올바른지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니까 갈팡질팡한 거죠.조선총독부에서 백관수, 송진우, 인촌 김성수 선생을 불러서는 조선총독부를 인수인계하고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맡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 선생들은 앞으로 연합군이 곧 진출하기 때문에 우리가 맡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거절했지요. 이러니까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났단 말입니다. 몽양은 안재홍씨와 상의해서 맡겠다고 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겁니다. 건준은 안국동 로타리에 있는 지금의 신민당 맞은편 쪽, 풍문여고 자리에 간판을 걸고서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건준에는 공산당 사회주의자들이 약 3할, 우익들이 약 7할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때 신문에 박헌영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좌익계통인 <해방일보>라는 신문이었는데, 호남 벽돌공장에서 숨어서 해방을 맞이한 박헌영이 이주하, 김삼룡과 만나 공산당을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겁니다.그때는 백범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도 들어오기 전인데, 공산당들은 순식간에 조직을 정비하고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공산당은 국내에 있는 장안파와 국외파,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열로 치면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이기 때문에 남북한 통틀어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김일성이도 그땐 아니지요. 그는 국제공산당 한국 책임자였으니까. 그 조선공산당의 세가 강화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뚫고 들어가자고 작전을 짜고 이를 위해 먼저 지방 건국준비위원회부터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후 제2차 대의원대회를 소집했어요.

─ 건준의?

▲ 네. 그때 안재홍씨 파가 밀려 나갔죠. 여운형씨는 조선총독부에서 인정한 사람이었고, 국민들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인기가 제일 좋았던 인물이니까 꼭두각시로 놔두고 완전히 공산당이 건준을 장악하게 됐습니다. 허헌이란 자를 부위원장으로 하고 이강국을 조직부장으로 앉혔지요. 이때 연합군이 들어와 군정을 펴게 된 거죠. 군정은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운형씨가 위원장이긴 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공산당 조직이었으니까요. 지방도 완전히 공산당원 일색이었으니……

─ 건준 조직 그대로를 인민위원회로 만들었다 그 말이죠?

▲ 그렇죠. 인민위원회가 되니까 민족주의자들은 다 떨어져 나갔지요. 그리고는 이 인민위원회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인민공화국을 창건한다며 이승만 박사, 백범 선생, 여운형 선생 등을 떡 앉혀 놓았지 뭡니까. 이박사와 백범은 귀국도 하기 전입니다. 저는 그분들과 서신으로, 무전으로 연락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운형씨가 단독으로 조선인민공화국 대통령이 되고 나머지 관료는 모두 공산당 일색이 된 겁니다. 그때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정당이라고 하면 한국민주당 이것밖에 없었죠. 인촌 선생이 중심이 되고 백관수, 송진우, 장덕수, 조병옥, 장택상 씨 등이 포함돼 있었죠. 이박사나 백범 선생이 들어오기 전 좌익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과 대립하는 당은 한민당 하나였단 말입니다.

─ 김 선생은 해방 직후인데 어떻게 이승만, 김구,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여운형 등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민족주의자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어요. 개중에는 안면이 있는 분들도 있었나요?

▲ 여운형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 시절 미결 감옥에서 뵈었고, 송진우 선생하고 백관수 선생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슨 사건으로 들어 오셨는고 하니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 일장기 말살한 사건이 있잖아요? 그 때문에 들어오셨었지요.

─ 해외에 나가 계셨던 이승만, 김구 선생분들은 어떻게 아셨는지.

▲ 그거 모두 아까 얘기했잖아요. 모두 유치장이나 형무소에 있을 때 독립운동 하던 사상가들로부터 들었지요. 백범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것은 알았는데 주석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가서 나중에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고 있는 지사라고 들었구요. 그분들은 사실 뵌 적은 없지만 제가 무척 존경했고 꼭 뵙고 싶었던 분들이죠. 제 아버지도 집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며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분들이 훌륭한 지도자이기 전에 제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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